'조곤조곤'은 책과 영화, 드라마와 노래 속 인상적인 한 마디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무심코 스치는 구절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이야기로 풀거나, 그 말이 전하는 통찰과 질문들을 짚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언젠가 모임에서 어떤 남자를 만났다. 그곳에서 우리는 모두 실명 대신 별칭을 썼는데, 그는 내가 읽었던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을 쓰고 있었다. 당시 내가 활동하는 단체는 대부분 별칭을 사용했는데, 책에 등장한 인물의 이름을 쓰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는 내가 평소에 목을 놓아 부르는 이상형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상하게 눈길이 갔다. 마치 종이 밖으로 걸어 나온 사람을 만나는 느낌. 그 남자를 생각할 때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감정의 기복이 심한 편이기에 어떤 마음이든 들면 의식적으로 회의하고 의심하려고 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를 보냈을까. 나는 회사 동료에게 폴짝 뛰며 이야기했다.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다음 수순은 이럴 것이다. 다시 모임에서 우연히 그 남자를 마주친 나는 그에게 관심을 보인다. 혹은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그의 연락처를 찾는다. 아니면 하다못해 SNS를 검색해 그 남자를 찾은 후 친구 신청이라도 한다. 하지만 셋 중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로 그는 모임에 잘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그 남자를 직접 찾아나설 열정이 있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나의 일상은 똑같았다. 별다른 약속이 없다면 집으로 돌아와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그러면서 술을 마시다 잠이 드는 삶. 그런 생활이 지겨웠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오래 누리지 못하면 어떨까 두려울 정도였다. 이런 나를 지켜보던 친구가 참다 못해 그 다음은 어찌 됐냐고 물었다. 나는 답했다.

"그런 떨림 오랜만이었잖아. 그걸로 됐어. 모든 관계가 잘 될 순 없어."

지금은 나는 그를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비긴 어게인' 이소라,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웃음 21일 오후 서울 상암동 jtbc사옥에서 열린 <비긴 어게인> 제작발표회에서 가수 이소라가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 있다. <비긴 어게인>은 뮤지션 이소라, 유희열, 윤도현이 방송인 노홍철과 함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해외를 여행하며 버스킹에서 도전하는 프로그램이다. 25일 일요일 오후 10시 30분 첫 방송.

▲ '비긴 어게인' 이소라,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웃음 21일 오후 서울 상암동 jtbc사옥에서 열린 <비긴 어게인> 제작발표회에서 가수 이소라가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 있다. <비긴 어게인>은 뮤지션 이소라, 유희열, 윤도현이 방송인 노홍철과 함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해외를 여행하며 버스킹에서 도전하는 프로그램이다. 25일 일요일 오후 10시 30분 첫 방송. ⓒ 이정민


집에서 안 나가면 그런 게 편안하니까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는다. 주변에 이목을 끄는 남자가 생기고 묘한 흥분 상태에 빠지지만 그 다음으로는 더 이상 나가지 않으려는 상황의 연속이. 이것을 딱히 체념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정확하게 설명하긴 힘들지만 나는 그저 '그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쉽게 마음을 정리했다. 사실 적당히 즐기기도 했다. 깊은 물을 헤엄치는 것도 재밌는 일이지만 얕은 물에서 발을 첨벙거리며 시원함을 느끼는 것도 좋았다. 딱 그 정도. 그리고 그 옆에는 내가 사랑하는 책과 술과 영화가 그리고 펜과 노트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흔들리지 않는 내가 어른의 사랑을 하고 있다며 은근한 자만심도 느꼈다. 나는 이따끔 짝사랑의 고통을 호소하는 친구들에게 그럴 때는 지났다고, 차라리 취미를 좀 가지라고 말할 정도였다.

노래 '좀 멈춰라 사랑아'에서 이소라는 이렇게 말한다. '혼자서 놀다 보면 친구 같은 거에도 관심 없어 집에서 안 나가면 그런 게 편안하니까'. 역시나 작사 능력이 탁월한 이소라 답게 단 몇 마디로 상황이 요약된다. 혼자서 놀면 남자가 무엇이냐 친구에게조차 관심이 덜 가게 된다. 사람들은 혼자 놀기가 무척 고독한 행위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오해다. 책을 읽는 것도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도 모두 일종의 소통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에게 말을 건다. 외롭지가 않다. 사랑이 주는 만족감이 크기는 하다만 어느 정도 상쇄가 된다. 이러니 굳이 편안한 집 밖을 나서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남자를 찾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나는 이 노래의 제목이 '사랑아 이런 내게 오지 말고 그냥 좀 멈춰라'라는 의미를 담은 줄 알았다.

사랑은 왜 아플까

그런 생각이 와장창 깨진 것은 책 <사랑은 왜 아픈가>를 읽고 나서였다. 제목만 들었을 때는 전혀 손이 가지 않았지만 인상깊게 들은 강의에서 추천했기에 즉시 구매했다. 이 책에서 에바 일루즈는 현대의 사랑이라는 감정을 철저히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파헤친다.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넘쳐나지만 내 눈길을 집중시킨 부분은 사랑을 인정 욕구와 엮어서 분석한 부분이다. 일루즈는 현대에 들어 사회적 자존감은 사회관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수행을 통해 얻어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 관계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낭만적 관계, 사랑이다. 사회적인 구성물이지만 동시에 매우 사적인 사랑은 어떤 인간 관계보다 개인의 자아에 밀접하게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공적인 사랑과 감정의 교류는 그 관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자존감을 고양시킨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 그것은 치명적인 위협으로 돌변한다. 연인 관계에서 감정적 착취를 당하건 아니면 일방적으로 차이든, 시작도 하기 전에 거절을 당하든 이는 자아의 가치가 손상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실연을 겪은 사람은 자아가 무너지는 느낌을 겪는다).

더 큰 문제는 현대 사회엔 대부분의 애정 관계가 단단히 닻을 내릴 만한 의례(절차)가 부재한다는 점이다. 과거와 달리 이제 사랑을 할 때 지켜야할 정해진 사회적 양식이 없다(물론 이는 자유와 해방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위험 요소는 널렸다. 여기까지 읽고 나는 나의 일상을 돌이켜 보았다. 술은 마시면 취한다. 책은 읽으면 지적인 즐거움을 준다. 영화는 보면 재밌다. 이들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행위의 대가는 확실하다. 그리고 그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감정을 안정적으로 통제하는 게 아니라 그저 모험을 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JTBC <비긴 어게인>의 이소라. '명불허전'이었다.

ⓒ JTBC


다시 알게 된 '좀 멈춰라 사랑아'의 의미

물론 나 혼자 이런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함부로 나의 방식이 딱히 낭만적 관계를 맺는 것보다 못하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도대체 연인 관계가 만들어 내는 감정이 뭐가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말이다(배타적 연애 관계 외에도 서로를 지지하고 애정을 나누는 관계는 얼마든지 많다). 하지만 거꾸로 사랑이 주는 상처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게 스스로를 지키는 것보다 덜 성숙한 방법인 것도 아니다. 그건 그냥 나의 착각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고작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이것도 나쁘지 않고, 저것도 그렇다'는 양비론적 결론뿐일까.

홀로 안온하거나 위험을 감수하고 누군가와 함께하느냐 선택의 문제라는것 말이다. 아직은 모르겠다. 다만 다른 궁금증이 떠올랐다. 호감이 가는 사람과 거리를 두고 적당한 떨림을 즐기며 잉여로 남는 고독은 혼자 놀며 해소하는 생활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까.

오해와 달리 '좀 멈춰라 사랑아'는 오는 사랑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가는 사랑에게 하는 이야기였다. 이소라는 이렇게 노래한다.

"나 어쩌나 이 일을 가는 마음은 도무지 멈춰 설 줄을 모르고/ 내 마음 따라 두 눈은 멍청하게 그렇게/ 너를 따르는 그 그림자 그 뒤를 또 따라가네"

나는 처음에 '도무지 멈춰설 줄을 모르고 가는 마음'이 애정의 대상에게 다가가는 화자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그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그 자체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림자처럼 따르는 그 마음을 그녀는 오직 눈으로만 쫓는다. 절대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다 노랫말처럼 결국 한 적도 없이 사랑을 떠나 보낸다.

이렇게 생각하자 나는 슬슬 불안해졌다. 이러다간 감정적 힘이 너무 약해진 나머지 노래처럼 누군가를 쫓고 싶어도 그러지 못할 때가 올까? 아쉬움을 입속으로만 굴리다 종이에나 남기는 때가 올까? 아니 어쩌면 그 순간에 그런 안타까움조차 느끼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에바 일루즈의 말처럼 통념과 달리 감정은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조건의 영향 속에서 형성된다. 항상 변하는 세상이다. 사랑도 예외일 순 없다.

이소라 좀 멈춰라 사랑아 사랑은 왜 아픈가 에바 일루즈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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