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드디어 우리 집에도 전축(턴테이블)이 들어왔다. 카세트 데크와 라디오 기능까지 갖춘 최신형 전축이었다. 당시 전축은 상당히 귀한 가전제품이었다. 그러니 세상을 다 가진 듯, 이때부터 나에게는 밤낮이 따로 없었다. 주야장천 신이 나서 음악만 틀었다.

외삼촌 집에서 말없이 슬쩍 해온 조용필의 1집 LP판을 다시 한번 꺼내본다. 바라만 봐도 그저 행복하다. 1980년 3월 발매된 조용필의 앨범은 파죽지세로 대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창밖의 여자'는 물론 B면의 타이틀곡인 '단발머리'를 들으면 왠지 곧 귀여운 단발 소녀와 사랑이 이뤄질 것만 같았다.

나비 리본에 촌스러운 머리 모양의 얼굴만 크게 나온 한참 덜떨어진 디자인이건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가수가 좋고 음악만 좋으면 됐지 그런 외적인 것은 안중에 없었다. LP판 재킷을 보고 또 바라본다.

LP판의 추억, 건전가요나 군가가 끼어 있었지만...

 '단발머리' 등이 수록된 조용필 1집 LP 사진.

'단발머리' 등이 수록된 조용필 1집 LP 사진. ⓒ 조용필 1집


심호흡을 한번 하고 LP판을 턴테이블에 올렸다. '치지직~' 잡음을 내더니 이어 "빠바 빰빠바" 조용필의 '단발머리' 전주가 흘러나온다. 왠지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랬다. LP판이 회전하면서 내는 잡음은 단발머리 소녀에 대한 그리움, 아련함뿐만 아니라 기쁨까지 담아내는 것 같았다.

'단발머리'에 이어 '한 오백년', '대전 블루스', 너무 짧아요', '슬픈 미소' 등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당시 LP판을 발매하는 대형 음반사들은 오직 타이틀곡을 뽑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다른 앨범 수록곡들은 대충 구색만 맞춰 끼워 넣는 관행이 있었지만, 이 LP판은 조용필이라는 이름 석 자만으로도 화려하게 빛을 뿜었다.

그런데 갑자기 씩씩한 행진곡이 흘러나온다. 조용필 앨범에 '너와 나'라는 군가가 웬말인가? 80년대에 나온 음반에는 반드시 한 곡씩 생뚱맞게 들어 있던 건전가요가 있었다. 음반의 주인공이나 분위기와는 무관하게 후면의 마지막에 어김없이 끼워진 건전가요나 군가는 자칫 정지 타이밍을 놓치면 감상의 분위기를 깨고 말았다. 그래도 지긋지긋하게 들어온 '조국 찬가'나 '시장에 가면'이 나오지 않은 게 또 어딘가.

몇 년 후 나는 고등학교에 올라가게 되었고, 이때 새로운 문화의 움직임은 바로 FM 라디오였다. 음악 전문방송의 진행자는 더는 아나운서로 불리지 않고 새로운 이름인 디스크자키(DJ)라고 부르게 되었다. FM과 DJ는 나를 새로운 음악 세계로 인도하는 데 공헌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내가 LP판 수집에 푹 빠지게 되었는데, 그렇게 된 계기의 대부분은 김광한씨의 영향이 주효했다.

팝 전문가 1세대로 1980년대 젊은 세대에서 팝송 붐을 일으키는데 공헌한 김광한씨는 당시 KBS 2FM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을 진행하며 팝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마이클 잭슨, 마돈나 등 한국에도 팝송 팬들이 늘어나기 시작할 무렵, 김광한씨는 단순한 선곡에 그치지 않고 탁월한 진행 능력으로 국내 처음으로 해설까지 곁들었다.

특히 김광한씨를 통해 알게 된 영국 출신 프로그레시브 록밴드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앨범 <벽 안의 또 다른 벽돌(Another Brick in the Wall)>은 이 LP판을 반드시 내 손에 넣겠다는 전의를 불타오르게 했다.

"우리에게 이런 교육은 필요 없어. 우리 생각을 통제하려 하지 마. 학생들을 아프게 하는 빈정거림은 그만. 이봐, 선생. 아이들을 내버려 둬!"라고 외쳤던 이 노래는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했고, 영화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노래의 흐름이 반전을 다뤘고 획일화된 교육의 문제점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1987년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금지곡이었다.

용돈을 탈탈 털어 사 모았던 LP

또 당시 AFKN 라디오에서 매주 토요일 케이시 케이섬(Casey Kasem)의 우렁찬 목소리로 빌보드 싱글차트 40위 히트곡을 소개하던 <아메리칸 탑 40>은 내가 사야 할 LP판이 무엇인지 인도하는 바이블이 되어 주었다. 테이프 세대라 기꺼해야 국내 감성 발라드곡이나 댄스곡에 만족했던 나에게 영국의 대중적인 팝이나 록 음악은 신세계 바로 그 자체였다.

 LP 플레이어

당시 LP는 1만 원 내외의 고가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매력은 좋아하는 앨범을 직접 고른다는 설렘이었다. 그 감동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 pixabay


이때부터였다. 돈이 생기면 무조건 LP판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LP는 1만 원 내외의 고가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매력은 좋아하는 앨범을 직접 고른다는 설렘이었다. 그 감동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유럽에서 라이선스를 받은 한국과는 다른 첨단 디자인의 재킷 이미지를 감상하는 것은 '덤'이었다. 그리고 폼도 잡고 싶었다. 그래도 명색이 <아메리칸 탑 40>를 듣는 사람인데, 국내 가요를 듣고 가요 음반을 산다는 자체가 좀 없어 보이는 것 같았다.

용돈을 탈탈 털어 사 모은 그 음반을 턴 테이블에 올려놓고 전주를 기다리는 여유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큰 기쁨이었다. 하지만 DJ의 입을 통해 알게 되었던 핑크 플로이드, 밥 딜런, 퀸 등 유명한 뮤지션들의 곡들은 대다수가 금지곡이라 방송은커녕 음반조차 구경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곡들을 직접 LP로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단골 레코드가게 사장님은 서울 세운상가에 가면 아주 싼 값에 '빽판'(LP를 흰색 종이봉투에 넣어 팔던 복사판 앨범)을 살 수 있다고 살며시 귀띔했다. 금지곡 제도가 있던 시절,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금지곡으로 된 민중가요를 비롯하여 미국과 유럽권의 팝 음반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경로가 있다는 것이었다. 어둠의 루트가 있다는 자체도 놀라웠지만 그런 길이 있다는 소식은 경이로웠다.

LP는 원판, 라이선스판, 빽판이 있었다. 해외의 유명 제작사에서 직접 제작한 LP는 '원판', 라이선스 계약을 하고 국내에서 제작한 LP는 '라이선스판' 그리고 불법복제로 찍어낸 해적판은 일명 '빽판'이라 불렸다. 각각의 LP는 가격 차이도 컸다. 백판은 정상가의 10~20% 이내면 충분히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빽판은 턴테이블이라 불리던 장치에서 재생되던 LP 음반 표면의 굴곡을 따라 바늘이 움직이는 메커니즘이라 충분히 복제할 수 있었다. 빽판은 당시 저작권 개념이 부족하고 단속이 허술했던 틈을 노렸다. 일단 업자가 원본이 되는 LP판을 밀반입하여 원본에 있는 요철을 틀을 이용하여 마스터판을 만들고 여기에 합성수지를 녹여 찍어내는 방법을 썼다.

이렇게 조악하게 만들어진 빽판은 정상적인 LP보다 음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방송금지곡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판매가 금지된 음반이 많았기에 빽판 말고는 금지곡 음반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낭만 광대 전성시대>를 쓴 언론인 오광수씨는 이렇게 말한다.

"세운상가의 대표적인 상품은 소위 '빽판'이었다. 지금처럼 음원으로 모든 음악을 접했던 시절과 달리 7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는 그 시절엔 LP판이 대세를 이뤘다. LP판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지만 해외에서 들어오는 LP판은 음악에 대한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는 10대나 20대들에게 늘 갈증을 불러왔다. 게다가 소위 정품들은 가격이 너무 비쌌다.

세운상가는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는 빽판 유통시장이었다. 청계천의 노점에는 손수레마다 산더미처럼 빽판들을 쌓아놓고 마니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품을 복제한 LP음반들은 주로 해외 유명 아티스트들의 명반이었다. 그뿐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로 검열에 걸려 국내시판이 금지된 앨범들도 즐비했다.

7080세대들은 대부분 그러했지만, 고등학교나 대학 시절, 가요를 듣는 것은 약간 하류층 국민들의 취향으로 치부했다. (중략) 사실 빽판을 턴테이블에 얹어놓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빗소리가 나고, 재수가 없으면 중간중간 툭툭 음악이 끊기는 현상이 나타났다. 게다가 바늘이 더 넘어가지 않아서 같은 소절이 무한 반복되는 현상도 생겼다. 또 정품이 총천연색의 앨범 재킷을 자랑하지만 빽판은 조악한 단색인쇄로 한두 번만 쓰면 커버가 너덜거리곤 했다." - 오광수 <낭만 광대 전성시대>(2013) 중에서

1985년,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나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버킷리스트를 작성했다. 목표는 빽판 100장. 그리고 돼지저금통에 빽판 살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새파란 놈이 부모님께 용돈을 타기 위해 늘 거짓말로 둘러대야 했고, 주는 돈이 적으면 짜증을 내는 일도 많아졌다.

용돈을 타낸 그 기발한 방법들은 아마 공부에 적용했다면 아마 전교 1등은 독차지하고도 남았다. 친구를 만나거나 독서실에 가더라도 점심을 거르는 일도 많아졌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겨울방학이 되었다.

3개월간 안 먹고 안 써서 피같이 모은 돈은 10만 원을 조금 넘어섰다. 이제는 서울행을 감행할 수 있었다. 목표는 단 하나, 빽판 구입이었다. 목적지는 청계천과 세운상가. 마침내 전남 여수에서 용산으로 향하는 비둘기호에 몸을 실었다. 장장 왕복 800km가 넘는 여정이었다.

"가요는 500원, 팝송 1,000원, 금지곡 2000원. 많이 사면 500원 깎아줘."

역시 청계천에는 빽판을 취급하는 아저씨들의 노점이 즐비했다. 나처럼 시골에서 왔는지 무리를 지어 LP판을 사러 온 '구찌'(박완서의 소설에 등장한 말로, 고정적인 일자리가 아니라 한탕 해먹고 빠질 수 있는 임시적인 일이나 중간마진으로 큰 이문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기자 주)들도 많았다. 그런데 내가 버킷리스트에 올린 음반들은 참 촌스러웠다. 세운상가와 청계천에서 파는 빽판 명반들은 내가 원하는 것과 차원 자체가 달랐다. 그곳에도 나름의 구매의 흐름이 있었고 베스트셀러가 있었다.

참 많이도 샀다. 반체제적 저항가요로 낙인찍혀 금지되었던 가요를 비롯하여 핑크 플로이드, 밥 딜런의 명반. 그리고 듣도 보도 못했지만 <긴기라기니>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노래부터, '안전지대'라는 일본 아이돌이 부른 노래까지 100장도 넘게 샀다. 정작 들뜬 마음에 온종일 굶었으니, 손에 든 빽판이 힘겨워 쉬다 가기를 반복한 건 당연했다. 그리고 누가 볼까봐 비닐과 신문지로 꼭꼭 싸서 반체제 불온문서를 소장한 민주투사처럼 비장한 심정으로 여수로 내려왔다.

 1980년대 세운상가. 당시의 세운상가는 서울의 중심상권으로 전자산업의 메카였다.

1980년대 세운상가. 당시의 세운상가는 서울의 중심상권으로 전자산업의 메카였다. ⓒ 서울시제공


왕복 800km를 달려 산 결과물은 아쉬웠지만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기쁜 마음으로 서울에서 여수까지 공수한 100장의 빽판 가운데 제대로 된 음반은 거의 없었다.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엄청났고 바늘은 안 넘어가고 조악한 겉표지에 판이 튀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특히 빽판은 자주 틀면 바늘이 쉽게 망가졌고 실수로 레코드 표면을 긁으면 바로 흠집으로 연결됐다. 아무리 공들여 닦고 틀어도 제작방식 자체가 조악해 튀는 잡음은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빽판은 애초부터 소장가치가 '제로'인 불법 복제품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몰락한 저 세운상가를 보면서 짠한 느낌이 드는 건 나로서는 당연한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레코드판은 젊은 층엔 생소한 물건이다. 아마 '길보드차트'의 근원이었던 불법복제 카세트 테이프 정도야 알 수도 있지만, 요즘 다들 디지털로 음악을 듣는 시대다. 특히 스마트폰이 거의 모든 부분을 흡수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추억'이라는 것은 왜 이리도 야속하고, 초라했던 옛것조차 아름답게 기억하게 만드는지.

나를 포함한 LP 애호가들은 디지털음원은 부드러움이 없다거나 원음을 왜곡한다고 말하곤 한다. 그런데 음악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일반인이라도 디지털 음원은 LP와 분명히 구분할 수 있을 만큼의 음색 차이가 존재한다. 실제로 LP의 재생 특성상 원음 왜곡이 더 많다. 오히려 이론상 디지털 음원이 원음의 왜곡이 덜하고 충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한 것이 명은 더 길게 마련이다. 이제는 왜곡된 소리가 돋보이는 LP의 '살아있는 소리'가 그립다. 1000원짜리 빽판 한 장에도 들떠서 가벼웠던 소년의 힘겨웠던 발걸음도 이젠 모두 추억이다. 박진영의 '살아있네'로 내 마음을 대신한다.

"레코드판이 카세트가 되고
카세트 테잎이 CD로 바뀌고
CD가 다운로드 스트리밍이 돼도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도
살아있네 살아있네 살아있네.
강한 자가 오래 가는 게 아니야.
오래가는 자가 강한 자란 말이야.
10년은 돼야 가수라고 하지.
20년은 돼야 스타라고 하지.
30년이 되면 레전드라 부르지.
그래서 이렇게 아직도 난 배가 고프지."
-박진영 '살아있네' 중에서.

덧붙이는 글 '덕질때문에 OO까지 해봤다' 공모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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