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선수단의 목표는 '8-4-8-4'였다. 금메달 8개,은메달4개,동메달8개를 획득해 종합순위 4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폐막을 하루 앞둔 현재 한국은 금메달과 은메달, 동메달을 각각 4개씩 수확하며 오스트리아(금5, 은2, 동6)에 이어 9위에 올라 있다. 현실적으로 8-4-8-4 목표를 달성하는 건 불가능해졌다.

최소 금메달 5개 정도를 기대했던 쇼트트랙이 금메달 3개에 그쳤고(물론 쇼트트랙마저 없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 했지만) '빙속여제' 이상화도 고다이라 나오와의 라이벌전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려 내심 깜짝 금메달을 기대했던 봅슬레이 남자 2인조의 원윤종,서영우조도 0.15초 차이로 아쉽게 5위를 차지했다. 스키나 바이애슬론, 스노보드 같은 종목은 여전히 참가에 의의를 두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장거리의 간판 이승훈이 출전하는 종목을 제외하면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남자 스피드 스케이팅에서는 팀 추월을 포함해 4개의 메달을 수확하면서 기대 이상으로 선전했다. 특히 국제무대에서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신예 선수들의 선전으로 만들어 낸 3개의 개인전 메달은 한국 남자 스피드 스케이팅의 밝은 미래를 예고하고 있다. 모태범에 의존하던 단·중거리 종목의 새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1/100초 차이로 은메달 목에 건 단거리의 다크호스 

한국 남자 스피드 스케이팅 단거리는 1980년대의 배기태를 시작으로 제갈성렬, 이규혁, 이강석으로 이어지는 나름대로 확실한 에이스 계보가 있었다. 그리고 이 계보는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신예 모태범이 깜짝 금메달을 차지하면서 비로소 꽃을 피웠다. 하지만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단거리의 르네상스는 열리지 않았다.
모태범은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 500m에서 밴쿠버에서 세운 자신의 기록을 0.15초나 단축하고도 메달 획득에 실패했고 이후 각종 부상과 슬럼프로 정점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계보가 끊어질 듯했던 단거리 계보를 이은 선수가 바로 차민규였다. 이번 평창올림픽에서 깜짝스타로 떠올랐지만 사실 차민규는 삿포로 아시안게임 대표선발전에서 모태범을 꺾었을 정도로 빙상계에서는 일찌감치 주목하던 떡잎이었다.

올림픽 기록 수립한 차민규 '표정은 무덤덤' 19일 오후 강원 강릉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 경기에서 차민규가 34초42로 올림픽 기록을 세우며 결승선을 통과한 뒤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 올림픽 기록 수립한 차민규 '표정은 무덤덤' 19일 오후 강원 강릉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 경기에서 차민규가 34초42로 올림픽 기록을 세우며 결승선을 통과한 뒤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차민규는 2016-2017 ISU 스피드스케이팅 월드컵 2차대회에서 3위, 2017 알마티 동계 유니버시아드 500m 금메달, 2017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500m 동메달을 따내며 착실히 커리어를 쌓아나갔다. 그리고 작년 12월 월드컵 3차 대회에서 은메달을 차지하며 남자500m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차민규는 500m에서 34초42라는 올림픽 타이기록을 세우며 34초41의 호바르 로렌첸(노르웨이)에게 단 1/100초가 뒤지는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차민규는 메달을 딴 후 인터뷰에서 약 4분 동안 30번이 넘게 '일단'이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일단 차민규 선생'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 단거리의 새로운 일인자로 등극한 차민규는 '일단' 모태범에 이어 월드클래스 자리를 물려 받을 차례다.

한 우물만 판 김태윤의 결실, 동메달로 돌아왔다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 장거리의 간판 이승훈은 5000m와 10,000m, 팀 추월, 매스 스타트까지 4종목에 출전하는 강행군을 치르고 있다. 특히 10000m는 자신이 출전하지 않으면 그 계보가 끊어질 지 모른다는 책임감에 출전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여러 종목에 출전하기보다는 가장 자신 있는 종목에 집중하는 것이 좋은 성적으로 연결될 가능성을 높이는 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23일 남자 1000m에서 깜짝 동메달을 따낸 김태윤은 한 우물만 파는 전략으로 올림픽 메달이라는 귀중한 결실을 맺는데 성공했다. 사실 1000m는 네덜란드, 노르웨이, 캐나다 등 빙상 강국의 간판 선수 36명이 출전해 자웅을 겨루는 종목으로 샤니 데이비스(미국)의 노쇠화 후 절대강자는 없지만 그만큼 경쟁이 심한 종목이다.

[올림픽] 질주하는 김태윤 23일 오후 강원 강릉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000m 경기에서 대한민국 김태윤이 질주하고 있다.

▲ [올림픽] 질주하는 김태윤 23일 오후 강원 강릉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000m 경기에서 대한민국 김태윤이 질주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하지만 오로지 1000m에만 집중해온 김태윤은 1분08초22라는 기록으로 네덜란드의 키얼트 나위스(1분07초95), 노르웨이의 로렌첸(1분07초99)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 30위를 비롯해 세계 레벨의 무대에서 이렇다 할 입상경력이 없는 김태윤으로서는 가장 큰 무대에서 그야말로 '깜짝 메달'을 목에 걸었다. 김태윤은 올림픽을 앞두고 장비부터 기술, 마인드까지 모든 것을 1000m에만 집중했다.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1000m는 지난 1992년 알베르빌 동계 올림픽에서 김윤만이 동계올림픽 역사상 최초의 메달을 안겨준 유서 깊은(?) 종목이다. 2010년 모태범이 은메달을 차지한 이후 8년 동안 끊어졌던 1000m 메달 계보를 무명에 가까웠던 김태윤이 이었다. 여전히 만23세에 불과한 김태윤은 아직 충분히 더 오랜 기간 전성기를 이어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선수다.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의 준비된 차세대 간판스타

500m의 차민규와 1000m의 김태윤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메달을 목에 건 깜짝 스타들이라면 1500m 동메달을 차지한 김민석은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전략적으로 발굴한 특급 유망주 출신이다. 이미 중학시절부터 고등부 선수들보다 더 빠른 기록을 작성했고 주니어 레벨에서는 세계대회에서도 여러 차례 우승을 차지하며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김민석은 2017년 삿포로 아시안게임에서 1500m와 팀추월 금메달을 차지하며 이승훈의 뒤를 이을 차세대 간판스타로 떠올랐다. 그리고 올림픽을 앞둔 월드컵 시리즈 1차대회에서 B파이널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김민석이 세웠던 1분44초97의 기록은 A파이널 우승자 데니스 유스코츠(러시아, 1분44초42)와 0.55초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 선수단에서는 내심 김민석이 평창에서 사고를 칠 것으로 기대했다.

'어사화 수로랑' 든 팀추월 선수들 이승훈, 정재원, 김민석 선수가 21일 오후 강원도 강릉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남자 팀추월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뒤 시상대에서 '어사화 수호랑'을 들고 있다.

▲ '어사화 수로랑' 든 팀추월 선수들 이승훈, 정재원, 김민석 선수가 21일 오후 강원도 강릉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남자 팀추월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뒤 시상대에서 '어사화 수호랑'을 들고 있다. ⓒ 이희훈


그리고 김민석은 기대대로 13일에 열린1500m 경기에서 네덜란드의 나위스(1분44초01)와 페트릭 로에스트(1분44초86)에 이어 동메달을 차지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은메달을 목에 건 로에스트와의 기록 차이는 불과 0.07초였다. 마침 이날 쇼트트랙 여자 500m에서 최민정이 석연치 않은 실격을 당한 상황이라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처음으로 나온 김민석의 메달은 국민들에게 많은 위로가 됐다.

김민석은 이승훈, 정재원과 짝을 이룬 남자 팀 추월에서도 당당히 은메달을 목에 걸며 이번 평창 올림픽 '멀티 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23일까지 한국 선수단에서 2개 이상의 메달을 차지한 선수는 남녀 쇼트트랙의 임효준과 최민정,그리고 김민석 밖에 없다. 이미 1500m에서 세계적인 선수 대열에 올라선 김민석은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1999년생의 어린 소년이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로 성장할지는 아무도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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