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거인들과 맞서리라"

뮤지컬 <시라노>의 대표곡 '거인을 데려와'의 가사 일부다. 곡 내용처럼 시라노는 평생 동안 조금의 불의도 용납하지 않았다. 귀족이 시인의 자유를 억압하면 100대 1로 맞서 싸웠고 연극을 욕되게 하는 배우가 있으면 쫓아내고 본인의 전재산으로 관객의 표 값을 대신 환불해줬다. 둥글게 좀 살라는 친구의 말에 "그렇게 살아도 괜찮겠냐"고 반문하는 게 시라노다.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에는 마음을 울리는 대사가 참 많다. 본인이 여자라 믿는 남자 몰리나는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로 아픔이 가득하지만 한없이 따뜻하고 단단한 인물이다. 몰리나는 반정부주의자 정치범 발렌틴과 함께 감옥에 갇혀있다. 발렌틴은 매일 예쁜 것만 생각하는 몰리나가 탐탁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의 신념을 이해해주고 아플 때 간호해주는 몰리나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발렌틴의 마음을 연 건 몰리나의 솔직하고 따뜻한 말들이었다.

시라노와 몰리나를 처음 만난 날 받았던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와 함께 꿈을 꿨고 공연을 곱씹으며 보낸 밤들이 수없이 많다. 그런데 시라노의 오케스트라를 담당한 음악감독과 몰리나 역을 맡은 배우가 성추행범이라면 평생 간직하려고 애썼던 내 기억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연극·뮤지컬계에서 확산 중인 미투 운동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에 출연한 배우 이명행 포스터.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에 출연한 배우 이명행 포스터. ⓒ 악어 컴퍼니


최근 국내 연극·뮤지컬계에서 '성추행 파문'이 일면서 미투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미투 운동(미투 캠페인)'은 '나도 그렇다'는 뜻의 'Me Too'에 해시태그를 달아(#MeToo) 자신이 겪었던 성범죄를 고백하며 그 심각성을 알리는 활동이다. 이에 응원하거나 지지하는 사람들은 '함께한다'는 의미로 with you에 해시태그를 붙이고 있다. 최근 유명 연극배우 이명행이 반복적으로 성추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후 각종 SNS와 커뮤니티를 통해 공연계 성범죄 피해사례가 쏟아지고 있다. 특히 연극계의 거장이라 불리던 전 연희단거리패 이윤택 감독의 성추행·성폭력 사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큰 파장이 일었으며 계속해서 배우, 유명 음악감독, 연출가, 대학교수 등이 지목되는 중이다.

한 연극·뮤지컬 커뮤니티를 통해 어떤 배우가 성범죄를 수차례 저질러 왔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이후 그 배우가 이명행이라는 폭로가 나왔다. 더불어 그가 특정 극장들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출연 및 출입 금지 당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당시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에 출연중이던 이명행은 중도 하차했고 사과문을 발표했다.

이윤택, "법적 책임 지겠다"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에서 열린 성추행 사실에 대한 사과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이윤택, "법적 책임 지겠다"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에서 열린 성추행 사실에 대한 사과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이정민


연극계의 거장으로 불리던 전 연희단거리패 감독 이윤택의 성추행·성폭력 폭로가 나온 뒤 추가 폭로가 계속 나와 그 파문은 일파만파 커지고 있다.

연극 연출가 김수희는 지난 14일 "10년 전 연극 '오구' 연출가였던 이윤택이 안마를 시켰고 성추행을 했다"는 글을 올렸다. 또 공연 리허설 도중 남자 배우 앞에서 여배우의 옷을 강제로 벗겼고 이에 항의하면 공연에서 제외 당했다는 다른 주장도 나왔다. 연극배우 김지현은 이윤택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해 낙태 했었다고 밝혀 큰 충격을 줬다. 연이은 폭로에 이윤택은 지난 19일 공개사과를 했지만 성폭행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했다.

사과 이후에도 이윤택에 대한 폭로가 쏟아지자, 문학교과서에 실린 그의 작품 '오구-죽음의 형식'을 빼달라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에 교육당국은 23일 '내년부터 삭제될 예정이며 이미 배포된 건에 대해서는 교육지침을 전달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22일 <서울신문> 보도에 따르면 문체부는 이윤택의 극단과 극장 등에 대한 지원금을 살피는 중이다.

"생리하지 마라"는 남자 음악감독 변희석

"내가 가끔 생리를 하는데 그 때 마다 매우 예민해진다. 그러니까 너는 생리하지 마라."
"교태부리지 마라."

지난 18일 한 커뮤니티에 변희석 음악감독을 성희롱 가해자로 지목하는 글이 올라왔다. 위 내용들은 변희석이 여단원에게 했다는 말들이다. 이외에도 지나다니는 남자배우들 상의로 손을 집어넣어 가슴을 만졌다거나 일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사람들 다 보는 자리에서 종이로 얼굴을 때렸다는 등 폭로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글이 올라온 다음날 변희석은 사과문을 올렸다.

청주대 교수로 재직했던 배우 조민기는 학생들로부터 성추행 당사자로 지목을 받고 대학에서 성추행 관련 징계를 받았다는 주장이 나오자 처음엔 "성추행으로인한 것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22일 보도된 청주대 회의록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26일 열린 이사회에서 조민기는 성추행 관련 중징계를 받은 사실이 드러났고 학생들의 추가 진술도 이어지고 있다. 이들 외에도 현재 성범죄 문제에 거론된 예술인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연극과 뮤지컬의 가장 큰 매력이자 단점은 '순간의 예술'이라는 점이다. 공연은 그 순간이 지나면 오로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래서 관객들은 공연의 순간순간을 온전히 즐기고 그 기억과 여운을 평생 간직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지금 관객들은 저 마다 간직한 소중한 기억들에 큰 상처를 입었다. 펑펑 울며 위로받았던 극,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쳤던 커튼콜들에 대한 기억을 지울 수도 안 지울 수도 없게 돼버렸다. 어제 느낀 감동이 오늘은 분노가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피해 글들을 찾아보기도 하고, 화를 참지 못하고 예매해둔 극을 모조리 취소하는 관객도 많다. 가장 아끼는 대본집을 찢어버리는 관객들의 마음을 이명행, 이윤택은 알까.

 '연극뮤지컬관객 #WithYou 집회' 포스터

'연극뮤지컬관객 #WithYou 집회' 포스터 ⓒ 공연계#ME_TOO 트위터


이제 관객들은 공연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나서기로 했다. 오는 25일 서울 대학교 마로니에 공원 앞에서는 관객들이 주최하는 집회가 열린다. 이번 집회의 목적은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미투 응원과 지지, 가해자 비판과 처벌 촉구, 피해자 보호 및 재발 방지 대책 수립 요구 등이다.

이날 집회는 오후 3시부터 7시까지 마로니에 공원 앞 횡단보도부터 방송통신대 골목길 앞 인도에서 열리며 집회 취지 소개, 피켓 시위 및 구호 제창, 자유 발언 등을 진행한다. 이날 행사를 위해 일반 관객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SNS를 통해 스태프들을 모집했다. 후원 계좌를 통해 받은 많은 관객들의 지지에 힘입어 집회신고까지 무사히 마쳤다. 현재는 집회만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며 6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꿈을 찾아왔을 뿐인데

관객과 배우는 극 속에서 함께 꿈을 꾸고 각자의 새로운 꿈도 찾는다. 사랑, 행복, 성공, 우정 등 꿈의 모습은 다양하다. 그런데 이번 피해자들의 공통점이 슬프게도 꿈을 향해 누구보다 열심히 달려가던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배우가 되고 싶어 연기 전공을 택한 학생들, 공연이 좋아 제작사 일을 시작한 사람들, 작품 활동을 하고 싶은 배우들. 가해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막내 스태프, 학생, 여자 등에게 그런 일을 저질렀다. 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남의 꿈을 방해하는 것인가. 그들이 무대에서 보여줬던 모습과 그들이 건넨 위로에 흘렸던 눈물이 아깝다.

성범죄는 연극·뮤지컬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문제다. 옷을 벗기려는 이윤택에 항의하자 배역을 빼앗겼고 극단을 나온 뒤에는 오히려 정신병자라는 소문에 시달렸다는 한 피해자의 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성범죄 피해자들의 고발은 쉽지 않다. 성범죄 피해를 입었어도 회사 때문에, 극단 때문에, 공연 때문에, 생계 때문에 침묵했던 수많은 피해자들이 있을 것이다.

용기를 내 고백했더라도 가해자들은 사과 한 번하고 말 뿐이다. 오히려 사과문에 "피해자에게 연락을 취하는 중"이라는 문구를 당당하게 쓸 만큼 그들의 권력은 무섭다. 대부분의 성범죄는 본인보다 지위나 힘이 약한 대상에게 향한다. 그래서 이번 사태에서 공연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자들이 권력을 휘둘러 일을 저질렀고 공연에 꿈을 품은 사람들이 피해자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꿈을 꾼다는 이유로 부당한 일을 겪고 있다. 분명 부당한 일임에도 그냥 넘기자, 참자라는 주변의 분위기와 고발한 뒤 벌어질 일에 대한 공포로 인해 피해자들이 침묵하지 않도록 사회가 그들을 무서운 권력으로부터 지켜야 한다. 미투 운동을 계기로 진실한 고발이 당연한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분노와 허무함으로 가득한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글을 쓰는 것뿐이다. 하루 빨리 공연을 그 자체로 온전히 즐기게 되기를 소망한다. 용기를 내고 있는 피해자 분들, 스스로 공연을 지키려는 관객 모든 분들을 응원합니다. #MeeToo #with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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