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장 떠나는 노선영, 김보름, 박지우 노선영, 김보름, 박지우 선수가 21일 오후 강원도 강릉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팀추월 순위결정전을 마친 뒤 경기장을 떠나고 있다.

▲ 경기장 떠나는 노선영, 김보름, 박지우 노선영, 김보름, 박지우 선수가 21일 오후 강원도 강릉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팀추월 순위결정전을 마친 뒤 경기장을 떠나고 있다. ⓒ 이희훈


논란의 레이스는 마감했지만 진실은 아직도 베일 속에 남아있다. 대한민국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팀추월 대표팀이 우여곡절 끝에 모든 일정을 마감했다. 김보름(강원도청), 박지우(한국체대), 노선영(콜핑팀)이 호흡을 맞춘 여자 팀추월 대표팀은 21일 강릉 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7-8위 결정전에서 3분07초30의 기록으로 함께 레이스를 펼친 폴란드(3분03초11)에 뒤지며 최하위인 8위로 대회를 마쳤다.

여자대표팀은 지난 19일 준준결승 경기에서 마지막 주자의 기록을 측정하는 규정에도 불구하고 뒤처진 동료를 방치하고 두 선수만 따로 질주하는 모습으로 논란의 중심에 선 바 있다. 여기에 경기 후에도 선수들끼리 떨어져서 서로를 외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가 하면, 김보름과 박지우가 인터뷰에서 미소를 보이거나 부진의 책임을 노선영에게 전가하는 듯한 발언을 하면서 더 큰 논란이 됐다. 지켜보던 팬들의 실망과 당혹감은 한순간에 분노로 변했다.

빙상연맹은 사태가 심각해지자 20일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해명에 나섰으나 도리어 의혹만 더 증폭시킨 꼴이 되고 말았다. 백철기 대표팀 감독과 김보름만이 기자회견에 참석했지만 정작 이 사태의 중심에 있는 노선영은 건강상의 이유로 불참하며 '반쪽짜리 해명'이 됐다. 백 감독과 김보름은 당시 경기 전략 자체가 '노선영의 의사를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기자회견에 불참해던 노선영이 이후 SBS와의 단독 인터뷰를 통하여 다시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진실게임 양상으로 전락해버렸다.

노선영은 "먼저 뒤로 가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전날까지 김보름과 박지우 사이에 2번으로 들어가는 것이 원래 작전이었다"고 주장했다. 팀 분위기에 대해서도 "선수들과 경기 전후에 대화한 적이 없다. 훈련도 따로 했다. 분위기가 안 좋았다"고 폭로하며 백 감독의 주장과는 완전히 상반된 주장을 내놓았다. 이에 백 감독은 "당시 노선영이 맨 뒤로 빠지겠다고 한 것을 나만 들은 게 아니다. 기자회견까지 열어 거짓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재반박했다. 진흙탕 싸움이 계속되면서, 빙상연맹의 의도와는 달리 팀 내 불화와 불신이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준 셈이 됐다.

마침내 세 선수가 함께 결승선 통과했지만, 여론은...

기자회견장 앉은 김보름-백철기 감독 2018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팀 추월 경기에서 팀워크 논란이 제기받은 한국 김보름 선수와 백철기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 감독이 20일 오후 강원 강릉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 마련된 기자회견장에서 의혹에 대해 해명하고 있다.

▲ 기자회견장 앉은 김보름-백철기 감독 2018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팀 추월 경기에서 팀워크 논란이 제기받은 한국 김보름 선수와 백철기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 감독이 20일 오후 강원 강릉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 마련된 기자회견장에서 의혹에 대해 해명하고 있다. ⓒ 연합뉴스


팀워크가 완전히 망가진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황에서 '과연 순위결정전을 정상적으로 치를 수 있을까' 하는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다. 최악의 경우 기권까지도 예상됐지만 다행히 세 선수는 다시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냈고 함께 호흡을 맞춰 마지막 경기를 끝까지 소화했다.

지난 경기와 달리 이번에는 경기 내내 서로 협력하는 플레이를 선보였다. 비록 경기는 패했지만 결승점까지 함께 들어오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미 유종의 미가 되기에는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곱지 않은 여론을 의식한 듯 세 선수의 표정은 내내 무거웠다. 경기 후에도 세 선수는 모두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한 채 조용히 경기장을 떠났다.

이 사건은 이미 외신에서도 주목받는 핫이슈로 떠올랐다. 미국 'USA투데이'와 영국 'BBC' 등에서 이 사건을 집중보도하며 '왕따 논란이 동계올림픽과 한국팀을 강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엘리트 스포츠에서 약자를 괴롭히는 모습은 이번 올림픽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장면"이라고 쓴 소리를 날리기도 했다. 사실상 이번 팀추월 참사는 평창올림픽에서 개최국으로서 보인 모습 중 가장 씁쓸한 스캔들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팬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이미 김보름은 지난 19일 이후 쏟아지는 팬들의 비난을 견디다 못해 자신의 SNS 계정을 비공개로 전환했고 기자회견에서는 눈물까지 흘리기도 했다. 청와대 공식홈페이지에는 '김보름과 박지우의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하고 빙상연맹을 처벌하라'는 국민청원이 올라왔고 참여자가 수십만 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이번 사태에 대한 국민적 실망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심지어 세 선수가 마지막 순위결정전을 끝까지 소화한 장면에 대해서도 '억지 봉합을 위한 보여주기식 쇼'에 불과한 게 아니냐는 비난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근본적으로 이번 사태는 단순히 특정 선수들이나 감독 간 불화 문제를 넘어 한국 빙상계의 구조적인 난맥상이 고스란히 드러난 단면이라는 평가다. 많은 팬들은 노선영이 빙상계 적폐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특히 노선영은 이미 지난 1월 빙상연맹의 행정 미숙으로 하마터면 억울하게 출전 기회를 잃을 뻔했던 해프닝을 겪은 바 있다. 이 과정에서 노선영은 빙상연맹의 무능함과 파벌 논란을 폭로하며 강도 높은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나마 러시아 선수 2명의 출전이 불발되면서 예비 순위였던 노선영이 출전권을 승계하며 다행히 월드컵 막차티켓을 따낼 수 있었다. 하지만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을 뿐 여전히 앙금은 남은 상태였다. 결국 이번 '팀추월 참사'를 통하여 그동안 근본적인 해결을 외면해왔던 문제들이 끝내 폭발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평가도 나온다. 심지어 출전권 박탈 해프닝에서 이번 팀추월 경기 논란에 이르기까지 '혹시 노선영이 처음부터 조직적으로 왕따를 당한 게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나오는 상황에 이르렀다.

성적지상주의와 기득권 파벌간의 힘겨루기로 얼룩진 한국 빙상계의 부패는 하루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같은 대표팀 내에서도 학벌과 인맥에 따라 연습조건을 차별화하는가 하면, 반대파나 소수파에 노골적으로 불이익을 안겨주는 관행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된 지 오래다. 이러한 빙상계의 적폐를 견디지 못하여 외국으로 귀화한 선수도 있었고, 올림픽을 코앞에 두고 선수가 코치에게 폭행을 당했는데도 연맹이 이를 은폐하려다가 탄로난 사건도 있었다.

과거에는 한국 빙상이 세계무대에서 좋은 성과를 거둘 때마다 부득이한 해프닝이나 '필요악' 정도로 무마된 면도 있었지만, 시대는 달라졌고 오늘날의 대중은 더 이상 '국제대회 성적=국위선양'이라는 획일화된 가치관에 공감하는 세대가 아니다. 과정의 공정함과 투명함, 대중이 공감할 명분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그만'이라는 식의 합리화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노선영에서 아이스하키 단일팀 논란에 이르기까지 대중이 공통적으로 분노한 지점도, 바로 '기득권을 쥔 강자들만의 논리에 따라, 소수의 당연한 권리와 자유가 침해받고 박탈당하는 상황'이었다.

재발 막으려면 진실 분명하게 밝히고 치유하는 과정 있어야

서로서로 밀어주는 여자 팀추월 선수들 노선영, 김보름, 박지우 선수가 21일 오후 강원도 강릉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팀추월 순위결정전에서 역주하고 있다.

▲ 서로서로 밀어주는 여자 팀추월 선수들 노선영, 김보름, 박지우 선수가 21일 오후 강원도 강릉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팀추월 순위결정전에서 역주하고 있다. ⓒ 이희훈


레이스는 마감했어도 문제는 아직 말끔하게 풀리지 않았다. 팀추월 논란은 더 이상 일회적인 해프닝으로 보고 무마하기에는 사태가 너무 커졌다. 그리고 팬들은 빙상계나 체육계가 이 사태를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과연 있는가에 강한 불신을 품고 있다. 그동안 빙상연맹이나 대한체육회가 보여준 행태를 보면 대중들이 원하는 수준의 자성이나 개혁과는 항상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국민청원에 팬들의 목소리가 몰리고 있는 것도 체육계가 얼마나 국민의 불신을 받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공론화' 자체에 더 의미가 있다. 실제로 청와대나 정치권력이 반드시 이 사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기대감보다는, 국민들이 이 사태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스포츠와 국가대표를 성원하는 국민들은 당연히 변화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다만 김보름이나 박지우 같은 특정 선수를 향한 분풀이에만 지나치게 초점이 맞춰져서는 곤란하다. 대중이 원하는대로 몇몇 선수만을 '악의 축'으로 삼아 국가대표에서 쫓아내자는 것은 이번 사태의 근본적인 해결과는 거리가 멀다. 대표팀에 오랜 세월 이러한 잘못된 관행과 악습이 만연하게 된 구조적인 뿌리를 찾아내지 않고 곁가지만 쳐내는 꼴이 될 수도 있다.

노선영의 분명한 입장 표명 역시 아쉽다. 이번 사태의 핵심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노선영은 지난 두 번의 경기 후 인터뷰와 기자회견에 이르기까지 공식석상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힐 수 있었던 기회에 한 번도 응하지 않으며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하지만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는 백 감독과 김보름의 발언만 콕집어 반박하는 듯한 발언으로 혼란을 자아냈다. 이렇게 서로 한두 마디씩 감정적인 폭로전을 주고받는 식의 모양새가 반복되는 것은 본인에게나 대표팀을 위해서나 좋지 않다. 만약 경기출전이나 기자회견 참여 등을 놓고 부당한 '외압'이 있었다면 그 역시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진실을 전하는 것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어느 쪽이 진실을 전하느냐에 따라 누군가는 심각한 도덕적-사회적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사건이 됐다. 더 이상 대한민국 국가대표에서, 그리고 올림픽에서 이렇게 낯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사건이 재발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번 사태의 진실을 확실히 가려내고 치유하는 과정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혼자 몸 푸는 노선영 스피드스케이팅 팀추월 경기 논란의 중심에 있는 노선영 선수가 21일 오후 6시께 결승D(7, 8위전) 경기를 앞두고 경기장(강릉 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홀로 몸을 풀고 있다. 경기는 오후 8시 54분 진행될 예정이다.

▲ 혼자 몸 푸는 노선영 스피드스케이팅 팀추월 경기 논란의 중심에 있는 노선영 선수가 21일 오후 6시께 결승D(7, 8위전) 경기를 앞두고 경기장(강릉 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홀로 몸을 풀고 있다. 경기는 오후 8시 54분 진행될 예정이다. ⓒ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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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올림픽 팀추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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