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토요드라마 <돈꽃>.

MBC 토요드라마 <돈꽃> 포스터. ⓒ MBC


흔한 말로 '드라마는 작가놀음, 영화는 감독놀음'이라고 한다. 짧게는 16부작, 길게는 50부작 긴 호흡으로 이야기를 채워야 하는 드라마 장르 특성상, 작가의 필력이 드라마 전개와 완성도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재미있는 드라마를 보고 나면 이야기를 만든 작가가 궁금해지곤 한다.

하지만 <돈꽃>은 감독이 궁금해지는 드라마였다. 복수, 출생의 비밀, 불륜에 살인까지. 흔한 막장 드라마 소재로 묵직한 메시지를 완성해 낸 이명희 작가의 필력은 물론 대단했다. 하지만 화려하고 유려한 영상미와 섬세하면서도 늘어지지 않는 연출로 극의 완성도를 끌어올린 건 분명 연출의 힘이었다. 더군다나 <돈꽃> 김희원 PD는 이 드라마로 메인 연출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린 '입봉' 감독이었다.  

지난 14일, 서울 상암동 MBC 사옥에서 만난 <돈꽃> 김희원 PD는 감탄을 쏟아내는 기자에게 "전부 촬영감독님 덕분"이라며 그 공을 돌렸다.

"황상만 촬영감독님과는 제가 B팀 연출일 때부터 함께해서 이번이 네 번째 작품이었어요. 일단 실력도 출중하시지만, 그림에 대한 욕심도 많으셨죠. 촬영이라는 게 테크닉을 요하는 작업이긴 하지만, 촬영하는 사람이 어떤 감수성을 가졌느냐, 배우·연출자와 얼마나 감정을 공유하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많이 달라지거든요. 현장에서 이야기를 그리 많이 나누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저와 같은 감정을 공유하다보니 아주 잘 맞았죠. 

사실 좋은 테크니션(기술자)은 연출이 연출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분들이거든요. 황상만 감독님은 연출이 놓치는 부분을 캐치해주고, 배우가 감정이 필요할 땐 충분히 기다려주셨어요. 좋은 분들을 만난 덕에 잘 마칠 수 있었어요."

드라마 문법 깬 <돈꽃>, 이렇게 달랐다

 MBC 토요드라마 <돈꽃> 김희원 PD 제공 사진.

MBC <돈꽃> 김희원 PD와 장부천 역의 배우 장승조. ⓒ MBC


<돈꽃>은 기존 드라마와는 템포와 문법도 달랐다. 이명희 작가가 만든 세속적 욕망으로 가득찬 <돈꽃>의 세계는 김희원 PD의 색다른 템포와 문법을 만나 우아하고 압도적인 분위기로 완성됐다. 무게와 품격을 더한 이야기 속에서 품위와 고상함으로 무장한 캐릭터들의 속물근성은 더 돋보였다. 그만큼 이들의 선민의식이 더 우습게 그려졌음은 물론이다.

- 구도나 템포가 기존 드라마와 달랐다. 어떤 의도를 담은 연출이었나. 
"<돈꽃>은 결국 계층의 사다리, 권력의 사다리를 올라가기 위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처음부터 수직 구도를 많이 쓰고 싶었다. 특히 4부까지 보면 필주(장혁 분)를 높은 데 올려두고 찍은 장면이 많은데,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은 욕망을 담기 위해서였다."

- 인물들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표현할 때 타이트샷이 자주 사용되더라. 
"인물의 감정은 결국 배우의 얼굴을 통해 전달된다. 하지만 이런 컷은 시청자들이 배우 얼굴을 즐기지 않으면 쓸 수 없는데, 배우들의 눈빛을 믿고 과감하게 사용했다. 무엇보다 요즘은 편집법이 빨라져서 한 컷이 1초도 되지 않을 때가 많은데, 우린 50초~1분까지 한 컷으로 담았다. 이건 배우들의 연기력을 믿은 거다. 웬만한 배우들은 이 정도 바스트샷을 견디지 못한다."

- 보통 주말드라마는 호흡이 굉장히 빠르지 않나. <돈꽃>은 일반 미니시리즈라고 해도 템포가 느린 편이다. 이에 대한 걱정은 없었나. 
"1~2부 가편집했을 때 난리가 났다. 선배들이 컷이 길다, 배우 걷는 장면을 왜 그렇게 오려 보여 주냐, 루즈하다, 어렵다, 어쩌려고 그러냐... 이 시간대가 가지는 룰이라는 게 있고, 여기에 기대 시청률 역시 따라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했다. 사실 모험을 과하게 한 면도 있었다. (웃음) 하지만 내가 대본을 보고 느낀 감정 그대로 찍은 장면은 1부 엔딩 밖에 없다. 부천(장승조 분)과 모현(박세영 분)이 새를 구하기 위해 물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장면인데, 대본을 보면서 이 시간이 굉장히 느리게 느껴졌다. 이 젊은이들이 새를 구하러 흙탕물에 들어가면서 인생이 망가지게 되지 않나. 이 슬픈 시간을 빠르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대신 끝날 때는 팍 끝냈지."

- 느린 속도로 극에 있는 대로 몰입하게 만들더니 엔딩을 확 내버리니까 정신이 번쩍 들더라. '돈꽃'이라는 제목에 대한 임팩트도 커지고.  
"전부터 엔딩을 그렇게 내고 싶었다. 보통 드라마 엔딩은 배우들 바스트 잡고 스틸 보여주고 엔딩 크레잇이 한참 올라간다. 모든 감독들이 엔딩 커트는 굉장히 심혈을 기울여 찍는데, 감정이 한참 모일 때 문을 탁 닫아버리면 더 애절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을까 싶었다."

- 음악의 힘도 컸던 것 같다.  
"내가 한스 짐머를 모셨다.(웃음) 주말드라마는 OST를 따로 제작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 드라마는 OST가 필요한 장면이 좀 있을 것 같았다. 초반엔 무겁고 짙은 내용이 많았고, 사건·사고가 워낙 빠르게 흘러가기 때문에 인물의 감정을 음악으로 전달해야 했다. 박세준 감독님이 워낙 실력 있고 훌륭한 분이라 믿을 수 있었다. 기존 드라마와 차이가 있었다면, 음악이 시작하고 끝나는 포인트가 달랐다. 장면이 시작되는 부분이 아니라 감정이 시작하는 포인트에서 음악을 시작하고, 감정이 끝나는 포인트에서 음악도 끝냈다. 시청자들이 알게 모르게 분절된 여러 장면을 하나의 시퀀스로 연결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미숙·이순재, 괜히 톱배우 아니더라" 

 MBC 토요드라마 <돈꽃>.

이명희 작가는 <돈꽃> 구상 단계부터 정말란 역에 이미숙을 떠올렸다. 대체할 수 없는 캐스팅이었다. ⓒ MBC


- 초반 설정과 달라진 부분도 좀 있는 것 같다. 처음 드라마 설정에는 모현이와 부천이 사이에 아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사라졌더라. 
"<돈꽃>은 작가님이 초고를 쓴 지 5년이 된 작품이다. 5년 동안 작가님이 구축한 세계가 탄탄하고 확고해졌고, 그만큼 이야기도 달라졌다. 작가님이 처음 만든 이야기에는 모현이가 낳은 아들이 있었고, 그 아이 이름이 하정이었다. 지금 하정이의 이름은 원래 하윤이었고. 몸이 약한 하정이는 중간에 죽는다는 설정이었는데, 나도 작가님도 두 지점에서 고민했다. 첫 번째로는 작품을 위해 기능적으로 죽음을 맞이할 아이 캐릭터가 마음에 걸렸다. 또, 아이라는 존재가 얹어지면 멜로 여주로서 어려움이 많다. 만약 이 드라마가 50부작으로 기획됐더라면 이런 설정이 여주의 서사에 비극을 얹어줄 수도 있었겠지만, 24부작이 되면서 어려워졌다. 제대로 다뤄줄 수도 없는데 일찍 죽어야만 하는 아이 캐릭터, 그 비극을 안은 채로 멜로를 해야하는 여자 주인공. 그래서 과감하게 뺐다."

- 사실 <돈꽃>의 캐릭터들은 너무 극단적이다. 욕망을 위해서는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분명히 욕먹을 행동을 하는데, 어쩐지 자꾸 불쌍한 마음이 들더라. 
"배우가 설득력을 가지지 않으면 분명 비호감으로 전락할 수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캐릭터가 정말란인데, 이미숙 선배님께도 말씀드렸지만 이건 대체할 수 없는 캐스팅이었다. 작가님이 처음 이 작품을 구상하실 때부터 정말란은 이미숙 선배님이었다. 정말란은 지독할 정도의 욕망을 가진 캐릭터다. 이 욕망이 추해보이지 않으려면 배우가 아름다워야 했다. 어떻게 찍든 너무나 아름다운 분이었고, 연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캐릭터에 대한 이해와 준비가 어마어마하셨는데, 가장 놀라웠던 건 드라마를 해석하는 시선이 너무 세련되고 젊으시다는 거다. 극 중 부천이가 마음에 안 드는 짓을 해서 말란이 부천이를 때리는 신이 있었는데, 대본에는 따귀를 때린다고 되어있었다. 그런데 미숙 선배님이 '아니야 머리끄댕이 잡는 게 나을 것 같아' 하시더라."

- 그 장면 말란과 부천 캐릭터가 잘 드러나는 장면이라 좋아한다. 정말 아들이 너무 밉고 짜증나는데 어떻게 하지를 못하는 엄마 같았다. 
"맞다. 캐릭터에 그런 유니크한 아이덴티티를 심어주시더라. 오히려 어린 내가 클리셰에 젖어있고, 선배님은 더 과감하고 유연하게 해석하시더라. 장면마다 그런 것들이 녹아있었다. 괜히 톱배우가 아니더라."

돋보인 케미스트리, 배우들 기량으로 완성됐다

 MBC 토요드라마 <돈꽃>.

모든 캐릭터들의 케미가 남달랐던 드라마 <돈꽃>. 모든 케미가 돋보였지만, 김희원 PD가 가장 놀란 건 장혁과 이순재였다. ⓒ MBC


- 이 드라마는 모든 캐릭터들의 케미가 남다르더라. 필주-말란도 그렇고, 필주와 장국환(이순재 분), 말란-부천... 모든 관계가 서로 다른 팽팽한 긴장감을 갖고 있었다.  
"필주와 말란은 드라마 기획 단계부터 작가님이 가장 많이 공들이고 집중하신 관계였다. 또, 필주와 부천이는 이 드라마 스토리의 뿌리를 담당하는 관계라서 아주 중요했다. 부천과 말란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필주와 장국환은 그야말로 연기자들이 부딪치면서 나온 자연스러운 케미스트리였다.

특히 이순재 선생님은 놀라울 정도였다. 보통 중요한 대사가 열 마디 있다면 많은 배우들이 그 열 마디를 다 힘주어 한다. 하지만 선생님은 여덟 마디는 흘리고 두 마디에 집중하시더라. 완급조절이 기가 막혔다. 사실 필주와 장국환의 장면은 앉아서 긴 대사하는 장면이 많아서 미쟝센이고 뭐고 연출이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 오로지 배우들의 호흡만으로 긴장감이 완성됐다. 두 배우의 연기를 보며 기쁘고 감사한 순간도 많았다. 장국환이라는 캐릭터도 어마어마하게 나쁘고 독한 캐릭터이지 않나. 그런데 이순재라는 배우가 가진 신뢰감 덕분에 보기 싫지 않게 상쇄될 수 있었다."

- 가장 화제가 된 건 역시 필주와 부천의 브로맨스였다. 앞서 장혁, 장승조와 인터뷰 했는데, 장혁은 필주와 부천의 브로맨스가 필주의 감정선을 해친다고 생각해 하기 싫었다고 하고, 장승조는 어느 정도 의도한 부분도 있었다고 하더라. 
"두 사람이 연기한 캐릭터 차이 때문이 아닐까? 장혁씨는 '브로맨스'라는 단어와 필주-부천의 관계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둘 사이의 감정은 엄밀히 말하면 애증이니까. 복수의 대상의 아들이었다가, 우정이었다가, 정들었다가 미웠다가... 오랜 기간 여러 감정이 쌓인 복합적인 마음이다. 하지만 부천이는 필주가 장은천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그냥 순수한 감정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열등감도 있었겠지만, 부천이에게 필주는 경쟁의 대상이 아니었으니까."

- 연출자로서는 어땠나. 둘 사이의 케미스트리를 의도했나.  
"앞서 말했지만, 필주와 부천의 관계는 <돈꽃>의 시작과 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중요했다. 두 사람이 처음 함께 찍은 신이 국밥집에서 국밥 먹는 장면이었다. 부천이는 혼자 떠들고, 필주는 느긋이 부천이의 이야기를 듣는 장면인데 둘의 분위기가 너무 다르더라. 장승조가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데 장혁은 살풀이를 하는 느낌이랄까? 처음엔 다들 큰일났다고 했다. 둘이 함께 붙는 장면이 많은데 분위기가 너무 따로 노니까. 근데 보다보니 신기하게 점점 호흡이 맞춰지더라. 둘 다 자기만의 춤을 추는 사람이 아니더라. 서로 의지하고 끌어주면서 자연스럽게 케미도 쌓였다. 만약 작위적으로 만들었다면 두 캐릭터가 모두 손상됐을 거다." 

- 사실 <돈꽃>은 모든 캐릭터가 각자의 욕망과 무게를 지니고 있다. 그만큼 배우 연기력에 기대야 하는 부분도 컸을 것 같은데. 이순재, 이미숙, 장혁이야 이미 검증된 배우들이지만, 장승조의 존재감도 대단하더라. 
"승조씨한테도 이야기했지만, 부천이 캐릭터는 굉장히 어려운 역할이다. 부천이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거기다 함께 호흡을 맞춰야 하는 선배들이 정말 어려운 분들이지 않나. 주눅 들기 딱 좋은 조합이었다. 분명 위축될 수 있는 환경이라 걱정 했는데, 결과적으론 모든 관계 속에서 각자의 케미스트리를 만들어내더라. 이건 장승조라는 배우, 그 사람이 가진 매력에서 나온 거였다."

- 결국 이 모든 관계의 중심에 있는 건 강필주다. 
"이 드라마는 강필주가 뿌리고, 줄기고, 열매인 드라마다. 냉정하게 보자면 필주의 원맨 히스토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강필주라는 한 사람의 아주 드라마틱한 단면을 시청자가 함께 경험하는 셈이니까.

작가님이 이 드라마의 모든 잔치는 필주가 말란이에게 내가 장은천이라고 고백하는 순간 끝나는 거라고 하시더라. 폭죽은 그때 다 터졌다. 그 다음 이야기는 작가님이 구축한 세계 안에서 캐릭터들이 행동했다. 부천이와 말란이가 한번쯤 반격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었던 분들도 계실 거다. 그런데 부천이와 말란이는 필주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강필주는 아버지고, 남편이고, 모든 것이다. 말란이에게 필주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모든 것을 의지한 사람이었고."

- <돈꽃> 연출도 화려한 효과나 편집으로 이목을 끌기보다, 배우들 연기에 집중할 수 있어 좋았다. 대사 톤도 조곤조곤하고. 
"처음 대본 리딩을 하는데, 이미숙 선배님이랑 장혁씨가 대사를 작게 읽으시더라. 처음엔 '첫 리딩이라 워밍업 하시나?' 싶었는데, 들을 수록 너무 좋은 거다. 그래서 그 톤에 맞춰 연출톤도 바꿨다. 특히 이미숙 선배님은 침묵이 갖는 힘, 조용한 대사가 가진 무게를 잘 아는 분이시더라. 목소리 톤은 차갑고 냉정하지만 연기는 아주 뜨거웠다.

사실 나도, 작가님도 굉장히 시니컬하고 냉정하다. 세상을 보는 시선이 낙관적이지 않다. 작가님은 인물 중 누구도 동정하거나 억지로 구원하지 않았다. 필요이상으로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았고. 인간에 대한 시선이 그런 분이시다. 그 여백을 채워준 건 배우들의 연기였다. 배우들은 아주 뜨거웠다. 냉정하고 차가운 대본이, 뜨겁게 생각하고 뜨겁게 연기하는 배우들을 만나자 아주 기분 좋은 온도가 완성됐다."

주말드라마 문법 깬 <돈꽃>, 그 성공의 의미

 MBC 토요드라마 <돈꽃> 김희원 PD 제공 사진.

MBC 토요드라마 <돈꽃> 김희원 PD 제공 사진. ⓒ MBC


- <돈꽃>의 의미는 주말드라마의 문법을 깨고도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게 아닐까. 만약 <돈꽃>이 실패했다면, 한동안 기존 편성 전략이나 드라마 문법이 공고해졌을 테니 말이다. 
"사실 예전엔 주말드라마 시간대에 이런 편견이 없었다. <하얀거탑> <내 생에 마지막 스캔들>이 모두 이 시간대에 방송됐다. 최근에도 <마마> <결혼계약> 같은 좋은 콘텐츠가 많이 방송된 시간대인데, 언제부턴가 시청자에게 선입견을 심어줬다.

물론 이 시간대 타깃 시청층이 높다. 그래서 이 분들이 쉽고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드라마를 많이 내보냈는데, 사실 이 분들이 가장 드라마를 많이 보고 즐길 분들이다. 웬만한 드라마 문법에는 통달해 있다고 봐야 한다. 우리보다 드라마를 더 많이 본 분들이다. 그만큼 더 어렵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그래도 이미 박힌 선입견을 부수기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처음에 아역부터 시작하는 버전도 고려했었다. 나도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다. 아무래도 시청자 유입도 쉽고, 그랬으면 초반 시청률도 더 높았을 거다. 근데 난 그게 싫더라. 그런데 아역없이 바로 이야기가 시작되니, 상대적으로 초반 서사 따라가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감정도 잘 안 붙더라. 내가 너무 자만했나보다 걱정했다. 3~4회까지 캐릭터에 감정이 안 붙으면 시청자가 드라마를 즐길 수 없으니까."

- 결과적으로는 흥행과 작품성 모두 잡았다. 장혁은 '망할 각오하고 출연했다' 하더라. 
"입봉작이니 모두가 불안해했다. 다들 장혁이라는 톱배우가 입봉 PD가 연출하는 주말드라마에 왜 출연하나 싶었을 거다. 나부터도 그랬고. 그런데 리딩하는 날 장혁씨가 '우리 망할 거 즐겁게 망해요' 하더라. 망하면 어떠냐고, 걱정하지 말라고. 이거 입봉하는 연출들에겐 정말 눈물 나는 이야기다. 드라마 끝나는 날까지 그 힘으로 버텼다. 연출자는 배우의 신뢰와 용기를 믿고 가는 건데, 대한민국 배우 중 연출에게 이렇게까지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몇 이나 될까. 정말 멋있는 사람이다." 

 MBC 토요드라마 <돈꽃> 김희원 PD 제공 사진.

김희원 PD 입봉 배경에는 장혁의 추천이 있었다. 장혁은 <운명처럼 널 사랑해> B팀 연출로 처음 만난 인연으로 김 PD의 단막극 연출작 <오래된 안녕>에도 출연했다. ⓒ MBC


- 장혁이 처음 김희원 PD를 추천한 건 <돈꽃> B팀 연출이었는데, 결국 이 드라마가 김 PD의 입봉작이 됐다. 갑작스럽게 입봉이 결정돼 장혁이 처음엔 굉장히 미안했다더라. 
"만약 장혁이 없었다면 못한다고 했을 거다. 그런데 내 편이 있으니까. 주인공이 내 편이라는 건 연출에게 굉장한 힘이다. 그만큼 책임감도 생겼다. 이 분 커리어에 후회하는 일이 생기면 안 되니까. 시청자분들이 보시기엔 어땠을지 모르지만, 내 나름대로는 장혁씨 커리어에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강했다."

- 김희원 PD에게 장혁은 어떤 배우인가. 
"제작발표회 때도 말했지만, 장혁은 최고의 파트너다. 아마 장혁과 함께 작업한 감독들은 모두 그렇게 이야기할 거다. 작가님 표현을 빌리자면 벽을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끝끝내 그 벽을 뚫을 것 같은 배우다. 남들은 하지도 않을, 무모할 정도의 우직함. 그게 사람을 감동시킨다. 작품 해석도 굉장히 스마트하고, 내공도 대단하다. 이런 분이 연출자인 나를 믿어준다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무엇보다 가장 큰 매력은 잘생겼다는 거고.(웃음)

삶의 태도도 멋지다. 멋짐을 의도하거나 노리며 연기하지 않는다. 다른 배우였다면 승조씨 캐릭터와 경쟁하려 했을 수도 있다. 내가 주인공인데 얘가 더 돋보이니까. 그런데 장혁씨는 아주 정확한 사람이다. 장승조를 위한 장면이라고 판단하면 자신을 철저하게 누른다. 편법을 쓰지 않는다. 그런 부분이 승조씨에게도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거다. 장승조는 순발력이 아주 강한 배우라서, 장혁과의 호흡을 통해 점점 더 발전했다. 그래서 캐릭터도 더 잘 살았고."

못다 한 이야기들

 MBC 토요드라마 <돈꽃> 김희원 PD 제공 사진.

MBC 토요드라마 <돈꽃> 김희원 PD 제공 사진. ⓒ MBC


- 이 드라마에 나오는 온갖 나쁜 캐릭터 중, 제일 나쁜 건 장수만이 아닐까? 
"맞다. 결혼을 했으면 책임을 지든, 끝까지 결혼을 거부하든 했어야 하는데. 결국 모든 악의 씨앗은 장수만이다.

극 중에 부천이가 장국환 회장에게 하정이를 보여주려다가 쫓겨나는 장면이 있다. 이때 미스한(이항나 분)이 '이렇게 가면 나쁜 기억만 남아 안 된다'면서 사탕을 주는 장면이 있다. 작가님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라고 하시더라. 한씨 같은 어른들이라도 있으면 아이들이 웃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쓰셨다고. 결국 <돈꽃>은 나쁘게 산 어른들 때문에 아이들이 이렇게 자랐다는 이야기다. 드라마에서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장수만이나 장국환 같은 어른들 때문에 순수한 영혼들이 상처 받고 엇나간 이야기이기도 하다."

- <돈꽃>이라는 제목의 진짜 뜻이 뭘까? 처음엔 당연히 'Money Flower'라고 생각했는데, 막판에 정말란이 정신을 놓은 걸 보니 돈꽃의 '꽃'은 결국 정말란이고, 정말란이 미쳐버린다는 걸 암시한 'Crazy Flower' 아니었나 싶더라. 
"하하하. Money Flower가 맞다. 작가님이 기획 단계 때부터 생각해두신 제목이었는데, 속물적인 '돈'이라는 단어와, 추상적인 아름다움이 담긴 '꽃'이라는 단어의 조합이 마음에 들더라. 촌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 생경함에서 오는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 연출자로서 아쉬웠던 부분도 있었을 것 같다. 
"겸손 떨려는 게 아니라, 다시 볼 때마다 진짜 어설프다 싶다. 아무리 잘 만든 작품이라도 감독 눈에는 아쉬운 것만 보이겠지만, 이 프로그램은 연출이 제일 준비를 못 했고 늦게 투입된 드라마다. 5년 동안 작품을 키워 오신 작가님은 물론이고, 배우, 촬영감독님 모두 몇 년 전 나온 대본 보며 준비하고 계셨다. 작가님과도 '한 달만 일찍 만났어도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이야기 많이 했다. 이게 첫 번째로 아쉬운 부분이다.

두 번째는 내가 입봉이라 밤을 엄청 많이 샜다. 배우들도 따라오느라 힘들었을 거고, 스태프들도 힘들었을 거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보며 우울할 때도 많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모두가 혹사해 나오는 결과물을 즐기는 게 맞는 건지도 모르겠고. 농담처럼 '밤 많이 샜다'하고 지나가지만, 드라마 일이 건강하게 오래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시청자 눈은 높아지는데, 어설프게 찍어 내보내는 건 더 못할 일이고, 지금 여건에서 제대로 찍어 내보내려면 누군가의 고혈을 뽑아야 한다. 오래 즐겁게 할 수 있길 바라지만 현재로서는 답이 안 나온다."

- 요즘 드라마 스태프 노동환경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부족한 제작비와 촉박한 제작기간 탓일까? 
"빠른 시간 안에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라는 건 사실 말 안 되는 거다. 이런 환경에서 정의를 이야기하는 게 맞는 건지 싶을 때도 많다. 지금 드라마 산업이 가장 큰 위기다. 제작 편수도 많고, 그만큼 경쟁도 심화되기 때문에 부작용도 커질 수밖에 없다. 드라마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부심 하나로 일하는데, 직업윤리도 당연히 퇴색될 수밖에 없다. 나도, 배우들도, 스태프도, 함께하는 사람들끼리 모두 건강하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파트너였으면 좋겠다."

돈꽃 김희원 장혁 장승조 이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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