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전 4시 45분(한국시각) 이탈리아 토리노에 위치한 유벤투스 스타디움에서 2017-2018 UEFA 챔피언스리그 유벤투스 FC와 토트넘 홋스퍼의 16강 1차전 경기가 펼쳐졌다. 눈을 뗄 수 없는 명승부였다. 유벤투스가 홈 그라운드 이점을 등에 업고 휘슬이 울린 지 채 10분도 되지 않은 시점에 곤살로 이과인의 멀티골로 앞서 갔다.

원정에서 두 골을 먼저 내준 토트넘은 다소 당황했지만 이내 경기력을 회복하며 만회골 사냥에 나섰다. 결국 전반 35분 해리 케인이 골키퍼 잔루이지 부폰을 제치고 골을 넣으며 추격에 불씨를 당겼고, 후반 26분 크리스티안 에릭센의 멋진 프리킥 골이 터지면서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양 팀의 저력을 볼 수 있었던 90분이었다.  

경기는 흥미진진했지만 한국 팬들은 마냥 즐겁게 경기를 지켜볼 수 없었다. 토트넘의 손흥민이 예상 외로 벤치에서 유벤투스전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밤잠 설쳐가면서 손흥민의 선발 출전을 고대했던 한국 팬들에게는 대단히 실망스러운 소식이었다. 손흥민을 대신해 출장한 선수는 아르헨티나의 미드필더 에릭 라멜라였다. 오랜만에 벤치에서 경기를 시작한 손흥민은 후반 38분 델리 알리 대신 그라운드를 밟으며 7분 간 경기장을 누비는 데 그쳤다.

 14일 오전 4시 45분(한국시간) 열린 UEFA 챔피언스리그 경기 결과. 유벤투스와의 경기에서 2-2로 무승부를 기록했다고 알리는 토트넘 홋스퍼 공식 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14일 오전 4시 45분(한국시간) 열린 UEFA 챔피언스리그 경기 결과. 유벤투스와의 경기에서 2-2로 무승부를 기록했다고 알리는 토트넘 홋스퍼 공식 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 토트넘 홈페이지


손흥민이 벤치에 앉은 이유

손흥민 대신 라멜라를 선발로 기용한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감독의 결정은 의구심을 자아냈다. 손흥민은 올 시즌 들어 어엿한 토트넘의 주축 멤버가 됐다. 이번 시즌 모든 대회를 통틀어 11골을 잡아내며 케인에 이어 팀 내 다득점 2위에 위치하고 있다. 손흥민은 토트넘을 대표하는 주 득점원 중 하나로 확실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최근 다소 주춤하고 있었지만 시즌 전체를 봤을 때 케인 다음으로 토트넘에서 위협적인 공격 카드를 중요한 경기에 선발로 내세우지 않은 점은 의외의 결정이었다. 현재 영국 스포츠 전문매체의 패널리스트를 역임하고 있는 전(前)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적인 수비수 퍼디난드도 손흥민을 제외한 포체티노의 결정에 의구심을 드러냈다. 퍼디난드는 "토트넘은 손흥민이 그리울 것"이라는 말로 포체티노의 선택을 비판했다.

포체티노 감독은 경기 종료 후 손흥민 대신 라멜라를 선발로 내세운 이유에 대해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이에 포체티노 감독은 "그는 유벤투스 스타디움에서 유벤투스를 상대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의 경험이 팀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라멜라의 경험을 높게 샀다고 밝혔다. 라멜라는 과거 이탈리아 리그의 AS 로마에서 두 시즌 간 활약한 경력이 있다.

유벤투스는 토트넘과의 경기 이전 올 시즌 홈에서 가진 17경기에서 14승 2무 1패의 압도적인 성적은 거둔 팀이다. 상대 골망을 38번 흔드는 동안 허용한 실점은 단 5실점에 불과했다. 기록만 봐도 유벤투스 스타디움은 원정팀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공간임이 명백하다. 토트넘 입장에서 유벤투스의 홈 그라운드에서 승리를 챙기는 것이 최상의 시나리오지만, 현실적으로 무승부 작전이 필요했다.

공격적인 손흥민보다는 미드필더적인 성향이 강한 라멜라가 선택받은 이유다. 기본적으로 라멜라의 수비력이 손흥민보다 좋다는 점도 주요한 이유 중 하나다. 2차전까지 생각해야 하는 챔피언스리그 특성을 고려한 판단이었다. 라멜라의 활약과 별개로 어려운 유벤투스 원정 경기에서 2골을 넣으며 무승부를 기록한 토트넘은 8강 진출의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결과론적으로만 좋았던 선택

그렇다면 라멜라를 기용한 포체티노의 용단은 실제로 경기력에 얼마나 반영이 됐을까.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는 대성공이다. 손흥민보다 허리 지역에서 공을 능숙히 다룰 수 있는 라멜라는 토트넘의 경기를 주도하는 데 힘을 보탰다. 측면에 국한되기보다 중원까지 플레이 범위를 넓혀 토트넘이 공을 소유하는 데 일조했다. 결국 토트넘은 유벤투스를 허리 싸움에서 압도한 끝에 '원정 무승부'란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라멜라의 활약은 다소 부족했다. 토트넘은 경기가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아 2골을 내리 허용했다. 홈에서 승기를 잡은 유벤투스는 무리한 공격보다는 선수비 후역습 전략으로 남은 시간을 소비했다. 라멜라의 수비적인 장점은 유벤투스의 수비진이 내려선 탓에 크게 쓸모가 없어졌다.

앞서 언급했듯이 라멜라가 토트넘이 공의 소유권을 지키는 데 힘을 더한 것은 사실이다. 허나 라멜라가 없었어도 유벤투스의 수비적인 경기 운영 방식으로 인해 토트넘은 어렵지 않게 공격 주도권을 잡았을 공산이 크다. 실제로 중원 싸움에 일등공신은 에릭센과 무사 뎀벨레였다. 두 선수의 날 선 컨디션만으로도 유벤투스의 중원을 극복할 수 있었다.

라멜라의 중앙 지향적인 성향은 수비적으로도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유벤투스는 측면을 기반으로 역습을 시도했는데, 라멜라가 측면을 비운 여파로 토트넘의 사이드 수비는 다소 헐거웠다. 토트넘의 두 번째 실점이 된 패널티킥을 내주는 과정에서도 라멜라의 수비 가담이 전무했다는 점은 지적받아 마땅하다. 이과인이 전반전 막판 시도한 패널티킥마저 들어가 1-3까지 스코어가 벌어졌다면 라멜라 선발 카드는 완벽한 패착이 될 뻔 했지만, 이과인의 실수가 토트넘을 살렸다. 

토트넘에게 필요했던 선수는 오히려 공격 지역에서 차이를 만들 수 있는 선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라멜라의 영향력은 미비했다. 특히 전반전에는 공격적인 장면을 한 번도 연출하지 못했다. 토트넘이 경기를 완전히 장악한 후반전에 3번의 드리블 성공과 두 번의 파울을 얻어냈을 뿐이었다. 슈팅은 단 한 개도 쏘지 못했다.

물론 '잠금' 모드에 들어간 유벤투스 수비진을 상대로 활약하는 일은 어렵다. 탁월한 공격력의 손흥민에게도 어려운 미션이다. 그럼에도 라멜라보다는 손흥민이 공격력이 위협적이란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2골 차로 뒤진 토트넘에 필요한 공격 옵션은 라멜라보다는 손흥민 쪽이 가까웠다. 토트넘이 경기 내내 상대를 몰아붙이는 흐름 속에 높은 결정력을 가진 손흥민의 부재는 아쉬웠다.

실망하기는 아직 이르다

한국 팬들만큼이나 선발 출장이 불발된 것에 손흥민은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손흥민은 경기를 끝마치고 가진 언론과의 짧은 인터뷰에서 "저도 선수로서 아쉽고 한국에서 밤늦은 시간까지 기다린 팬들에게 죄송하다"며 개인적인 아쉬움과 팬들을 향한 미안함을 표현했다. 팀의 핵심 선수로서 최고의 무대를 기다렸을 손흥민 개인에게는 불운한 하루였다.

이제 다시 도전의 파도가 밀려오고 있다. 경기 내용이 어찌 되었던 간에 라멜라의 선발 출전은 성공이라고 평가 받을 수 있다. 국내 언론들은 대체로 라멜라의 활약상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지만, 라멜라를 향한 현지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다. 실제로 영국 언론 스카이스포츠는 라멜라에게 평점 8점의 높은 점수를 줬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수 선발의 전권을 가지고 있는 포체티노의 평가다. 경기 직후 포체티노가 라멜라 개인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경기 전반에 대해서는 흡족하다는 평을 남겼다. 그 말 속에는 라멜라를 선택한 본인의 결단이 틀리지 않았음이 내포되어 있다고 판단된다.

근래 들어 손흥민이 하락세에 있고 유벤투스전을 통해 라멜라를 향한 포체티노의 신뢰를 재확인됐지만 실망하기는 아직 이르다. 손흥민은 여전히 토트넘의 주 득점원 중 하나다. 여러 개의 대회를 한꺼번에 소화해야 하는 토트넘의 일정상 손흥민의 반드시 필요한 자원이다. 손흥민과 케인이 함께 뛸 때 공격력이 극대화되는 사실을 포체티노가 모를 리 없다.

매시즌 발전하는 손흥민의 성장세도 기대감을 일으킨다. 토트넘 입성 이후 손흥민은 매순간 발전을 거듭했다. 본래의 장점인 득점력과 스피드는 더욱 날카롭게 가다듬었고, 약점으로 꼽히던 움직임과 경기 흐름을 읽는 능력도 상당 부분 개선됐다. 손흥민은 빠른 속도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며 매력적인 공격 카드로 발전했다.

이런 손흥민을 경시하면 피해를 보는 쪽은 오히려 토트넘과 포체티노다. 이제 만 26세로 아직 젊은 손흥민은 유럽 유수의 클럽들이 군침을 흘리는 공격수다. 군대 문제만 해결되면 손흥민을 향한 평가는 더욱 높아질 예정이다. 잦은 교체 출장은 항상 선발을 원하는 손흥민의 이적설에 불을 지필 뿐이다.

손흥민은 이미 토트넘 공격에 최적화 된 공격수다. 이 정도 수준의 젊은 공격수를 이적 시장에서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이적 시장에서 적은 금액을 소비하는 토트넘의 기조상 천문학적인 이적료가 판을 치는 현 시대에 손흥민급 공격수를 데려오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토트넘에 손흥민이 소중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유벤투스전 교체 출전은 대단히 아쉽지만 손흥민에게 기회는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여지껏 손흥민은 매번 그 찬스를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손흥민 본인과 한국 팬들 모두 아직 실망하기는 이르다.

EPL 토트넘, 아스널에 1-0 승리 10일 오후(한국시간) 영국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7-2018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아스널과 토트넘의 27라운드 경기. 손흥민은 70분을 뛰었으나 공격 포인트를 올리지는 못했다.

지난달 14일 에버턴과 경기에서 시즌 11호 골(리그 8호)을 기록한 이후 EPL에서는 4경기째 침묵이다. 잉글랜드축구협회(FA)컵을 합치면 6경기째 무득점이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토트넘의 손흥민. 지난 10일 27라운드 아스널과의 경기 중 모습. ⓒ 연합뉴스/E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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