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 중계 등으로 한 차례 결방한 KBS 2TV <황금빛 내 인생>이 11일 방송분으로 시청률 41.9%(닐슨코리아 전국 기준)를 찍으며 선방했다.

지난주 초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심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난 뒤, 몇몇 언론에서 "이재용 부회장이 구치소에서 <황금빛 내 인생>을 즐겨 봤"으며 그가 "<황금빛 내 인생>이 묘사하는 재벌가의 갑질과 오너 일가의 삶에 충격을 받았다"라고 보도했다.

<황금빛 내 인생> 속 인물 중 이재용 부회장의 '자각'에 가장 근접하는 이는 아마도 해성 그룹 회장의 손자이자, 자신의 신념이기도 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인해 혹독한 수난을 겪고 있는 최도경일 것이다.

해성 그룹의 장녀 노명희(나영희 분)의 외아들이자, 노명호(김병기 분) 회장의 장손인 최도경은 미국에서 MBA까지 마치고 돌아온 해성 그룹 전략 기획팀 팀장이다. 최도경은 최근 연인 사이로 발전한 서지안과 극 초반 접촉사고로 처음 만났을 때, 자동차 수리비 2000만 원에 당혹스러워하는 서지안에게 깎아주겠다며 통 큰 모습을 보여준다. 그건 자신의 자부심이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 때문이었다.

비로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색안경 벗은 최도경
 황금빛 내 인생

황금빛 내 인생 ⓒ kbs2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말 그대로 하면 '귀족이 은혜를 베풀다'라는 뜻이다. 즉 출생이나 운에 의해서 더 좋은 교육이나, 더 많은 부의 혜택을 누렸기 때문에 그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유래는 '백년전쟁'으로 부터 비롯된다. 1347년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의 칼레를 포위했다. 결국 기근에 시달리던 칼레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지만 11개월이나 저항했던 칼레 시민의 안위는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항복 협상을 하는 가운데, 에드워드 왕은 지도자 6명 목숨을 내놓는다면 칼레 시민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한다. 그러자 칼레 시민 가운데 가장 부유한 '외슈타슈 드 생 피에르'가 앞장을 섰고, 그 뒤로 시장, 고위관료, 상류층이 뒤를 이어 7명의 사람들이 나섰다.

단 한 명은 목숨을 건지게 된 상황, 하지만 다음 날 광장에 초라한 옷을 입고, 목에 밧줄을 걸고 나선 사람은 총 6명, 가장 먼저 제안했던 '피에르'는 이미 그의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그런 피에르의 살신성인은 결국 나머지 6명의 지도자의 목숨을 보존케 했으며, 칼레 시민의 안전을 지켰다. 이후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이란 작품으로 길이 기억되는 이 사건이 바로 스스로 목숨을 던져 책임감을 실천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유래다.

극 중 최도경은 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초반부터 입에 달고 산다. 그러나 이제 서지안과 연인 사이가 된 그가 당시의 일을 회한에 젖어 말하듯이, 그의 '얄팍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초래한 결과는 컸다. 딴에 인심을 쓴다고 깎아주긴 했지만, 500만 원이란 돈도 계약직 서지안에게는 여전히 큰돈이었다.

소현경 작가는 최도경을 통해, 매번 그가 자부심으로 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서지안에게 가닿기는커녕 오히려 그녀를 얼마나 난처하게 만드는지를 그린다. 그러면서 우리 시대 이른바 '갑'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는 걸 폭로한다. 그렇게 없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고 자부심을 가졌던 최도경은 '가지지 못한' 서지안에 대한 사랑에 눈뜨는 동시에 자신의 허세를 깨달아 간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유래에서도 알 수 있듯 '목숨을 던질 정도'가 아닌 이상, 아무리 양보라고 해도 타인을 기만하는 것이란 점을 최도경의 행보를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자신이 해성가를 나오면 서지안이 당연히 자신을 두 팔 벌려 받아줄 거라 생각했던 최도경은, 고개를 흔들며 거절하는 서지안의 모습에 의아해 한다. 또 억울해 하고 분노하기까지 한다. 그러던 그는 끝에서 죽음 앞까지 갔던 서지안의 모습을 만난다.

재벌가를 버리고 나온 나를 왜 싫어하냐, 재벌가가 왜 싫으냐고 반문하던 최도경은 세상에서 자신을 지우려 했던 서지안을 직시하고 나서야, 비로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색안경을 벗게 된다. 정규직이 아닌 목공소 알바를 하면서 삶의 여유를 찾았다는 서지안의 선택을 뒤늦게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런 그가 제대로 바라보게 된 것은 서지안만이 아니다. 최도경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랑을 인정받아 다시 재벌가로 돌아가려 했던 자신의 야무진 꿈도 다시 바라보게 된다. 애초에 정해진 길을 당연하다 생각하던 자신을 불쌍하다며 바라봐주었던 서지안을 마음에 품은 그 시점부터 어쩌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운운하던 재벌가 자제 최도경의 삶에도 균열이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소현경의 권유

소현경 작가는 '가졌다'는 그 허황된 궁전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얄팍한 자기 위안에 빠져있던 최도경이 비로소 '자신'을 발견하고 찾아가는 여정을 통해 그 '극복'을 설파한다. 그리고 그 여정에는 그저 재벌가 자제의 각성이 아니라,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자 하는 작가의 권유가 있다.

대기업 정규직이 되기 위해 쓰레기통 뒤지기도 마다하지 않던 서지안이 비로소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를 직시하게 되는 과정과 재벌가의 자제라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코에 걸고 얄팍한 자기 위안에 빠져 살던 최도경이 계급적 장벽을 무너뜨리는 '사랑'을 통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찾아가는 여정은, 결국 물질 만능주의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는 온전히 자신으로 서는 과정이다.

그래서 <황금빛 내 인생>의 젊은이들의 삶엔 그들의 꿈이 우선한다. 최도경을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이제 비로소 찾은 목공소를 매개로한 아티스트의 길을 놓치지 않으려는 서지안이나, 서지안을 사랑하지만, 그녀와 함께가 아니라도 가슴에 품었던 '친환경 사업'을 시도하는 최도경. 그리고 프랑스 유학보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빵 만드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지수와 지안, 지수 자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던 청년 사업가 선우혁 등은 모두 사랑에 앞서 자신들의 꿈이라는 존재로 떳떳하게 선다. 과연 구치소에서 이 드라마를 즐겨 봤다는 이재용 부회장에게 이런 작가의 생각이 가 닿았을까?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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