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3년 방영한 MBC 일일 드라마 <오자룡이 간다> 한 장면. 여성들만 제사음식을 준비하고 제기를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제사 준비는 모두 여성의 몫'이라는 고정관념을 드러냈다.

지난 2013년 방영한 MBC 일일 드라마 <오자룡이 간다> 한 장면. 여성들만 제사음식을 준비하고 제기를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제사 준비는 모두 여성의 몫'이라는 고정관념을 드러냈다. ⓒ MBC


지난 12월 개봉한 <초행>(2017)에서 수현(조현철 분)과 7년째 동거를 하고 있는 지영(김새벽 분)은 수현의 아버지 환갑을 맞아 난생처음으로 그의 집을 방문한다. 7년째 동거를 하고 있는 지영 입장에서는 수현과 같이 산 시간이 긴 만큼 자연스럽게 결혼을 염두에 둔 방문이었고, 시부모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당연히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음 장면. 어찌된 영문인지 지영은 수현의 집에 가자마자 그의 어머니와 함께 수현 아버지 환갑상에 올릴 전을 부친다. 편하게 앉지도 못하고 무릎을 꿇은 채 말이다. 전 부치는 지영의 솜씨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수현 어머니의 핀잔과 잔소리가 조금씩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그 시각, 수현은 아버지를 모시고 오기 위해 아버지가 지내는 숙소로 향한다.

지영은 수현과 7년째 함께 살고 있고 그와의 결혼도 염두에 두고 있다. 하지만 아직 두 사람은 법적으로 부부가 아니다. 또 이전까지 수현의 가족과 만난 적도 없다. 그럼에도 지영은 명절 때 시댁을 방문한 며느리처럼 다소곳이 앉아 전을 부친다.

분명 지영 스스로 수현 어머니에게 '전을 부치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했을 것이고, 이에 대한 강요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명절이 되면 대다수 며느리들이 '반 자발적'으로 이행해야하는 가사노동을 적나라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명절 음식 마련해 차례상에 안주상까지 차리는 여성들

 80-90년대 시골 명절 풍경을 고스란히 보여준 MBC <전원일기> 한 장면

80-90년대 시골 명절 풍경을 고스란히 보여준 MBC <전원일기> 한 장면 ⓒ MBC


10년 전만 해도 명절 즈음에 방영하는 드라마에선 명절 풍경을 묘사한 에피소드가 꼭 흘러나왔다. 여기서 명절 풍경이라 함은, 곱게 차려 입은 한복 위에 앞치마를 두른 며느리들이 전을 부치고 명절 음식을 마련해 가족들을 위한 차례상과 안주상을 차리는 모습이다. 이제는 TV 드라마에서 한복을 입고 시댁 식구들을 위한 음식을 정성껏 마련하는 며느리들의 모습은 쉽게 볼 수 없지만, 여전히 일일드라마와 주말 드라마를 중심으로 차례를 위해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여성들의 모습은 종종 나온다.

1980~1990년대 명절 풍경을 고스란히 보여준 드라마는 단연 MBC <전원일기>다. 아직도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회자되는 <전원일기>의 식사 장면을 떠올려보자. 남자들은 따뜻한 온돌방에 둘러 앉아 편안하게 밥을 먹지만, 여자들은 앉을 곳도 마땅치 않은 전형적인 시골 부엌에서 쪼그리고 앉아 밥을 먹는다.

매번 여자들이 부엌에서 밥을 먹는 것은 아니지만, 집에 손님이 오거나 밥을 먹을 장소가 없으면 부엌에서 쪼그리고 앉아 밥을 먹어야 했다. 명절이 되면 이와 같은 현상이 더 심해지곤 했다. 기자 기억 속에도 비슷한 명절 풍경이 남아 있다. 남자들은 따뜻한 아랫목에서 여자들이 차려주는 밥을 먹기만 했던 것 같고 할머니나 여자들은 남자들 밥 다 챙겨주고나서야 뒤늦게 한술을 뜨곤 하셨다.

당시엔 반찬 가짓수도 남자들 밥상과 여자들 밥상이 확연히 달랐다. 힘들게 음식 준비하는 것은 여자들인데 차례를 주도하고 진행하는 것은 온통 남자들이 했다. 다른 집에서 시집을 온 여자들은 정성스럽게 음식을 차릴 의무만 있을 뿐, 시댁 조상들에게 절을 할 수 없었고 명절에 놀러 오는 친척 어르신들의 안주상까지 차려줘야 했다.

제사 준비는 모두 여성의 몫? 드러난 고정관념

 지난 2017년 종영한 SBS 아침드라마 <아임쏘리 강남구> 한 장면. 여성들만 제사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제사 준비는 모두 여성의 몫'이라는 고정관념을 드러낸다.

지난 2017년 종영한 SBS 아침드라마 <아임쏘리 강남구> 한 장면. 여성들만 제사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제사 준비는 모두 여성의 몫'이라는 고정관념을 드러낸다. ⓒ SBS


예전보다는 명절 상차림이 간소해졌다고 하나, 여전히 며느리들에게 있어 명절 가사 노동은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온다. TV 드라마도 이를 반영하듯 여자들이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장면을 간략하게 보여주거나 아예 언급을 안 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대다수 주말 드라마를 중심으로 조부모, 부모, 자식이 함께 사는 대가족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지난 2013년 방영한 MBC 일일드라마 <오자룡이 간다>, 지난해 종영한 SBS 아침드라마 <아임쏘리 강남구>에서는 여성들만 제사음식을 준비하고 제기를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제사 준비는 모두 여성의 몫'이라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고스란히 드러내곤 했다.

지난 1월 17일 개봉한 선호빈 감독의 < B급 며느리 >(2017)의 주인공이자 감독의 실제 아내인 김진영은 며느리라는 이유로 응당 해야한다는 명절 가사 노동을 일절 거부한다. 심지어 김진영은 시댁 방문조차 하지 않는다.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은 김진영은 그 덕분에 완벽한 명절을 보낼 수 있었다고 쾌재를 부른다.

반면 며느리의 도리를 중요시 여기는 선 감독의 어머니 조경숙은 며느리의 본분을 다 하지 않는 김진영 때문에 화병이 나기 일보 직전이다. 감독의 아버지와 결혼한 뒤 시어머니 봉양 부터 남편, 시댁 식구 뒷바라지까지 도맡았던 조경숙은 자신과 달리 시댁 어른들에게 고분고분 하지 않는 며느리 김진영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김진영과 비슷한 또래의 며느리, 젊은 여성의 입장에서는 며느리·여성에게 유독 억압적인 가부장제의 착취에 맞서 투쟁하는 김진영이 통쾌하게 느껴진다. 최근 독립영화의 부진 속에서도 < B급 며느리 >만 다양성, 독립 영화 흥행 기준인 1만 관객을 돌파하며 선전하는 것은 명절이 다가오면 스트레스가 갑자기 늘어난다는 대한민국 기혼 여성들의 비애를 가장 적나라하고 통렬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아내 사이 오가며 실마리 찾는 한 남자

 며느리, 여성에게만 가중되는 명절 가사 노동의 문제점을 제기한 다큐멘터리 영화 <B급 며느리>(2017) 한 장면

며느리, 여성에게만 가중되는 명절 가사 노동의 문제점을 제기한 다큐멘터리 영화 (2017) 한 장면 ⓒ 영화연구소


김진영의 남편이자 <B급 며느리>의 연출자인 선호빈 감독 또한 가부장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이다. 아내와 어머니의 갈등이 표면적으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철저히 방관하는 입장이었고, 어머니와 아내가 알아서 풀기를 바랐다. 아내와 어머니가 도통 화해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감독은 직접 카메라를 들고 어머니와 아내 사이를 오가며 갈등의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감독 자신과 가족의 치부를 드러낸다는 우려와 걱정도 컸지만, 감독은 어머니와 아내의 극심한 고부 갈등 속에서 여성에게만 유독 가족에 대한 희생과 책임을 강요하는 가부장제의 모순을 보여주고자 했다.

왜 아들과 결혼한 여성인 며느리에게만 엄청난 양의 명절 가사 노동이 부여되어야 하는가.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 한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상당수 며느리들은 명절이 되면 대대로 내려오는 풍습이라는 이유로 자의반 타의반 가사 노동에 시달려야하고, 그에 따른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호소하곤 한다.

명절이 되면 며느리들의 스트레스가 극대화되는 악습을 끊으려면, 가족 개개인의 각성과 함께 여성에게만 가중되는 명절 가사노동을 부당하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가 정착되어야 한다. 그래서 2018년 설날에는 부디 많은 가족들이 < B급 며느리>를 함께 보면서 가족 모두가 행복하게 명절을 보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어디까지나 기자 개인적인 바람에 그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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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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