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단의 부담은 엄청나게 컸다. 104개국이 출전했던 1984년 미국 LA올림픽에서 금메달 6개를 땄던 한국이 159개국이 참가했던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무려 12개의 금메달을 휩쓸었기 때문이다. 만약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한국의 성적이 LA올림픽 수준으로 떨어진다면 서울올림픽에서의 선전은 단순히 홈 어드벤티지에 의한 요행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은 대회 첫 날 사격 여자 10m 공기소총에서 당시 서울체고에 다니던 여갑순이 깜짝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대회 첫 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여갑순의 선전을 시작으로 승승장구한 한국 선수단은 대회 마지막 메달이었던 남자 마라톤의 황영조가 대미를 장식하면서 서울올림픽 때와 같은 12개의 금메달을 수확했다. 그만큼 올림픽 같은 대형 종합 대회는 초반 성적이 전체 판도에 영향을 미칠 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2018 평창 동계 올림픽도 출발이 매우 좋다. 개회식 다음날 걸려 있던 5개의 금메달 중에서 하나를 한국이 가져왔기 때문이다. 쇼트트랙 남자 1500m의 임효준이 그 주인공이다. 하지만 하루 아침에 검색 순위 1위를 점령하는 인기스타가 된 임효준 뒤에는 아쉬움의 눈물을 삼킨 선수도 있었다. 경기가 열리기 전까진 임효준보다 더 큰 주목을 받았지만 레이스 도중 넘어지는 불운을 겪은 남자 쇼트트랙의 막내 황대헌이 그 주인공이다.

1000m 세계 신기록-1500m 세계랭킹 1위의 무서운 막내

[올림픽] 레이스 리드하는 황대헌 10일 오후 강릉 아이스아레나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500m 예선에서 황대헌이 레이스를 주도하고 있다. 2018.2.10

▲ [올림픽] 레이스 리드하는 황대헌 10일 오후 강릉 아이스아레나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500m 예선에서 황대헌이 레이스를 주도하고 있다. 2018.2.10 ⓒ 연합뉴스


180cm의 좋은 신장과 강한 체력을 가지고 있고 몸싸움에도 능한 황대헌은 2016년 릴레함메르 청소년올림픽에 출전해 1000m 금메달을 목에 걸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황대헌은 2011년 세계선수권대회 우승과 두 번의 월드컵 종합우승을 차지했지만 지난 2016년 암으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고 노진규의 뒤를 이을 남자 쇼트트랙의 대형 유망주로 큰 기대를 받았다.

황대헌은 2016-2017 시즌 대표팀 엔트리에 선발되지 못했지만 박세영과 서이라가 부상을 당하면서 솔트레이크 월드컵 2차 대회에 참가했다. 대타로 출전한 대회에서 1000m 세계 신기록(1분20초875)을 달성하는 기염을 토하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선배들의 부상때문에 우연찮게 기회를 얻은 10대의 어린 선수가 그야말로 대형 사고를 친 것이다.

황대헌은 2차 대회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고도 3, 4차 대회를 건너 뛰고 5차 대회에 가서야 다시 출전 기회를 얻었다. 대표팀의 상위 랭커들이 2017년 삿포로 아시안게임에 대비하기 위해 5, 6차 대회 출전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대헌은 월드컵 5차 대회 500m, 1000m 은메달, 6차 대회 1000m 금메달을 차지하며 남자 쇼트트랙의 확실한 차세대 기수로 떠올랐다.

황대헌은 평창 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2017-2018 시즌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임효준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평창행 티켓을 따냈다(서이라는 2017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으로 자동 출전권을 얻었다). 월드컵 1차 대회에서 500m 동메달, 1500m 은메달을 차지한 황대헌은 네덜란드에서 열린 2차대회에서도 500m 동메달,1000m은메달,1500m금메달을 목에 걸며 남자 쇼트트랙의 '토털 패키지'임을 입증했다.

황대헌은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월드컵 3차 대회에서도 1500m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한국에서 열린 4차 대회에서는 캐나다의 백전노장 찰스 해믈린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황대헌은 올림픽을 앞두고 출전한 월드컵 4개 대회에서 1500m 금메달 2개와 은메달 2개를 쓸어 담았다. 당연히 남자 쇼트트랙 1500m 세계랭킹 1위도 황대헌의 몫이었다.

시련을 빨리 극복하는 것도 최고 선수로 향하는 과정

[올림픽] 넘어지는 황대헌 10일 오후 강릉 아이스아레나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500m 결승에서 한국의 황대헌이 레이스 도중 넘어지고 있다. 2018.2.10

▲ [올림픽] 넘어지는 황대헌 10일 오후 강릉 아이스아레나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500m 결승에서 한국의 황대헌이 레이스 도중 넘어지고 있다. 2018.2.10 ⓒ 연합뉴스


[올림픽] 임효준-황대헌 나란히 결승 진출 한국 쇼트트랙 대표팀의 임효준과 황대헌이 10일 강릉 아이스아레나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500m 준결승에서 질주하고 있다.

▲ [올림픽] 임효준-황대헌 나란히 결승 진출 한국 쇼트트랙 대표팀의 임효준과 황대헌이 10일 강릉 아이스아레나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500m 준결승에서 질주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은 이번 평창 올림픽에서 서이라, 임효준, 황대헌이 개인전 경기에 출전한다. 임효준 역시 2017-2018 월드컵 1차 대회에서 1000m와 1500m의 금메달을 휩쓴 세계적인 선수지만 어린 시절부터 워낙 부상이 잦았고 올림픽을 앞두고도 허리 부상에 시달려 왔던 지라 한국 선수단은 임효준보다 황대헌에게 더 큰 기대를 걸었다. 실제로 다수의 해외 언론들도 1500m의 가장 강력한 금메달 후보로 황대헌을 꼽았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예선3조에 속했던 황대헌은 중국의 우다징, 네덜란드의 이차크 더라트를 가볍게 제치고 1위로 준결승에 올랐다. 임효준, 그리고 중국 선수 3명과 나란히 같은 조에 배치돼 우려를 자아냈던 준결승에서도 임효준에 이어 2위로 가볍게 결승선을 통과했다. 이제 결승전에서 임효준과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일만 남은 듯 했다.

하지만 불운은 결승에서 찾아왔다. 처음 작전을 세웠던 것처럼 중위권에서 탐색전을 벌이다가 8바퀴를 남겨두고 선두로 치고 올라갈 때만 해도 한국의 전략은 잘 통하는 듯 했다. 하지만 황대헌은 3위로 달리던 중 2바퀴를 남기고 스케이트날이 얼음에 부딪히며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이미 선두권과 한참 차이가 벌어진 상황에서 황대헌은 그대로 경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이는 황대헌이 '올림픽 정신'을 발휘해 끝까지 최선을 다해 완주를 했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황대헌은 올림픽 메달이라는 커다란 꿈에 단 두 바퀴만 남겨두고 넘어지는 불운을 겪었다. 아무리 올림픽 메달은 하늘이 내려 주는 거라고 하지만 하나만 바라보며 달려온 목표의 끝이 보이는 상황에서 그것이 한 순간에 사라진 선수의 심정은 본인 외에는 알 수가 없다.

자신의 주종목이라 할 수 있는 1500m에서의 실패는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겠지만 아직 황대헌에게는 세계신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1000m(결승 17일)를 비롯해 많은 종목이 남아 있다. 뜻하지 않게 찾아온 마음의 동요를 빨리 극복해 다음 경기에 대비하는 것도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하는 과정이다. 황대헌이 남은 경기에서 좋은 성과를 올리면 1500m에서의 아쉬움은 그저 좋은 추억과 경험으로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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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500M 황대헌 임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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