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염력>의 연상호 감독이 2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상호 감독이 두 번째 실사영화 <염력>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 ⓒ 이정민


그를 만나 이 얘기부터 해보고 싶었다. 영화 <염력>의 뿌리는 어디에 있었을까. 잔혹 애니메이션 혹은 성인 애니메이션의 선구자와도 같았던 연상호 감독이 선보인 두 편의 실사, 하나는 소재가 좀비였고 다른 하나는 초능력자다. 좀비를 소재로 한 <부산행>이야 전작 애니메이션 <서울역>과 관련이 있기에 연 감독이 그려온 주제의식의 연장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염력>은? 그저 '한국형 히어로'를 상업적으로 그린 오락물에 불과할까. 단정하기엔 몇 가지가 걸린다.

재개발을 명목으로 시장 상인들을 내쫓고 제압하는 과정에서 용산참사의 이미지가 차용됐고, 영화의 결말 또한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개봉 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연상호 감독에게 그 질문부터 던졌다. 장르와 문법이 아주 달라 보이는 이 실사영화는 언제 무엇으로부터 시작됐는지.

2009년 그때

"평범한 가장이 초능력을 갖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싶었다."

연상호 감독이 공식석상에서 일관되게 말했던 <염력>의 기획 의도다. "용산참사를 떠올릴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시스템과 맞서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나의 모티브였다는 의미였지만 단순하게 접근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영화의 주요 사건이 벌어지는 주 무대가 바로 이 시장 철거촌이며, 용역 업체 직원들의 방패에 적힌 'Policia'(실제 참사 당시 등장한 사제 방패로 공권력과 함께 용역이 투입됐다는 증거)라는 단어를 그대로 고증했다는 게 그 증거다.

- 단순히 소재로 차용한 게 아니라 <염력> 속 주요 설정은 그 역사가 꽤 깊어 보인다. 언제부터 염두에 뒀던 건지.
"오래된 것 같다. 초인에 대한 서사는 대학 다닐 때 친구들과 많이 얘기했다. '철거촌에 있는 초인 이야기를 코미디적으로 하면 어떨까' 하는 얘기였다. 일본 애니메이션 <노인 제트>와 같은 그런 서사로 말이다. 그러다 <부산행>을 시작할 즈음 그 이야기를 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바로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다.

이미 참고 자료들이야 많았지.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 만화들이 있었고, 나 역시 오래전부터 철거촌에 대한 내용을 알고 있었다. 주변에 관련한 활동을 한 친구들이 많았고, 그들이 했던 작업에 대해 꽤 알아서 (따로 철거 이슈에 대해 공부하기보단) 이걸 영화로 어떻게 어느 정도까지 보여드려야 하나, 어떤 목표를 갖고 만드느냐가 더 중요했지."

- 영화에 전면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시나리오 상엔 현장을 보도하는 기자를 두고 '진보 매체 기자'라고 표현하거나, 사건을 묘사함에 있어서 굉장히 세밀한 게 특징이었다. 용역 방패 고증도 그렇고.   
"용산참사는 < PD수첩 >을 통해 알고 있었고, (당시 현장을 누볐던 군소 매체인) <칼라 티비>에도 아는 분이 있었다. 또 용산에 대한 르포를 쓰는 분 중 저와 친한 작가분들도 참여했었다. 그리고 그 기타맨('처절한 기타맨'으로 참사 직후 현장에서 꾸준히 1인 시위와 공연을 이어갔다) 형도 알던 사이였다. 사실 그 참사가 일어나기 전 흥미로운 일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용산구청 앞에 달려 있던 대형 현수막이었다. '깽판을 치면 민주시민 대접을 못 받는다'였나?

제가 96학번인데 그땐 기존 운동권 선배들이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던 무렵이다. 새로운 이슈를 찾아야 했는데 민주화 이슈 이후 등장한 게 도시개발 이슈였지.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 이런 걸 보면서 내가 알던 것의 이면이 있다는 걸 확인하면서 일종의 의식이 생긴 거지. 한창 월드컵을 준비한답시고 (<상계동 올림픽>이 그린 사건과) 비슷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던 때였다. 재개발 문제 자체가 참 어려운 게 다수의 지지를 받기가 힘들더라. 말 그대로 개발 논리라서. 민주화 문제와 달리 기댈 수 있는 논리가 많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 배우들과도 사전에 다큐멘터리 <공동정범>을 같이 봤다고 들었다.
"영화 촬영 전 이미 <공동정범>이 제작 중인 걸 알고 있었다. 서울독립영화제에서도 상영됐었고. 참사 8주기 때 기념관에서 보고 김일란 감독님에게 '배우들과 보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아직 편집이 다 안 된 상태였는데 배려해주신 것이지."

영화에 담아놓은 의도들

 <염력> 스틸컷

<염력>의 한 장면. ⓒ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 영화가 묘하게 다가온다. 비극적 상황임에도 몇몇 장면에선 웃음이 나더라. 씁쓸한 웃음이었다. 그만큼 재개발 이슈를 상업영화로 전하는 건 굉장한 세심함이 요구됐을 텐데.
"일단 다루는 방식에서 윤리성은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이고, 생각도 많이 했다. 선과 악의 대결구도 그러니까 '나쁜 경찰, 나쁜 용역 대 착한 철거민'은 아니었으면 했다. 악의 근원을 인격체로 설정하고 그걸 해치워버리면 쾌감은 줄 수 있겠지만 윤리적으로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공격 대상은 시스템을 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염력>이 용산참사를 다뤘는지의 문제는 크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도시개발은 지나가다가 볼 수 있는 일상적 풍경이잖나. 근데 이게 일상적이지 않다는 이미지가 심어지면 무섭거든. 상업영화로 그걸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많은 관객이 보셨으면 했다. 어렸을 때만 해도 재개발에 대한 작품이 꽤 있었다. 드라마 <서울의 달> 같은. 그런 작품에서 힘 있는 사람이 힘 없는 사람을 누르는 이야기가 담기곤 했는데 어느 순간 그런 작품이 안 나오기 시작했다. (재개발은 끊임없이 진행됐는데 그걸 다루는 작품이 사라진 건) 그만큼 약자가 고립되기 시작했다고 느꼈다. <부산행> 흥행은 운이 좋아서 된 거였다. 그다음은 무얼 할까, 무엇을 의미 있게 할까 고민이 있었고 마침 기회를 잡아서 한 게 <염력>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래서 영화에선 잠깐 묘사되고 마는데, 위기의 순간 철거민들이 서로 도와주다가도 결정적일 땐 도와주지 않는 장면이 있다. 약자들의 다툼을 다룬 감독의 전작을 고려했을 때 개인적으론 그 설정을 나름 의도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더 강한 신(장면)도 있었는데 줄였다. 전작에서도 그랬지만 우리 사회에 일종의 계급 피라미드가 있는데 피라미드 상위에 있을수록 (이해관계가 비슷하니) 연대하기가 쉽고, 아래에 있는 사람일수록 연대하기 어렵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몇 개의 강한 신이 있었는데 관객분들의 몰입을 방해할까 봐 뺐다."

- 사실 전작 애니메이션들엔 연상호 감독 특유의 암울한 세계관이 잘 깔려 있다. 상업영화를 함에 있어서 본인의 작품 세계에 대해 투자사와의 충돌, 혹은 내적 충돌 등이 없었는지.
"일단 투자배급사와의 충돌은 전혀 없었다. 내적인 충돌은 당연히 있었지. 최대한 많은 분들에게 강한 인상 기억을 심고 싶었다. 전혀 이런 이슈에 관심 없던 사람들에게까지 말이다. 개인적으로 독립영화진영에 갖고 있는 아쉬움이 그거였거든. 독립영화로 이슈를 깊숙이 잘 다루는 분들은 많은데 그걸 소비하는 관객들도 이미 그런 감수성에 공감하는 분들뿐이더라. 상업영화는 많은 분들이 보는 영화만큼 (이슈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갖게 하는 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장인처럼 작품의 완성도만 따질 순 없다. 물론 완성도와 내 만족도 의미 있겠지만 이미 <사이비>나 <돼지의 왕> 등을 통해 제가 작품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 그 점에 대해선 이미 만족했다. 그래서 상업영화를 통해 일종의 운동 형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전의 하이텔 등에서 연재된 (김영하 작가의) <무협학생운동>(대중적으로 널리 인기를 얻은 이 소설은 무협지 같지만 한국정치를 풍자한 글이기도 하다 - 기자 말) 같은. 영화를 하면서 무엇을 대중적으로 의미 있게 보일까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다."

 영화 <염력>의 연상호 감독이 2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 <염력>을 통해 찌르고 싶었던 그 시스템, 즉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시스템의 정체를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한 마디로 정리하기 어렵다. 이데올로기의 동력이 정의인 사회? 그러니까 자신의 이데올로기가 마치 정의라고 믿는 그 맹목성 말이다. 그런 사회가 참 끔찍하다고 생각한다.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기 위해서) 많은 사색이 필요하거든. 근데 '내 이데올로기가 정의야'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게 광신적 종교처럼 되거든. 마치 한국전쟁에 참전하신 일부의 분들이 특정 단어나 대상에 대해 분노하듯이. 그 분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정의라고 생각하고 있다."

- 작품 내적으론 그렇지만 히어로를 가져온 만큼 기존 할리우드 영웅물 장르와 비교될 여지가 있다. 나름 그 장르의 공식을 상당 부분 파괴한 것으로 보이는데.  
"일단 블랙코미디 장르이기에 기존 장르 문법의 골격은 유지하되 그걸 비틀면서 간 것이다. 초능력을 쓰면 약점이 생기거나 하잖나. 근데 석헌은 오히려 쓸수록 몸이 좋아진다. 변비가 낫거나. 이 시스템 자체가 거대하고 무서워서 그의 초능력 자체도 아무 것도 아닌 게 되는 게 중요했다. 마지막 부분 역시 패배주의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나름 이 싸움을 승리와 패배로 나누지 않겠다는 생각에 선택한 결과물이었다."

- 이미 재개발 문제에 대해 꽤 알고 있다고 했지만 <염력>을 준비하며 추가 취재한 부분은 없는지.
"특별히 더 한 건 없다. 취재를 더 하는 게 오히려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다. 전철연(전국철거민연합) 등에서 나온 사례집이나 책을 더 보긴 했다. 일종의 기준을 찾고 싶었거든. 각종 현장에서 어떤 곳엔 공권력이 동원되고 어떤 곳엔 없는데 공권력 동원의 기준이 궁금했었다. 근데 기준이 없더라(웃음). 그냥 여론에 따라서인 것 같다. 여론이 잠잠하면 동원되고 그런 식으로..."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 사이

영화를 넘어 연상호 감독 개인 이력을 짚었다. 이미 두 편의 실사 영화를 선보인 그가 다시 애니메이션에 도전할까. 최근 선보인 그래픽노블 <얼굴>이 장편 애니메이션을 위한 물밑 작업이 아닌지 궁금하기도 했다.

-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시작해 실사 영화로 필모그래피를 쌓았다는 게 스스로 이색적이라 생각하진 않는지.
"개인적으론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를 크게 구분 짓는 편이 아니라서. 그보다는 상업영화인지 저예산, 독립영화인지로 생각하는 편이다. 제가 애니메이션을 했다고는 하지만 독립영화, 저예산 영화를 한 감독으로 보는 게 맞다. 애니메이션으로 묶기엔 제 영역이 좁거든. <뽀로로>와 <사이비>가 같은 애니메이션이지만 얼마나 거리가 먼가(웃음)!

<염력> 이후 애니메이션을 할 가능성은 적다. 일종의 과도기적 차원에서 <얼굴>이라는 책을 냈는데 전혀 장편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 장편 애니메이션을 통해 이미 하고 싶은 말은 거의 다 했거든. 독립, 저예산 애니메이션이라고 해서 자본에서 완벽히 자유로울 수 없거든. 보다 자유로울 수 있는 작업을 고민하다가 낸 게 <얼굴>이라는 그래픽노블이었다."

 영화 <돼지의 왕>의 한 장면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의 한 장면 ⓒ 돼지의 왕 제작위원회


- <돼지의 왕>(2011) 때만 해도 극장 개봉용 장편 애니메이션에 대한 고민이 컸었다. 확신이 없어서 이런 저런 시도를 하겠다고 했는데 여전히 그 고민의 연속인지.
"그땐 돈이 제일 문제였다. 예산이 매우 적었던 <돼지의 왕> 이후 <사이비>는 조금 나은 상황에서 했고, <서울역>은 또 그보다 나은 예산이었다. 근데 시장은 여전히 답보상태더라. 물리적인 예산은 올라가는데 시장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면 (애니메이션을) 계속 해보자는 얘길 쉽게 못한다."

- 그런 의미로 2013년 IPTV용 성인 애니메이션 <졸업반>을 내놨고, <발광하는 현대사> 프로젝트 역시 나름 독자적인 활로 모색을 위한 작업이었는데 성과가 없었다고 보는건가.
"한번 해보려 했던 건데(한숨). 기존 극장 개봉 시스템의 강한 벽을 느껴서 IPTV 쪽을 본 건데 거긴 더 견고하더라. 예를 들면 극장은 독과점 얘기가 많이 나오잖나. 저도 <부산행>을 했기에 그 얘기에선 자유로울 순 없다. 제 의도가 아니었지만 일견 이해가는 부분이 있었다. 빠른 시간에 확 관객을 끌어 모아야 계속 극장에 걸 수 있으니 말이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근데 IPTV 쪽도 마찬가지더라. 잘나가는 영화 탑10 등만 모아놓고 나머지 정보를 찾을 수가 없다. 저예산 영화 탑10 목록이라도 만들어 놓으면 서로 수익이 날 텐데 그러지 않더라.

<발광하는 현대사>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돼지의 왕> <사이비> 등을 하면서 극장 시스템 진입이 힘들다고 생각했기에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영화 예술은 산업구조를 뚫는 과정에서 독특한 작품이 나온 경우가 많기에 나름 시도했었다. 근데 안 되더라. 작품 자체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시스템의 벽이 참 견고하다는 걸 느꼈다. 요즘 우리 사무실 내에 웹툰 팀이 있다. 제가 하는 작업은 아니지만 시나리오도 쓰고 그러는데 그 안에서 뭔가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 그 맥락에서 이후 포부를 밝히자면?
"명확하게 있진 않은데 <부산행>을 하면서 갖게 된 여러 기회가 있었고 그 중 하나가 <염력>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투자배급을 받았다는 게 아니라 더 다양한 작품을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염력>을 통해 해외에서 기회가 날 수도 있다. 그런 걸 잘 이용하면 국내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작품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영화 <염력>의 연상호 감독이 2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상호 감독은 공포영화를 차기작으로 염두한 걸로 알려졌지만 경우의 수는 여러가지다. ⓒ 이정민



연상호 염력 돼지의왕 류승룡 심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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