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은 출전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이라 할 만큼 대단한 일이다. 명절에 어린 조카가 놀러 왔다가 하나쯤 슬쩍 가져가도 눈치 못 챌 정도로 집안에 금메달이 수두룩한 마이클 펠프스(올림픽 금메달 23개)여도 마찬가지다. 물론 종목마다, 대륙마다 경쟁률이 다르긴 하지만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다는 것은 그 나라 혹은 대륙을 대표하는 선수로 인정 받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한국 남자농구대표팀을 예로 들어보자. 한국남자농구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20년 넘게 아시아 지역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프로농구의 레전드이자 지금은 은퇴 후 예능인으로 엄청난 활약을 하고 있는 서장훈이나 8억 원이 넘는 연봉을 받는 KBL 최고의 스타 이정현(KCC 이지스)조차도 올림픽 무대는 밟아보지 못했다.

그렇게 한 번 나가기도 쉽지 않은 올림픽에서 이미 5개의 메달을 목에 걸었던 선수가 있다. 500m부터 1500m, 3000m 계주까지 두루 강했던 한국 쇼트트랙 최고의 올라운드 스케이터 박승희가 그 주인공이다. 어느덧 베테랑 선수가 된 박승희는 만 25세가 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자신의 3번째 올림픽에 도전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박승희의 출전 종목이 쇼트트랙이 아닌 스피드 스케이팅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동계 올림픽에서만 메달 5개 딴 쇼트트랙의 숨은 여왕

밝게 웃는 박승희 7일 오후 강원도 강릉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대한민국 박승희가 훈련하며 밝게 웃고 있다. 2018.2.7

▲ 밝게 웃는 박승희 7일 오후 강원도 강릉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대한민국 박승희가 훈련하며 밝게 웃고 있다. 2018.2.7 ⓒ 연합뉴스


박승희는 초등학교 2학년 때 피겨스케이팅 만화를 보고 감명을 받아 소화초등학교 빙상부에 가입했다. 다소 황당한 일이지만 당시 박승희가 다니던 초등학교 빙상부에는 피겨반이 없었고 박승희는 졸지에 쇼트트랙을 시작했다. 만약 피겨를 했으면 어떤 선수로 성장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박승희 부모님의 스케이팅에 대한 지식 부족이 오늘날 올림픽 메달 5개를 목에 건 쇼트트랙의 레전드를 만든 셈이다.

순발력이 남달랐던 박승희는 어린 시절부터 단거리 종목인 500m에서 강세를 보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출전했던 동계체전에서는 중, 고등학교는 물론 실업 선수들의 기록까지 능가하는 대회 신기록을 세웠을 정도. 500m 단거리는 쇼트트랙 여왕으로 군림하던 전이경이나 진선유도 올림픽 금메달을 따지 못했던 종목이라 박승희에게 거는 한국 쇼트트랙의 기대는 대단했다.

하지만 박승희는 자신의 첫 올림픽이었던 2010 밴쿠버 올림픽 500m 준준결승에서 실격을 당하며 조기탈락했다. 오히려 자신의 취약종목이었던 1000m와 1500m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며 중장거리 종목에 약하다는 편견을 극복하는 수확을 올렸다. 한국이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던 3000m 계주에서는 제임스 휴이시(호주) 심판의 황당한 판정 때문에 아쉽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휴이시 심판은 그 유명한 '오노 사건'때 김동성을 울렸던 인물이다).

벤쿠버 올림픽을 경험한 이후 진정한 올라운드 스케이터로 거듭난 박승희는 2010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500m와 3000m,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며 종합 1위에 올랐다. 2011년 허리 부상으로 잠시 태극마크를 내려놨던 박승희는 2012년 4월 다시 국가대표에 선발돼 2013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종합 2위에 올랐다.

박승희는 생애 두 번째 올림픽이었던 2014 소치 올림픽에서 500m 동메달을 따낸 후 무릎 부상을 당하며 1500m 출전을 포기했다. 하지만 엄청난 투혼을 발휘해 1000m와 3000m 계주를 소화했고 1000m에서 대표팀 동료 심석희를 제치고 금메달을 따내는 기염을 토했다. 박승희는 3000m 계주에서도 금메달을 추가하며 대회 2관왕과 함께 한국의 역대 동계올림픽 최다 메달리스트 공동 1위(전이경, 이호석)에 등극했다.

종목 바꿔 올림픽 도전, 올림픽은 메달이 전부가 아니다

박승희는 소치 올림픽 직후에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500m 금메달을 획득하며 심석희에 이어 종합 2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박승희는 올림픽이 끝난 해 여름 갑작스럽게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로 변신한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역대 동계 올림픽 최다 메달리스트이자 현 세계선수권 대회 종합 2위 선수의 종목 변경 소식에 빙상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스피드 스케이팅과 쇼트트랙은 같은 빙상 종목이지만 트랙길이부터 사용장비, 경기룰까지 적지 않은 차이가 있고 당연히 훈련방식도 다르다. 아무리 박승희가 세계적인 쇼트트랙 선수였다 해도 종목 변경은 결코 쉽지 않을 거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박승희는 본격적으로 스피드 스케이팅 훈련을 시작한 지 석 달 만에 국가대표에 선발되는 기염을 토했다.

물론 박승희가 쇼트트랙에서 그랬던 것처럼 놀라운 기록 향상을 이뤄낸 것은 아니다. 박승희는 아직 스피드 스케이팅 전환 후 국제 무대에서 입상한 적이 없고 2016년에는 고질적인 허리부상이 재발해 슬럼프를 겪기도 했다. 2017년 삿포로 동계 아시안게임 1000m에서 6위를 기록하며 조금씩 부진에서 탈출한 박승희는 작년11월 스피드 스케이팅 여자 팀 스프린트 종목에서 김민선, 김현영과 함께 한국의 우승을 이끌었다(물론 팀 스프린트는 올림픽 종목은 아니다).

박승희는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여자 500m와 1000m 그리고 팀 추월 경기에 출전할 예정이다. 물론 대표팀 합류 불발이라는 악재를 겪었던 대표팀의 맏언니 노선영이 복귀했기 때문에 3명이 출전하는 팀 추월 경기는 엔트리에 포함됐지만 정작 경기 출전 기회는 없을 지 모른다. 개인전 역시 냉정하게 보면 박승희를 메달 후보로 분류하긴 힘들다.

하지만 박승희는 역대 동계올림픽 최다메달 보유자라는 영광을 뒤로 하고 종목을 변경해 자신의 세 번째 올림픽에 도전하고 있다. 올림픽은 단순히 메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가하고 도전하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메달 후보들에게만 관심이 집중되고 있지만 박승희는 이번 올림픽에서 결코 잊지 말아야 할 또 한 명의 자랑스러운 '올림픽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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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동계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쇼트트랙 박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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