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구속중이었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은 뒤 석방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구속중이었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은 뒤 석방되고 있다. ⓒ 이희훈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집행유예 판결로 여론은 연일 들끓고 있다. 담당 재판부인 서울고등법원 형사13부(정형식 부장판사)가 이 사건을 "최고 권력자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을 겁박해 뇌물로 나아간 사건"으로 규정하고, "전형적 정경유착을 이 사건에서 찾을 수 없다"고 결론 내렸으니 격분할 만하다. 이 부회장을 재판에 넘겼던 특검팀도 "진짜 설마설마했다. 우리가 예측한 시나리오 10개 중 가장 최악의 결과"라고 했을 정도다.

그 누구보다 직업병 피해를 입은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들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침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와 삼성노동인권지킴이 등은 5일 선고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사법부가 삼성 앞에 굴복했다, 돈과 권력이 면죄부임을 분명하게 선언한 것"이라며 "박근혜는 탄핵됐지만 박근혜 체제에서 만들어진 재판부들은 여전히 살아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정형식 재판부"라며 재판부를 강하게 성토했다. 

반도체 노동자의 아픔은 김태윤 감독이 연출한 2013년작 <또 하나의 약속>에 생생히 드러난다.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지난 2007년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황유미씨의 사연을 그린 이 영화는 노동자들의 아픔뿐만 아니라 삼성 재벌이 노동자를 다루는 방식도 함께 고발한다.

삼성이 내민 '조롱의 돈' 500만원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의 아픔을 그린 <또 하나의 약속>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의 아픔을 그린 <또 하나의 약속> ⓒ 또 하나의 가족 제작위원회


강원도 속초가 고향인 한윤미(박희정)는 고등학교 졸업 후 국내 최대 기업으로 꼽히는 진성반도체에 일자리를 얻는다. 택시 운전기사인 아버지 한상구(박철민)는 이런 딸이 그저 자랑스럽기만 하다. 아버지는 첫 직장생활을 위해 집을 떠나는 딸에게 소주 한 잔을 권하고, 딸은 아빠가 건네는 잔을 단번에 비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딸은 몹쓸 병을 얻어 집으로 돌아온다. 병명은 급성 골수성 백혈병. 회사 직원은 위로금을 건네주며 아버지와 딸을 달래는 척 하면서 합의를 압박한다. 그렇게 해서 내민 돈이 고작 500만원이다. 아버지는 격분하며 합의를 거부한다.

현실로 눈을 돌려보자. 지난 2016년 7월 <뉴스타파>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성매매 의혹을 보도했고, 파장은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이때 반올림 상근활동가인 이종란 노무사는 당시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아래와 같이 적었다. 참고로 영화에서 김규리가 연기한 노무사 유난주는 이종란 노무사를 모델로 했다.

"죽어가는 딸 앞에서 삼성이 '이걸로 끝내자'고 딸의 병원비로 내민 500만원. (중략) 삼성 이건희 회장이 회사의 비호 하에 아무렇지도 않게 벌인 불법 성매매 뉴스를 보면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성매매 여성에게 건넨 500만원, 유미와 유미 아빠에게 삼성이 건넨 500만원은 조롱의 돈이다."

언론은 어땠을까? 영화에서 아빠 한상구는 딸의 억울한 사연을 알리고자 부지런히 언론사에 전화를 돌린다. 그러나 돌아온 건 싸늘한 냉대뿐이다. 현실이라고 다르지 않다. 수많은 언론사들이 삼성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기사는 절대 쓰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이건희 회장 성매매 스캔들은 KBS·MBC·SBS 등 공중파 방송 3사나 조선·중앙·동아 등 '주류' 매체보도를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 이재용 부회장의 석방 소식을 전하는 언론의 보도태도는 더 가관이다. 제목만 봐도 낯 뜨겁다.

'이재용 집유… 특검 여론수사에 법리로 퇴짜놓은 법원'(동아일보)
'무리한 기소와 '1심 여론재판' 바로잡은 이재용 2심'(문화일보) 
'이재용 이제는 앞만 보고 뛰어라'(서울경제)
'삼성의 미소, 국가경제 웃음으로 이어져야'(전자신문)
'삼성은 심기일전해서 글로벌 정도 경영에 매진하길'(매일경제)

법은 더욱 가혹하다.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인 황상기씨는 2011년 6월 서울 행정법원으로부터 "백혈병과 업무 사이에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며 딸의 산업재해를 인정받았다. 5년여에 걸친 싸움 끝에 받아낸 결과였다. 그럼에도 황씨는 3년을 더 법정 싸움에 매달려야 했다. 2011년 근로복지공단과 삼성반도체가 행정법원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기 때문이다. 결국 2014년 2심 재판부는 고 황유미씨의 백혈병이 산재라고 판결했고, 공단은 항고를 포기했다.

삼성 방패막이로 나선 '법'과 '언론'

 영화 <또 하나의 약속>에서 주인공 한상기는 딸의 억울한 죽음을 백방으로 호소하지만 늘 벽에 부딪힌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에서 주인공 한상기는 딸의 억울한 죽음을 백방으로 호소하지만 늘 벽에 부딪힌다. ⓒ 또 하나의 가족 제작위원회


소중한 딸을 잃은 아버지가 삼성이라는 공룡과 법정 공방을 벌여야 하는 근본 이유는 제도적 허점 때문이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아버지의 애끓는 호소를 통해 이 같은 허점을 드러낸다. 법정에 선 아버지 한상구는 입증책임을 따지는 재판부를 향해 특유의 강원도 사투리로 이렇게 호소한다.

"저는 무식하고 못 배워서, 이 재판정에서 무슨 얘길 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제 딸내미가 일하던 공장에선, 그냥 암도 아니고 백혈병 환자들이 참 많이 생겼어요. 택시 운전을 하다 보면요, 술 취해서 돈 안 내고 도망가는 사람들이 꼭 있어요. 그 사람들 쫓아가서 잡으면 뭐이라 하는지 알아요? 돈 냈다고, 아저씨가 사기 치는 거 아니냐고 잡아떼요. 그러면서 돈 안 낸 증거를 내 놓으라는 거예요. 회사나 공단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산재 신청을 하면요, 우리한테 그 증거를 내놓으래요. 영업 비밀이라고 자료도 내놓지 않고, 작업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면서 우리한테 증거를 내 놓으라는 법이 세상에 우데 있어요? 근데요, 우리한테 증거 있어요. 여기, 여기, 또 여기, 또 저기, 여기 병든 노동자들의 몸, 가족 잃은 사람들. 이게 우리의 증거예요. 이보다 확실한 증거가 또 있을까요?"

이건희 회장이 성매매 스캔들을 벌이는 사이, 그리고 아들인 이재용 부회장이 부도덕한 권력과 거래를 하던 사이 삼성 노동자들은 가혹한 노동조건에 내몰리다 하나둘 목숨을 잃었다. 소중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이 삼성과 싸우려 해도 언론과 법이 삼성의 방패막이로 나서니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다. 황상기씨는 이 부회장 판결 직후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이름도 형식적인 판사, 국민 세금으로 월급받으면서 국민 뜻에 반하는 판결을 내린 판사, 지금까지 받은 월급 도로 내놔라, 국민의 명령이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삼성이 한국 경제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건 분명하다. 삼성 입사를 꿈꾸는 젊은이들도 많은 것으로 안다. 그래서 더욱 삼성을 예의주시해야 한다. 삼성이 어긋난 방향으로 나가면 우리나라 전체가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 사회는 2007년 김용철 변호사가 준 기회를 놓친 적이 있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이재용 부회장 수사는 삼성을 바로 잡을 두 번째 기회였다. 이 부회장이 구속되면서 삼성의 잘못된 행실이 바로잡히나 했다. 그러나 정형식 판사의 집행유예 판결로 이 같은 기대는 허망하게 무너졌다.

그러나 낙담하기엔 이르다. 아직 대법원 판단이 남아 있어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삼성을 사회의 투명 감시망 아래에 놓아야 한다. 이렇게 하지 못하면 성추문이나, 뇌물 공여 같은 범죄행각은 어느 시점에서 되풀이된다. 노동자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어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부조리 역시 막지 못한다.

기회는 한 번 놓치면 다시 잡기 힘들다. 이번에 또 다시 놓치면 언제 기회가 올지 장담 못한다. 무엇보다 삼성을 바로 잡는 일은 박근혜 전 정권을 몰아낸 촛불이 이뤄내야 할 '또 하나의 약속'이다.


댓글15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