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천화>의 배우 이일화가 31일 오후 서울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가진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배우 이일화가 영화 <천화>로 돌아왔다. 23년만에 주연을 맡은 작품으로 한창 관객과 소통 중이다. ⓒ 이정민


등장인물이 살아있는 건지 죽어있는 상태인지, 혹은 현실을 살고 있는지 꿈을 살고 있는지 불분명 하다. 치매에 걸린 한 노인을 간호하는 윤정(이일화)은 줄곧 이 노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이내 그의 주변에 정체 모를 사람들이 등장하거나 사라진다. 지난 1월 25일 개봉한 영화 <천화>의 전개 방식이다. 

제주도의 변화무쌍한 날씨를 배경으로 해 영화 속 분위기는 대체로 몽환적이다. 게다가 서사 구조가 뚜렷하지 않기에 어렵게 다가온다. 23년 만에 영화에서 첫 주연을 맡았다는 사실보다 관객들에게서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는 것에 이일화는 더 반가운 마음을 드러냈다. 영화 개봉 이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관객들 반응 하나하나를 소개하며 영화 소개를 시작했다.

관객에게 위로받다 

언론 시사회를 포함해 네 번이나 영화를 본 이일화는 "모든 게 윤정의 꿈인지, 혹은 누군가의 소설 속 이야기인지 생각했다"며 "관객 분들이 시사회에서 여러 질문을 해주시는데 제가 오히려 배우고 있다. 그만큼 보는 분들에게 맡기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운을 뗐다. 분명한 건 치매에 걸린 노인(하용수)과 윤정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 그 어느 지점을 영화가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 이일화는 "그런 부분에서 생각이 참 많아지게 하는 작품"이라 정의했다.

본래 이일화는 주연이 아닌 작은 조연 캐릭터 수현 역(이혜정)에 관심이 있었다. 수현은 치매를 앓는 노인의 전 부인으로 남편이 치매를 앓자 매몰차게 버리고 간 사연이 있는 인물이다. "(성경에) 사람을 정죄하지 말라는 말이 있잖나"라며 이일화는 "남편을 돌봐주는 윤정을 찾아가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는 모습에 공감이 갔다. 또 극중 수현이 플라멩코를 추는 장면도 매혹적으로 보였다"고 그 이유를 전했다.

 영화 <천화> 관련 사진.

영화 <천화> 의 한 장면. ⓒ 이선필


조심스럽게 영화에 접근한 이일화에게 결과적으로 감독은 주연을 제안했다. 그렇게 23년 만에 영화 주연으로 복귀하게 된 셈이다. "큰 역할이든 작은 역할이든 제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중요했다"며 이일화는 "살아있는 연기를 하기 위해 역할의 크고 작음에 대한 생각은 버리려 했다"고 말했다.

"주인공이라는 생각에 어떤 부담을 갖기보단 내려놓으려 했다. 부담감은 사람을 경직되게 만들고, 그 모습이 카메라에 그대로 보인다고 생각한다. 제가 할 수 있는 윤정의 모습을 표현하는 게 중요했다. 인위적으로 윤정을 만들어 가는 건 공감받을 수도 없고, 제가 그렇게 연기할 수 있는 배우도 아니고. 

(시나리오에 친절하게 설명된 캐릭터가 아니기에) 감독님께 많이 묻기도 했는데 시원한 답을 주시진 않아서 배우로선 조금 답답하기도 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왜 그러셨는지 알 것 같더라. '천화'라는 단어 뜻이 고승의 죽음이라고 하는데 정말 죽음 앞에 모든 게 헛된 것, 하지만 그게 우울한 게 아닌 죽음을 통해 어떤 희망을 얘기할 수 있다는 걸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인생에서 뭐가 옳고 그른지, 우리 각자의 잣대 중 뭐가 맞고 틀린지 아무도 알 수 없고, 해답도 없다는 걸 말하려 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감사함


이일화는 거듭 이번 역할을 맡은 것에 감사해했다. "감격스러웠다"라고 표현하던 그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이번 작품을 했다"고 고백했다.

더불어 그는 단아한 외모에 갇히지 않고, 같은 역할이라도 조금씩 변화를 꾀했다. 엄마 역할로 눙칠 수 있지만 그 안에서 때론 도도한 사모님이거나 억척스러운 아줌마였고, 혹은 자식 사랑에 인생을 바친 숭고한 엄마기도 했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를 비롯한 70여 편의 출연작이 그 증거였다. 이 말에 오히려 이일화는 "제가 노력했다고 하기 보단 좋은 작품과 역할이 주어진 것"이라며 겸손하게 말했다.

"지금까지 전 운이 좋게도 비슷한 역할이라도 전작과 크게 연관이 없는 캐릭터를 맡았다. 아마 앞으로 예전 작품에서 했던 캐릭터와 이미지가 비슷한 작품도 있을 텐데, 앞으론 제 노력을 통해 차별성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쉽지 않을 것 같다. 깨질 때도 있겠지만 그래도 도전해야 한다고 본다. 새로움을 보여드리고 싶고, 변신하고 싶다. 살아서 숨쉴 때까지 연기하고 싶다고 생각해 왔거든. 그럴 수만 있으면 참 행복할 것 같다.

<응답하라 1997>을 하게 된 것도 그 연장이었던 것 같다. 김성령 언니를 제가 좋아하고 평소 만나는데 배우들이 만나서 연기에 대해 얘기할 때가 있잖나. 그때도 언니에게 '나 변신하고 싶어'라고 말하던 중이었고, 언니가 이런 작품이 있다며 소개해준 게 <응칠>이었다. 성동일 오빠를 통해서 전화가 왔고, 대본리딩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제 리딩을 본 감독님이 매우 걱정하시더라. 리딩할 때 산만해 보였나 보더라. 아마 그걸 보시고 믿음을 안 주신 것 같았다. 

시간을 좀 보고 다시 만나자는 감독님의 말에 '믿고 절 써주시라'고 말씀드렸다. 어디서 그런 담대함이 나왔는지. 그땐 '어디 한 번 부딪혀 보자! 해내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첫 촬영 때 결국 감독님이 '아! 좋은데요?' 하시더라. 참 기뻤다." 

<응칠>의 캐스팅 일화에서 이일화만의 승부욕이 느껴졌다. 스스로를 "끼도 없었고, 학창시절에 화장실 가고 싶어도 손을 못 들던 아이"라 소개할 정도로 내성적 성격의 그가 연기에서만큼은 강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

 영화 <천화>의 배우 이일화가 31일 오후 서울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가진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시간을 갖고 보자는 감독님 말에 어디서 그런 담대함이 나왔는지. 그땐 '어디 한 번 부딪혀 보자! 해내겠다!'는 마음뿐이었다. " ⓒ 이정민


전환점

이 대목에서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1991년 데뷔 후 20대, 30대 초반에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음에도 돌연 결혼을 선언하고 잠시 연기자 생활을 벗어났던 공백기에 대한 물음이었다. 결혼과 이혼은 곧 개인사기에 함부로 논할 수 없는 지점이다. 과거에 무분별한 추측 보도로 받은 상처도 있기에 그간 언론 인터뷰에 신중했던 그였다.

"물론 (그때 더 왕성하게 활동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지금 제가 배우 이일화로 있기에... 그게 아니라면 모르겠지만 과거는 아픈 만큼 재산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돌아가서 바꿀 기회가 주어진다면... (잠시 생각) 안 바꾸겠다. 엇갈린 것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저 또한 누군가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생각하고, 그랬으면 한다.

(인터뷰를 많이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말이라는 게 그렇다. 지혜롭게 말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안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다. 말 한 마디로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잖나. 보시다시피 제가 이렇게 말을 잘 못한다. 또 어렸을 때 순수한 마음으로 언론 매체를 만났을 때 상처를 받은 것도 있다. 물론 그것 역시 제가 대중의 사랑으로 사는 연기자기에 부수적으로 올 수 있는 아픔이라는 걸 알고 있다." 

약함 속에 숨겨진 강인함. 이일화에겐 그런 힘이 있었다. 본인의 약점에 솔직하고, 장점에 겸손한 태도가 그로 하여금 30년 가까이 연기하게 할 수 있는 동력 아니었을까.

"어렸을 땐 교만했다. '연기? 그냥 뭐 하는 것이지'라고 생각했다. 20대에 엉망으로 연기하면서 스스로 잘하는 줄 알았다. 그러다 아이를 양육하면서 생각을 다시 하게 됐다. 열정이라고 하기 보단 놓칠 수 없는 무엇이었다.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이젠 제 삶의 일부다. 지금도 한없이 부족함을 느낀다. 인간은 완벽할 수 없잖나. 그래서 매순간 첫 걸음을 떼는 어린아이 마음으로 임한다. 어느덧 선배라고 해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내가 좀 부족했던 것 같은데 다시 해볼까?'라는 말을 현장에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 <베티블루 37.2>(1986) 속 여장부 같았던 베티, <잉글리시 페이션트>(1996) 등 모두 배우 이일화의 마음을 건드린 작품들이다. 동시에 대중의 마음을 건드린 이일화의 출연작 또한 있다. 70여 편의 작품 중 중요한 분기점이 된 작품을 그에게 물었다.

"드라마 <바람의 아들>(1995)이 기억난다. 이병헌씨의 짝사랑인 술집 작부 역할이었다. 되게 쉽지 않은 역할인데 제 나름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준비해갔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게 그거더라. 많은 분들이 인정해주셨던 것 같다. 제가 잘했다는 건 아니고 그만큼 기억해주신다는 것에 감사드린다. 그리고 최근작 중에선 제 모든 걸 바꿔놓은 <응답하라1997>이지." 

<천화> 이후 그는 대학로에서 연극 무대에 열중하고 있다. 오는 9일까지 이일화는 연극 <루터> 속 카탈리나로 관객들과 만난다. 드라마 차기작 또한 거의 확정지은 상황이다. 대표작이 여럿 있을지언정 이일화의 인생작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만큼 새로운 눈으로 그를 지켜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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