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방송된 < SBS 스페셜> '미투, 나는 말한다' 편에 등장한 이토 시오리씨는 일본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4일 방송된 < SBS 스페셜> '미투, 나는 말한다' 편에 등장한 이토 시오리씨는 일본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 SBS


"제가 겪었던 안 좋은 일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16년. 강산이 한 바퀴하고도 반이 더 바뀌는 세월이다. 테니스를 좋아하던 열한 살 꼬마는 스물일곱 살의 어른으로 자랐다. 김은희씨는 16년 만에 용기를 내 카메라 앞에 섰다. 조명 앞에 혼자 앉은 그는 담담하게 말한다.

"제가 겪었던 안 좋은 일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4일 오후 11시, SBS 스페셜 <#미투(Me Too) 나는 말한다> 편이 방영됐다. 이날 방송은 지난해 말 미국에서 시작돼, 최근 서지현 검사의 증언으로 한국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는 #MeToo 캠페인에 대해 다뤘다. 한국과 일본, 20대와 50대를 넘나드는 다양한 성폭력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지난 2016년 김은희씨는 어린 시절 자신을 성폭행 한 코치를 법정에 세웠다. 초등학교 테니스부 주장이었던 은희씨는 2001년, 학교 코치에게 반복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 코치는 만 열 살이었던 은희 씨에게 '이건 죽을 때까지 너와 나만 아는 비밀'이라고 협박했다. 아무도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은희씨는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끔찍한 기억을 잊고 살아가던 어느 날, 은희씨는 한 테니스 대회에서 가해자를 마주쳤다.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고 은희씨는 표현한다. 큰 충격을 받아 사흘간은 기억도 잃었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냈다. 가해자가 여전히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2, 제3의 김은희가 나와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재판을 결심했다.

With You, 여성들의 연대

 4일 방송된 < SBS 스페셜>에서 김은희씨는 15년 만에 가해자를 법정에 세우며 "제2의 김은희가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재판을 결심했다고 고백했다.

4일 방송된 < SBS 스페셜>에서 김은희씨는 15년 만에 가해자를 법정에 세우며 "제2의 김은희가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재판을 결심했다고 고백했다. ⓒ SBS


십수 년이 지나 현실적으로 어려운 싸움이었지만, 은희씨는 절박한 마음으로 발로 뛰며 증거를 모았다. 어린 시절 함께 테니스를 했던 동료 여성들의 증언이 큰 도움이 됐다.

"은희 언니가 코치에게 자주 불려갔는데, 그때마다 배가 너무 아프다고 했다."
"이불에 피가 묻어 있었는데 코치는 장난치다가 다친 거라고 했다. 그런데 은희 언니는 울고 있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작년 10월, 코치는 아동 성폭행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가해자는 범행 사실을 부인하고 있고,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은희씨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시 용기를 내 선후배 여성 체육인이 모인 행사에서 피해를 증언했다. 말하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선배 체육인들은 울먹이며 "겁나서 나오지 못한 다른 피해자들이 나올 수 있는 초석이 될 것"이라며 감사를 전했다.

성폭력 예방 전문 강사인 손경이씨는 자신도 '성폭력 생존자'라고 증언한다. 지금은 강단에 서서 성폭력에 대한 교육을 하는 전문가지만, 처음부터 당당하게 용기를 낸 것은 아니었다. 피해자에게 돌아올 비난이 두려워 성폭력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15년이 지난 후에야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주최하는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에 설 수 있었다. "내 잘못이 아니다"라는 당연한 사실을, 사람들 앞에 서서 말하고 나서야 실감했다고 한다.

손경이씨는 '피해자들이 말을 하지 못하는 건 사람들이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비난할 사람만 없다면 피해자들은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내가 겪은 일이 너무나 억울하기 때문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김혜정 부소장은 "피해자에게 수치심, 부끄러움, 고통을 강요하는 문화가 있고, 이를 주변인의 입을 통해 반복적으로 듣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말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전한다. 결국, 피해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들을 준비가 된 사람들, 안전한 공간이다.

"안 되면 더 크게 말하겠다"

 < SBS 스페셜> '미투 나는 말한다' 편에 출연한 성폭력 예방 강사 손경이씨는 자신도 성폭행 피해자였다고 밝혔다.

< SBS 스페셜> '미투 나는 말한다' 편에 출연한 성폭력 예방 강사 손경이씨는 자신도 성폭행 피해자였다고 밝혔다. ⓒ SBS


안전한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건이 있다. 이토 시오리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구하던 무렵, 취업과 관련된 미팅인 줄 알고 나간 자리에서 한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가해자는 일본의 대형 방송사 간부. 아베 총리 전담 기자로 활동할 정도로 명예와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시오리씨는 '이름 없는 피해자'가 아니라 실존하며 말할 수 있는 인간임을 드러내기 위해 이름과 얼굴을 공개했다. 당시 시오리씨의 사건을 취재한 기자는 "일본 사회에서는 실명을 밝히면서 고발하는 경우가 잘 없었다. 아주 드문 일이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라고 설명한다.

일본 사회는 피해자에게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경찰 조사에서는 시오리씨를 바닥에 누우라고 한 뒤 인형으로 가해자가 어떤 자세를 취했는지를 표시하게 했다. 그는 '2차 피해'를 당하는 기분이었다고 말한다. 언론 또한 시오리씨의 사건을 흥미 위주로 다뤘다. 한 언론에서는 기자회견에서의 옷차림을 두고 '셔츠 단추를 풀어헤친 시오리씨'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름을 알리려는 의도', '꽃뱀'이라고 몰아가기도 했다.

시오리씨는 포기하지 않고 더 크게 말하기로 결심한다. 이번에는 책을 내고, '일본의 법과 사회는 피해자를 위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전 세계적으로 고발한다. 뉴욕타임스와 BBC는 "그녀는 성폭행에 침묵하는 일본을 일깨웠다"고 보도했다.

시오리씨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났고, 자신도 피해자라고 밝히는 이들이 생겼다. 일본에서는 고무적인 일이었다.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지자 언론도 기획 기사를 냈고, 성폭행 피해자를 지원하는 법안도 진행 중이다. 시오리씨가 피해자를 숨기기 급급한 일본 사회를 조금이나마 진전시킨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

 이토 시오리씨는 "바로 지금 말함으로써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시오리씨의 고백 이후 자신도 피해자라고 밝히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토 시오리씨는 "바로 지금 말함으로써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시오리씨의 고백 이후 자신도 피해자라고 밝히는 사람들이 생겼다. ⓒ SBS


성폭력 피해자들은 '말하기는 치유의 시작'이라고 입을 모은다. 큰 스케치북에 하고 싶은 말을 적은 한 피해 여성은 "내가 여기 있다. 나 아직 잘 살아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큰 걸음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성폭력을 겪고도 '생존'했다는 것, 그 자체가 다른 생존자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은희씨, 손경이씨, 이토 시오리씨는 피해자에 대한 사회의 편견을 딛고 사람들 앞에 섰다.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MeToo' 해시태그를 달고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고 있다. 이들의 증언은 피해자를 침묵하게 하는, 단단하고 오래된 구조에 균열을 내고 있다.

김은희씨는 "그 때, 내가 힘들고 불편하다고 주변에 힌트를 던질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작은 행동을 왜 못했을까 후회가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부터 시작될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증언은, 아직 나서지 못한 다른 피해자들의 용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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