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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빼어난 구도소설(求道小說) ‘만다라’를 집필한 소설가 김성동이 이차돈과 법흥왕, 신라의 불교 공인 과정 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빼어난 구도소설(求道小說) ‘만다라’를 집필한 소설가 김성동이 이차돈과 법흥왕, 신라의 불교 공인 과정 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 구창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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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이차돈의 삶은 짧았지만 역사적 의미가 크고 극적인 요소도 충분하다. 그럼에도 그에 관한 연구서나 문학작품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신라의 불교 공인'이라는 신념을 위해 목숨을 버린 이 '젊은 순교자'에 관한 이야기를 누가 깊이 있게 들려줄 수 있을까? 그때 떠오른 것이 소설가 김성동(71)이다.

문학평론가들에게 "한국 작가 중 가장 미려하고 유장한 문장을 쓰는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김성동은 불교적 세계관을 토대로 인간의 본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를 작품에 담아내온 작가다. 또한, 그는 19세부터 29세까지 청춘의 한 시절을 지효대선사(智曉大禪師) 문하에서 승려로 살기도 했다.

<만다라>, <집>, <길> 등의 소설을 통해 불교와 존재의 근원을 탐구해온 김성동을 경기도 양평 자택에서 만났다. 검은 머리칼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백발의 원로작가는 우리 일행을 스님처럼 합장배례(合掌拜禮)하며 맞았다.

아래는 6세기 신라사회의 종교인 동시에 정치 이데올로기였던 불교와 이차돈, 그리고 법흥왕에 관해 김성동과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인터뷰에서 김 작가는 "향후 이차돈을 소재로 소설을 쓸 수도 있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이차돈은 '법흥왕 프로젝트'의 희생양

- 법흥왕이 통치하던 527년 이차돈이 순교했다. 그 후 귀족들과의 논쟁과 논란을 거쳐 신라사회는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제반의 과정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통상은 고구려를 통해서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불교의 근본 원리는 아래로부터 위까지를 포괄하는 평등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회적 평등이다. '모든 것들은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하지만 당시 신라는 계급사회였다. 신라에 불교가 유입되기 전에도 천경림(天鏡林·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겼던 숲)이 있었고, 종교와 유사한 '믿음 체계'는 존재했다. 신라 사람들이 봤을 때 불교는 낯선 외래 종교였다.

어느 사회건 지배계급은 사회적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거부하는 특성이 있다. 신라의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법흥왕은 그런 귀족을 제압하고 자신 앞으로 권력을 집중시킬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정치적 지배 체제의 혁신적 변화 필요성'이다.

나는 법흥왕이 주도한 혁신 프로젝트의 희생양이 이차돈이라고 본다. '목을 베었을 때 붉은 피가 아닌 흰 젖이 솟았다'는 것은 당시 신라인들에게 "이처럼 기적까지 일으키는 종교가 바로 불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상징 조작'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 법흥왕은 신라가 '중앙집권적 왕조국가'로 가는 길을 닦았다고 평가받는다. 그 과정에서 '이차돈의 순교'라는 사건이 있었다. 중앙집권적 왕조국가의 건설과 불교의 공인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는가?
"자신의 통치시스템을 공고히 할 지배이념으로서 불교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기존에 존재하는 토착적 믿음 체계가 아닌 왕조국가에 적합한 국민을 만들어내고 이들을 단합시킬 또 다른 이데올로기가 절실했을 것이다.

법흥왕이 지배하던 6세기 신라에는 새로운 사상과 종교가 유입되고 있었고, 기존의 지배 체제로는 자신의 큰 계획을 진행해 나갈 수가 없었다. 이게 법흥왕이 불교의 공인을 간구했던 이유일 것이다."

김성동은 인간의 본질과 함께 역사의 빛과 그림자를 더듬어온 작가다. 현대불교문학상, 이태준문학상, 소설문학 작품상, 한국문학 신인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김성동은 인간의 본질과 함께 역사의 빛과 그림자를 더듬어온 작가다. 현대불교문학상, 이태준문학상, 소설문학 작품상, 한국문학 신인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 구창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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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차돈은 순교 당시 나이가 21세에 불과했다. 불교의 교리를 이 나이에 온전히 이해한다는 게 가능한가?

"그렇게 단순하게 볼 문제가 아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차돈은 법흥왕이 꿈꾼 '정치 프로그램'의 희생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법흥왕에겐 그 희생양이 이차돈이어도 되고, 다른 사람이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이차돈의 순교'란 개인의 종교적 각성에 의한 죽음이 아닌 당대의 통치시스템 구축 과정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

- 이차돈과 법흥왕이 살던 시대의 신라 귀족 대부분이 토착의 믿음 체계를 신뢰했다. 불교와 이 '믿음 체계'의 차이점은 뭔가?
"'화백제도'란 게 있다. 지배계급이 모인 일종의 최고 회의기구다. 여기서는 만장일치를 통해 나랏일을 결정했다. 비단 신라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은 이와 유사한 시스템을 도입해 활용했다. '화백'이란 단어는 "고루 평등한 삶을 지향한다"는 뜻의 '고루살이'와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이 화백제도로는 왕이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 시스템 축조가 불가능했다. 신라의 불교 공인은 바로 이 화백제도와 새로운 정치구조의 필요성이 충돌한 결과라도 봐도 무방하다. 물론, 이 싸움에선 법흥왕과 이차돈이 승리했다."

-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이차돈의 삶은 극적이다.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차돈을 다룬 문학작품은 거의 없다. 겨우 떠오르는 건 춘원 이광수의 <이차돈의 사(死)> 정도다. 어째서 그럴까?
"(웃음) 작가들을 질책하는 말로 들린다. 물론, 이차돈의 생은 드라마틱 그 자체다. 하지만 너무 빤한 소재다. 당대 신라의 정치·사회적 흐름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다지 큰 매력을 느끼기가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이나 시는 역사책과는 또 다르다. 뭔가 독자들을 매혹할 '새롭고 독특한 것'을 끌어내야 한다. 그러기엔 이차돈이 가진 문학적 소재로서의 힘은 그렇게 크지 않다."

"6세기 신라 역사와 불교 이야기 담은 소설 쓸 수도"

- 혹시 이차돈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쓸 생각은 없는가? 만약 집필하게 된다면 어떤 부분에 방점을 찍어 쓰고 싶은지.
"어려운 숙제를 요구받는 느낌이다. 소설가는 어떤 소재로도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다. 그렇기에 나 역시 이차돈을 소재로 소설을 쓸 수 있다. 만약 쓰게 된다면 지금보다 깊은 차원의 학습과 취재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이광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쓰면 어떨까 싶다.

이차돈의 개인적 고통과 구구절절한 사연을 서술하고, 개인적 희생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방식은 아닌 듯하다. 6세기 신라의 역사와 정치 이데올로기로서의 불교, 지배계급의 대립을 불러온 사회적 변화 과정 등을 담아내야 제대로 된 소설이 되지 않을까. 건강과 시간이 허락한다면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

- 불교가 종교인 동시에 정치 이데올로기였던 것이 6세기 중반 이후 신라사회다. 법흥왕에겐 왜 정치 이데올로기로서의 불교가 필요했던 것일까?
"고대 인도에서 가장 존경받았던 존재 중 하나가 전륜성왕(轉輪聖王)이다. 신화에 등장하는 전륜성왕은 '이상적 통치자'의 전형이라 불린다. 이때까지 존재해온 모든 왕, 즉 지배자들은 전륜성왕을 벤치마킹하고자 했다. 왜냐? 자신이 신(神)과 동격이 돼 절대적 통치권을 행사하고 싶었으니까.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려 했던 것도 결국은 이 때문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법흥왕에겐 당대 신라사회를 한 손에 쥐고 흔들 무소불위의 '신왕(神王)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토착의 믿음 체계를 넘어서는."

- 불교는 대중에게 쉽게 전파되고, 그들을 결속할 힘이 있는 종교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인가?
"정토(淨土·부처가 사는 깨끗한 세계)란 게 있고, 정토사상이란 게 있다. 이걸 간단히 설명하면 현실세계는 추악하고 불합리하지만 자신이 노력만 하면 인간은 세상 어떤 것도 될 수 있고, 궁극에는 정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의 괴로움은 네가 전생에 저지른 업 탓이니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불교를 믿음으로써 그 업을 씻고 전혀 다른 존재로 태어나라. 그러면 너희도 정토로 갈 수 있다'는 말은 6세기 신라 사람들에게 분명 매력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세상 모든 문제를 사회적 조건을 바꾸는 것이 아닌, 개인의 능력만으로 해결하라고 해서야 되겠는가? 이건 책임 전가에 가깝다. 신라의 지배계급만이 아니라 현재 한국의 정치인들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항상 경계해야 한다."

소설가 김성동이 서재 겸 거실로 사용하는 공간. 그는 붓글씨를 쓰며 마음을 다스린다. 2011년에는 ‘김성동 서예전 한묵청연(翰墨淸緣)’이 서울 경운동에서 열렸다.
 소설가 김성동이 서재 겸 거실로 사용하는 공간. 그는 붓글씨를 쓰며 마음을 다스린다. 2011년에는 ‘김성동 서예전 한묵청연(翰墨淸緣)’이 서울 경운동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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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 한때 승려 생활을 했다. 이차돈에게 동질감을 느낄 것도 같다. 당신이 보기에 이차돈은 어떤 인물인가? 그의 매력은 무엇이고, 또 한계는 무엇인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에서 당대 신라사회에 적지 않은 긍정적 영향력을 끼쳤다는 건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자기희생을 통해 숭배에 이르는 것이 유일한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물론, 그로서는 법흥왕의 '순교 제의'를 거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차돈은 법흥왕이 주도한 '불교 공인 프로젝트'의 조력자 역할을 했을 뿐이란 게 내 생각이다.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영화로 비유하자면 이차돈의 배역은 '작은 나사못 하나' 정도가 아니었을까."

- 현재의 불교가 혁신적 자기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선 어떤 게 선결돼야 할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떤 종교나 마찬가지다.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종교가 지닌 오늘의 의미와 현재성에 눈을 돌려야 한다. 사실 이차돈이 순교했던 1500년 전과 지금의 불교는 별로 바뀐 게 없다. 종교가 단순히 개인의 복을 비는 차원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나에 대해 알아가고자 하는 노력이 없다면 불교의 혁신과 불교를 통한 사회발전은 요원하다.

비단 불교계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나는 무엇이고, 어떤 걸 위해 살 것인가'라는 존재론적 고민을 해야 한다. 개인의 삶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 삶이 사회적 삶으로 진화하고, 사회적 삶이 역사적 삶으로 지평을 넓혀가야 한다. 그걸 깨닫고 나서 불교와 부처, 이차돈과 법흥왕을 이야기해도 늦지 않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에 게재된 내용을 일부 보완한 것입니다.



태그:#이차돈, #김성동, #법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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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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