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살인의 추억> 중 한 장면.

영화 <살인의 추억> 중 한 장면. ⓒ 싸이더스


한국에서 만들어진 스릴러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무엇인가 물으면 나는 <살인의 추억>을 뽑곤 한다. 영화 자체의 만듦새가 매우 훌륭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최근의 한국 영화가 보이는 경향과 달리 이 작품에는 자극적인 범죄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음을 짐작만 할 수 있게끔 간접적으로 묘사될 뿐이다.

나는 특히 성폭력이나 여성 대상 강력 범죄처럼 실제로 사회적 문제로 지적되며 피해자층이 한정적인 범죄를 묘사할 때에 이런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겐 현실적인 공포이자 고통인 일이 단지 관객들을 말초적으로 자극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사자가 영화를 보고 얻게 될 충격도 감안해야 한다. 이건 극히 윤리적인 문제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영화 <살인의 추억>과 관련한 인터뷰를 살펴보면 봉준호 감독은 '실제 사건을 다루었기에 부담이 많았다'고 자주 이야기한다. 그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실화여서가 아니라 피해자의 가족들, 용의자로 몰려 고생했던 사람들, 당시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들에게 고통을 줄 것을 우려한 것이다. 이 때문에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기 전부터 포기할 생각도 한 적이 있다니 그의 말이 립서비스만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이는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나는 봉준호 감독이 보여준 모습이 창작자라면 당연히 보여야 할 윤리적 태도라고 생각한다. 이는 영화감독뿐 아니라 정상적인 사회인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춰야할 소양이기도 하다. 하지만 불행히도 세상에는 이를 가진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욱 많은 것 같다.

기안84의 '닉네임 설명' 글이 문제인 이유

최근 뜬금없이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었다. 바로 웹툰 작가 기안84 때문이다. 지난 2011년 그가 자신의 블로그에 기안84의 의미를 설명하며 '논두렁이 아름답고 여자들이 실종되는 도시, 화성시 기안동에 살던 84년생'이라고 말한 게 논란이 된 것이다.

 지난 2011년 8월 1일 기안84의 블로그에 게시된 글.

지난 2011년 8월 1일 기안84의 블로그에 게시된 글. ⓒ 기안84 블로그


많은 사람들은 이 설명을 두고 '화성에서 실제 발생한 사건을 너무 가볍게 표현했다'는 비판을 제기했다. 한편으론 언제나 그렇듯 '너무 과한 반응이 아니냐'는 반박도 등장했다. 한 언론사는 이 사건을 보도하며 '기안84의 설명을 자신이 살던 동네에 대한 자학적인 블랙 코미디로 읽을 수도 있다'는 네티즌의 의견을 인용하기도 했다. 과연 그럴까. 수긍하기 어렵다. 과거 화성에서 실종된 피해자들이 기안84와 같은 '남성'도 아니고 본인이 그런 위험을 느낀 당사자인 것도 아니었는데 이게 어떻게 자학적인 블랙 코미디가 될 수 있다는 걸까.

가령 다른 누군가가 한 도시의 이름을 자신의 예명으로 삼으며, '그곳에서 발생한 특정 인종이나 계층, 거주민을 대상으로 발생한 강력 범죄 혹은 대형 재난이 이름의 의미'라고 설명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특히나 누가 봐도 사건의 당사자는커녕 영향권의 근처에도 있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 차마 글로 옮기기도 저열해서 굳이 예를 들지는 않겠다. 다만 그런 일이 있었다면 아마 여론의 지탄이 이어졌을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모든 좋지 않은 일에 심각한 태도를 취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너무 가벼운 태도라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적어도 사람이 죽거나 실종돼고, 심지어 이런 일이 연속적으로 발생한 사건 앞에서는 취해야 할 적절한 자세가 있다.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한 태도에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안84의 문제가 드러난다. 그가 닉네임의 배경으로 삼은 시점의 도시에서 많은 여성들이 실종되고 죽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무덤덤하게 말한다. 게다가 자기 이름의 의미로 삼았다고 글로 설명하기도 했다. 과연 이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정상적인 상황일까?

남성들의 공감 능력 부재가 만든 인식

도대체 왜 이런 상황이 발생했을까. 이전에는 '남성들의 무지가 원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한국은 여성 대상 강력 범죄가 매우 심각한 곳이다. 하루 혹은 이틀 단위로 여성이 살해되거나 실종되거나 폭행을 당했다는 뉴스가 끊이지 않는다. 나는 남성들이 당사자가 아니기에 이런 현실을 잘 모르고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그런 사건들을 언급하거나 혹은 농담으로 소비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틀렸다. 남자들은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흔히 자기 주변의 여성들에게 일찍 집으로 돌아올 것을 종용하거나 옷차림을 통제하곤 한다. 즉 일상적으로 위험이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과 관계가 없는 익명의 여성에게 향한다면? 그건 너무 쉽게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 되고 만다. 그래서 남자들은 자기 딸들의 '통금 시간'을 정해두지만, 동시에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전혀 안전하지도 평등하지도 않은 공간이라는 주장에는 '호들갑'이라고 쉽게 대응하기도 한다.

 <뭔들투어> 중 한 장면

<뭔들투어> 중 한 장면 ⓒ UMAX


한마디로 문제의 핵심은 '기본적인 공감 능력의 부재'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의 많은 남성들은 특히 여성에 대해서만 제대로 된 감정 이입이나 이해를 보이지 못한다. 기안84의 경우를 제외하고도 사례는 차고 넘친다. 일례로 방송인 강남은 과거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함께 출연한 여성 가수 경리가 자신의 농담을 받아주지 않자 "내가 언젠가 한국에서 (너를) 때린다"라고 발언해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심지어 스튜디오에서는 또다시 "죽도록 패라고 한다면 팰 수 있다"는 멘트까지 했다.

죽도록 맞는 게 아니라, 맞다 죽는 여성들의 소식이 하루가 다르게 기사로 전해지는 곳에서 함께 출연한 여성 연예인에게 '때리겠다'는 말하다는 게 어떻게 유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특히 여성에게 어떤 곳인지를 무시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가능한 일이다. 안다고 해도 신경을 쓰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 그게 정말 괜찮은 태도일까?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요구한다

 MBC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한 웹툰 작가 '기안84'

MBC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한 웹툰 작가 '기안84' ⓒ MBC


여성 혐오는 단순하게 여성을 비하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성을 대상화·타자화하고 대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으며 그래서 멸시를 드러내거나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 바로 여성 혐오다. 기안84를 둘러싼 논란이 벌어진 이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언행이 '여성 혐오적'이라 지적했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아무 데나 혐오를 갖다 붙이냐'는 비아냥도 있었다. 하지만 특정 성별을 지닌 이들의 죽음을 무감각하게 다룰 정도로 대상화하고, 그래서 다른 강력 범죄나 사회적 재난의 희생자들에게처럼 인간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게 혐오가 아니면 도대체 무엇일까. 그런 점에서 나는 이번 사건에서 여성 혐오를 읽어낸 사람들의 판단에 동의한다.

개인적으로 엄숙주의나 도덕주의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 사회에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나 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기초적인 교양조차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그런 점에서 기안84에 대한 하차 요구도 충분히 이해된다. 여성들이 연쇄살인의 대상이 된 도시를 두고 가볍게 닉네임으로 삼았다는 비판도 마찬가지다. 이런 언행을 한 사람이 방송에 버젓이 나와 돌아다니는 것은, 일단 불쾌한 것은 둘째 치고 사회적으로 그다지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 같지도 않다.

하다못해 끔찍한 의미를 담았다는 지적에 활동명을 바꿀 것도 아니지 않는가. 이전에도 기안84는 본인의 웹툰에 여성 혐오적 표현을 사용했다는 지적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인내의 한계를 넘어도 심각하게 넘었다. 진솔한 반성과 사과 없이 유야무야 넘어가는 일이 또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의 말은 결코 아무런 문제 없이 지나갈 종류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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