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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덕분에 이제는 젊은 세대도 간접 경험을 하게 된 1987년. '88 서울 올림픽'을 1년 앞둔 당시, 국내 정세는 불안했다.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던 그때 외국에서는 대한민국이 올림픽을 제대로 치를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선도 있었지만 우리는 냉철하고 현명했다. 그리고 뜨거웠다.

 휘트니 휴스턴의 < Whitney >는 1987년 6월 발표돼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휘트니 휴스턴의 < Whitney >는 1987년 6월 발표돼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 소니뮤직


공화당의 레이건 대통령이 임기를 1년 남겨둔 미국에서는 대중적인 음악과 사회적 문제를 직시하는 노래 모두 주목받으며 균형을 맞추었다. 데뷔앨범으로 스타덤에 오른 휘트니 휴스턴의 두 번째 앨범 < Whitney >가 6월 초에 발매되어 그 인기가 폭발했다. 당시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를 천명한 6.29 선언을 발표했을 때 빌보드 싱글차트 1위곡이 휘트니 휴스턴의 'I wanna dance with somebody'였다.

이 노래 외에도 3곡이 연달아 넘버원에 오르면서 마돈나, 자넷 잭슨과 함께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했다. 음악 스타일은 다르지만 마돈나와 자젯 잭슨은 1986년에 발표한 < True Blue >와 < Control >이 1987년까지 그 여세를 몰아 빌보드 차트를 누볐고 특히 마돈나는 세 번째 영화 출연작 < Whos That Girl >의 삽입곡 'Who's that girl'로 연타석 홈런을 기록했다.

 유투의 < Joshua Tree >는 1987년 가장 중요한 음반으로 꼽을 만하다.

유투의 < Joshua Tree >는 1987년 가장 중요한 음반으로 꼽을 만하다. ⓒ 유니버설뮤직


1987년에 가장 중요한 음반은 미국을 성토한 유투의 < Joshua Tree >다. 우리나라에서는 금지곡으로 묶였던 'Bullet the blue sky', 'Running to stand still', 'In God's country', 'Red hill mining town'은 바로 애증의 대상인 초강대국 미국에 대한 일갈이자 충고였음에도 그래미는 이들에게 올해의 앨범과 올해의 그룹 부문 트로피를 선사해 미국의 관대함을 자랑했고 국내에서는 빌보드 정상을 차지한 'With or without you'와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 덕분에 뒤늦게 유투의 이름이 자리를 잡았다.

유투처럼 사회의식을 담은 노래는 또 있었다. 가녀린 여성 싱어송라이터 수잔 베가의 'Luka'는 아동학대라는 무거운 주제를 경쾌한 멜로디에 실어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갔고 1980년대 후반에 등장한 트레이시 채프먼, 사라 맥라클란, 타니타 티카람, 에디 브릭켈 같은 여성 싱어 송라이터에게 용기를 주었다.

 조지 마이클의 < Faith >는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고 1989년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했다.

조지 마이클의 < Faith >는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고 1989년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했다. ⓒ 소니뮤직


1987년 8월에 공개된 마이클 잭슨의 < Bad >와 10월에 발표된 조지 마이클의 < Faith >, '두 마이클'의 대결 역시 초미의 관심사였다. 불과 1년 전에 스파크를 냈던 마돈나와 신디 로퍼의 'True 대결'보다 이들의 경쟁은 더 거대했고 오래 지속되었다.

5곡의 넘버원과 1곡의 탑 텐을 탄생시킨 마이클 잭슨의 < Bad >, 4곡의 1위곡과 2곡의 탑 텐을 배출한 조지 마이클의 < Faith >는 해를 넘겨 1988년까지 히트 퍼레이드를 이어갔고 1989년도 그래미는 조지 마이클을 선택했다.

1987년은 팝메탈의 본격적인 중흥기를 알린 해이기도 하다. 1년 전에 발표된 본 조비의 < Slippery When Wet >의 두 번째 싱글 'Livin' on a prayer'가 4주간 정상을 차지했고 이들의 잘 생긴 외모는 여성들이 본격적으로 메탈에 관심을 갖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

차트 정상을 차지한 화이트스네이크의 'Here I go again', 교통사고로 오른팔을 잃은 드러머 릭 알렌과 함께 새로운 음반을 제작해 뜨거운 응원의 박수를 받은 데프 레파드의 앨범 < Hysteria >도 1987년을 빛낸 헤비메탈 앨범이었다. 또한 백인 힙합 트리오 비스티 보이스의 < Licensed To Ill >과 엘엘쿨제이의 <Bigger And Deffer >, 퍼블릭 에네미의 < Yo! Bum Rush The Show >는 곧 도래할 힙합의 전성기를 예고하는 걸작이다.

그래도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음악은 유로댄스였다. 모던 토킹, 런던 보이스 그리고 조이로 대표되는 유로댄스는 10대와 20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거대한 인기의 회전축을 형성했고 그 진원지인 롤라장과 나이트클럽을 포함해 라디오와 음반 매장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당시 유명한 유로댄스 그룹이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내한공연이 예정됐지만 그 학교 재학생들이 '서구의 대중음악이 우리 학교에서 노래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반대해 결국 내한공연은 무산됐다. 이렇듯 1987년은 뜨거운 이성이 지배한 그런 해였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대중음악웹진 이즘(www.izm.co.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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