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서 베트남 축구 대표팀 신임 감독이 지난 11일(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의 베트남 축구협회에서 정식 감독계약 체결식을 가진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 감독은 이날 회견에서 "베트남 축구대표팀을 동남아시아 정상, 아시아 정상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박항서 베트남 축구 대표팀 신임 감독이 지난 2017년 10월 11일(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의 베트남 축구협회에서 정식 감독계약 체결식을 가진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 감독은 이날 회견에서 "베트남 축구대표팀을 동남아시아 정상, 아시아 정상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 연합뉴스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대표팀이 최근 중국 장쑤에서 열리는 아시아축구연맹(AFC) U-23(23세 이하) 챔피언십 8강전에서 4강 진출에 성공하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베트남은 이라크와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5-3으로 승리하며 감격의 준결승행을 이뤄냈다. 베트남은 물론이고 동남아시아 국가가 이 대회 4강에 오른 것은 이번이 최초다.

국제축구연맹(FIFA) 1월 랭킹이 112위였던 베트남은 축구 인기는 뜨겁지만 실력은 그리 뛰어나지 못하여 아시아 무대에서조차 오랫동안 변방에만 머물러 왔다. 베트남은 지난해 10월 박항서 감독을 전격 영입하며 23세 이하와 성인대표팀 지휘봉을 한꺼번에 맡겼다. 지도자 데뷔 이후 주로 국내 무대에서만 활약해왔던 박항서 감독에게 외국팀의 지휘봉을 잡는다는 것은 일생일대의 새로운 도전이었다.

'베트남 히딩크' 박항서 감독의 파격이 만들어낸 변화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의 지휘봉을 잡은 지 불과 3개월도 안 되어 출전한 이번 U-23 챔피어십에서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리고 있다. 이미 지난 12월 M-150컵에서 10년 만에 라이벌 태국을 격파하며 3위에 올라 가능성을 보여줬던 박항서호는 U-23 챔피언십에서는 호주와 이라크 등 아시아 축구의 강호들을 잇달아 제압하며 일약 돌풍의 중심에 섰다. 조별리그에서 만난 한국을 상대로도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선제골을 넣는 등 좋은 경기력으로 김봉길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도 했다. 아무도 예상하지못한 베트남의 선전에 아시아 축구계도 놀랐고 박항서 감독을 '베트남판 히딩크'로 묘사하는 등 극찬이 이어지고 있다.

박항서 감독은 2002 한일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을 보좌하는 대표팀 코치로 4강신화에 기여하면서 축구팬들에게 이름을 알린 인물 중 하나다. 하지만 이후 감독으로서의 행보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으며 감독으로 첫 데뷔했지만 준결승에서 이란에 승부차기로 패하며 한일월드컵의 후광으로 눈높이가 엄청나게 높아져 있던 팬들의 비난을 한몸에 받아야 했다.

이후로는 프로무대에서 2005년 경남FC의 지휘봉을 잡은 것을 시작으로 전남 드래곤즈-상주 상무-창원시청의 감독을 거치며 주로 규모가 작은 지방의 중소클럽 전문 감독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수도권의 대기업 구단들처럼 지원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주어진 선수단을 데리고 일정 수준 이상의 전력을 만들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지만 거기까지가 곧 한계이기도 했다. 팀 사정상 우승권과는 늘 거리가 멀었고 재정과 팀 운영이 불안정한 팀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사임하는 패턴도 반복됐다.

박 감독이 베트남의 사령탑으로 선임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만 해도 팬들의 반응은 대체로 시큰둥했다. 국내 팬들은 K리그에서 그다지 큰 족적을 남기지 못한 데다 나이도 어느덧 60대를 바라보는 박 감독이 변방으로 취급받던 베트남행을 선택한 것을 두고 지도자 생활 말년의 외유 정도로 평가절하했고, 베트남은 베트남 팬들대로 "한국에서도 고작 2~3부리그 수준의 감독을 데려와서 뭘 배울 수 있겠냐"며 불만 어린 시선으로 보는 팬들도 많았다.

하지만 3개월 사이에 이런 평가는 완전히 역전됐다. 4강행이 확정된 이후 베트남은 거리가 일제히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고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의 '축구영웅'으로 위상이 급상승했다. 베트남 총리까지 박항서 감독에게 직접 축전을 보내며 격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야말로 베트남 내에서 박 감독은 히딩크 부럽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타이밍도 좋았다. 이번 베트남 23세 이하 대표팀은 자국에서 일찌감치 '황금세대'로 평가받으며 많은 기대를 모았던 선수들이다. 이벤트 경기이기는 했지만 지난해 K리그 올스타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한국축구를 깜짝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23세 이하지만 A대표팀 경험이 있는 선수들이 전체의 2/3에 이르며, 2016 AFC U-19 챔피언십 4강 멤버들도 일부 합류해 있다. 물론 아직 선수 개개인의 능력은 아시아 정상권 국가들과 비교할 수 없지만 최소한 자국의 이전 세대들도 비교하면 크게 성장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기에 박항서 감독의 노련한 지도력과 한국축구 특유의 압박전술이 가미되어 한 단계 진화했다는 평가다.

박항서 감독의 성공이 한국 축구계에 던진 교훈

국내 팬들 입장에서는 김봉길호의 부진과 대비되며 감정이 미묘할 수밖에 없다. 김봉길 감독이 이끄는 한국 23세 이하 대표팀도 역시 4강에 진출했지만 정작 경기를 거듭하면서도 개선되지 않는 불안한 경기력에 팬들의 불만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박항서 감독을 영입하며 불과 3개월 만에 눈에 띄게 향상된 모습을 보여준 베트남과 달리,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지휘봉을 잡은 김봉길 감독(사령탑 취임은 김 감독이 2주 정도 더 빨랐다)은 지도력을 놓고 '무색무취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팬들의 비판을 받고 있다. 물론 베트남과 한국축구대표팀에 거는 기대치가 애초에 다르다는 것을 감안해도 걱정스러운 부분이다.

박항서 감독의 성공은 국내 축구계에도 많은 교훈을 남긴다. 박 감독처럼 폭넓은 경험과 경력을 갖춘 인재들이 좁은 국내 축구계에서 충분한 기회를 얻지 못하고 일찍 묻히는 경우가 많다. 선수뿐 아니라 지도자들 역시 국내에서만 경쟁할 게 아니라 해외무대에서 도전하고 다양한 축구를 교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장수 전 창춘 야타이 감독, 윤정환 세레소 오사카 감독, 김판곤 전 홍콩 감독(현 국가대표 선임위원장) 등의 성공사례는 한국 지도자들의 리더십이 해외무대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한국축구도 다양한 스타일의 외국인 감독에게 문호를 열어야 할 필요성이다. 한국축구는 지난해 울리 슈틸리케 대표팀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경질됐고 K리그에서는 대구FC의 안드레 산투스 감독을 제외하면 외국인 감독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됐다.

국내 지도자들의 역량이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되면 다양한 스타일의 축구를 구현하기가 어려워진다. 이웃인 일본이나 중국만 하더라도 여러 명의 외국인 감독들이 활발하게 활약하고 있다. '그 밥에 그 나물', '회전문 인사'라는 비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축구계에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의 성공이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오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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