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서울극장에서 서울대생들이 선배들의 초청으로 <1987>을 관람함 후 당시 주역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김학민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 이부영 전 의원, 한재동 전 교도관

19일 서울극장에서 서울대생들이 선배들의 초청으로 <1987>을 관람함 후 당시 주역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김학민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 이부영 전 의원, 한재동 전 교도관 ⓒ 성하훈


"서울대 나온 대표적 인물이 김기춘과 우병우다.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겠다. 그런 사람이 서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한다. 전두환 정권을 떠받치던 게 육법당이었다. 육사와 서울대 법대라는 말인데, 앞으로는 그런 것이 역사에서 지워지도록 하자."

영화 <1987>을 서울대 후배들과 함께 관람한 이부영 전 의원의 당부에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19일 저녁 종로 서울극장에서의 <1987> 상영은 특별했다. 서울대생 박종철 열사의 선후배들이 함께 영화를 보고 '영화와 현실'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1987년 서울대를 다녔던 선배들이 서울대 재학생인 후배들을 초청한 자리여서 눈길을 끌었다.

이날 상영에는 1987년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를 밝혀내는 데 큰 역할을 한 이부영 전 국회의원과 영화 속 교도관의 실제인물인 한재동 전 교도관, 김학민 이한열 기념사업회 이사장 등이 함께 해 당시를 회상하고 늦은시간까지 학생들과 대화를 나눴다. 영화 상영 직후에는 박종철 열사의 형인 박종부씨와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인 배은심 여사가 극장을 찾아준 학생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박종부씨는 "영화가 재밌었죠"라고 물은 뒤 "남영동 대공분실이 시민에게 돌려져야 한다"며 "인권기념관이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인 배은심 여사는 "영화를 안 보는 게 아니고 못 보는 것"이라며 "한열이가 좀 예쁜 얼굴로 영화에 나온다면 제가 제일 앞 의자에 앉아 있었을 거"라고 안타까운 모정을 내비쳤다.

배 여사는 "6월이 되면 연세대에 한열이 사진이 크게 걸리는데 보기 힘들다"며 "언제쯤 그냥 사진으로 볼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30년을 살았다"고 말했다. 이어 "강동원 배우가 열심히 했다고 하는데도 못 본다"면서 "영화를 통해 박종철, 이한열 우리 열사들 훌륭한 사람으로 생각해주면 고맙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전화위복

 19일 저녁 종로 서울극장에서 <1987> 상영 직후 영화 제작 동기 등을 설명하고 있는 김경찬 작가(오른쪽)

19일 저녁 종로 서울극장에서 <1987> 상영 직후 영화 제작 동기 등을 설명하고 있는 김경찬 작가(오른쪽) ⓒ 성하훈


시나리오를 쓴 김경찬 작가도 참석해 시니리오를 집필하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 당시 고문치사 사건을 외부로 전한 이부영 전 의원은 1987년 당시의 상황들을 세세하게 전했다. <1987>에서 류해진씨가 연기한 한재동 교도관도 소회를 밝히는 등, 영화 속 실제 주역들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졌다.

김학민 '이한열 열사 기념사업회' 이사장은 "당시 이부영 전 의원이 구속된 게 진실을 밝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면서 당시 상황에 대한 설명을 요청했다. 이부영 전 의원은 "당시 수배 중이었는데, 재야의 중심인물이었던 김정남 선생을 만났다가 김정남 선생은 도망가고 나홀로 잡혔다"며 "그런데 그 때 잡혀서 구속된 게 역설적으로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를 밝히는 데 큰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고문 경찰로 구속된 조한경, 강진규가 이 전 의원과 같은 공간인 영등포 교도소에 수감됐기 때문이다.

이 전 의원은 "당시 구속된 고문경찰들에게서 정작 핵심은 남영동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한재동 교도관이 박처원 대공처장 등이 구속된 고문 경찰관을 찾아 1억원이 든 통장을 보여주고 설득하던 내용을 다 전해줬다"고 말했다.

또 그는 "3월말에 취재를 다 끝냈는데, 어떻게 눈치를 챈 건지 당시 법무부 장관이 영등포 교도소를 다녀간 직후 고문경찰관들이 의정부 교도소로 이감됐다"고 말했다. "교도소 내에서 취재한 사실이 드러나지 않게 알리바이를 맞게 해 준 것이어서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전 의원은 "5월에 공개되기 까지는 마음을 졸였다"며, "현직에 있을 때보다 감옥에 있을 때 특종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18일 사실이 폭로된 이후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고 당시의 기억을 되살렸다. 

이 전 의원은 안유 보안계장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입장을 밝혔다. 안유 보안계장은 시국사건 관련자들에게 가혹행위를 하고 인권탄압을 한 것 때문에 일각에선 나쁜 사람이란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일부 피해자들은 안유 계장을 의인으로 그렸다며 영화 <1987>를 안 보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 전 의원이 "인유 계장에게 훈장이라도 줬으면 한다"는 입장을 밝혀 논란이 있기도 했다. 

이 전 의원은 안유 계장에 대해 "1975년 <동아일보> 강제해직과 국가보안법 사건으로 서울구치소 들어가면서 알게 됐다"고 첫 만남을 설명했다. "80년대에 잡혀 들어가서도 만나게 됐다"며 "(안 계장이) 나를 형으로 불렀다"고도 말했다. 이 전 의원은 안 계장이 중앙정보부 시절 구속된 김지하씨가 감방에서 영하의 추위 속에 거의 죽을 지경이었는데, 일명 '유담포'라 불리는 뜨거운 물을 물통에 넣어 담요에 싸서 주는 특혜를 제공했고, 김지하씨와 가까운 사형수도 몰래 만나게 해줬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시위하다 잡혀온 학생들이 교도소를 시끌벅적하게 했는데, 안 계장이 도움을 요청해 와 학생 앞에 나서기도 했다. 당시 수감 중인 학생들에게 (안 계장이) 악인은 아니니 싸우더라도 조금 덜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때문에 그가 내게 많이 고마워했다. 이후 고문 조작 사실을 듣게 된 뒤 나와 면담한 내용을 다 파기하는 게 좋겠다고 하자 안 계장이 면담일지를 찢어버렸다. 한재동 교도관도 그게 발각됐을 때 큰 위험이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죽을 수도 있지'라는 각오로 절 도왔다." (이부영 전 의원)

언론에서 빨갱이라 해도 안 먹혀

 19일 저녁 서울극장에서는 서울대생 <1987> 단체 관람후 실제 인물들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19일 저녁 서울극장에서는 서울대생 <1987> 단체 관람후 실제 인물들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 성하훈


이후 학생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한 학생은 이 전 의원에게 '1987년과 최근 촛불집회를 어떻게 비교하나?'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이 전 의원은 "촛불집회에 한번도 빠짐없이 나갔다"면서 "박근혜가 탄핵 구속될 정도면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는 게 맞는데, 구속자가 부상자 하나 없었다, 세계 정치사에 이런 일이 없다"고 평가했다. 이 전 의원은 4.19 때 고3이었고, 5.16 쿠테타 전에 대학생이었는데, 그때부터 시위를 많이 했다"면서 "민주주의가 많이 성숙해진 것 같다. 이제는 신문이나 방송에서 집회 참가자들에게 빨갱이라고 해도 안 먹힌다"고 덧붙였다.

이 전 의원은 "지금 학생들은 백골단의 무차별 폭력행위나 직격탄 발사를 이해 못하겠지만 이후 유서를 대필했다고 덮어씌운 사건도 있었고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면서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을 다룬 <국가에 대한 예의>라는 영화도 최근 만들어 졌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촛불시위 당시 의경으로 효자동 쪽에 있었다는 학생은 불의를 보면서도 바쁘거나 기타 여러 가지 다른 이유 등으로 청년들이 이를 외면하거나 무감각해지는 경우가 많다며 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냐고 물었다.

이 전 의원은 "자신의 본분을 지켜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안유 계장도 공무원 신분으로 있었지만 정보기관이 국민을 속이고 조작하는데 공분했다"면서 "자기 선택에 합당한 일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오늘 여기 오신 학생들 중에도 검사나 판사를 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그런 위치에 가도 최소한으로 지켜야 할 본분이 있다. 그런 역할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 전 의원이 "김기춘과 우병우가 서울대 대표적 인물이라는 게 창피해 얼굴을 못 들겠다"고 하자, 학생들은 웃으며 공감하는 모습이었다. 


1987 이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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