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개봉한 영화 <피의 연대기>(감독 김보람)는 개봉 전부터 수차례 공동체 상영을 진행하며 입소문을 탄 작품이다. 유명 일회용생리대 다수에서 유해물질이 검출되었음이 폭로된 '생리대 파동' 이후, 여성의 생리는 필히 공적 영역에서 논의되어야한다는 사회적 요청이 이 작품을 극장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생리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우리 극장에서 개봉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피의 연대기>는 이러한 사회적 간절함에 성실히 답변하며 여성 관객들에게는 뜨거운 카타르시스를, 남성 관객들에게는 생생한 지적 경험을 전달한다. 한국 영화계에서 처음 다뤄보는 '생리'라는 주제를 서툴지 않게 다룰 수 있었던 이유는 화자의 겸손한 태도에 있다. 이 영화의 화자이자 연출자인 김보람 감독은 단 한 순간도 관객들을 '가르치려'하지 않는다.

 영화 <피의 연대기> 중 한 장면

영화 <피의 연대기> 중 한 장면 ⓒ 상상마당


생리대를 사용하지 않는 네덜란드 친구에게 생리대 파우치를 선물했던 에피소드를 첫 시퀀스에서 소개하며, 생리컵은 커녕 탐폰조차 쓸 줄 몰랐던 자신의 무지함을 고백한다. 그러고나서 나의 할머니 87세 '경주', 생리용품을 유튜브에 리뷰하는 영국 소녀 '브리', 지자체 최초로 저소득층 청소녀들에 생리대 무상 지원을 약속한 성남시장 '재명' 등 '더 잘 피흘리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방식으로 영화는 직조된다.

이처럼 화자와 관객의 위치를 동등한 선에 세워둔 것은 이 영화의 문을 두드릴 수 있는 관객의 폭을 무한히 확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남녀 모두는 물론이고, 초경을 앞둔 청소녀들, 완경을 기다리는 중년 여성들, 생리에 대한 잘못된 관념으로 자신의 몸을 긍정하지 못하는 여성들까지. 이들 모두에게 <피의 연대기>는 각기 다른 의미로 용기가 되는 영화다.

생리는 결코 더럽거나 무서운 것이 아니고, 생리 그 자체가 '진짜 여자가 됨'을 대표하는 명사가 될 필요도 없다. 생리 양이 많거나 적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질내 삽입형 생리용품 역시 두려움이 아닌 일상이 될 수 있다는 용기를 전달한다.

여성 관객들의 '격한 공감'을 원동력 삼아 흘러가는 이 영화에서 가장 짜릿하게 느껴지는 두 장면이 있다. 하나는 질에서 생리컵을 빼내어 새빨간 생리혈을 흘려보내는 장면이다. 남성 관객은 물론이고 여성 관객들 역시 이토록 맑은 생리혈을 두 눈으로 확인한 경험은 처음일 것이다. 막상 확인해보니 피는 그저 피였는데, 이게 뭐라고 그토록 말하기를 터부시했을까. 큰 화면을 통해 생리혈이 흘러나오는 장면을 본 어떤 관객들은 환희와 희열을 느꼈을 것이다.

 영화 <피의 연대기> 중 한 장면

영화 <피의 연대기> 중 한 장면 ⓒ 상상마당


또 다른 장면은 짧게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속 여성이 초점 없는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보며 "X발 (생리) 존X 귀찮아"라며 욕설 섞인 한탄을 하는 씬이다. 이 장면은 영화를 통틀어서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거의 유일한 순간이기도 하다. 이 맥없는 한탄은 보통의 여성들이 생리와 생리하는 자신의 몸에 대해 느끼는 보편적인 감정을 잘 담아낸 대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생리는 생각보다 별거 아니지만 또 별거이기도 하니까.

이 작품이 생리라는 주제를 굉장히 사려 깊고 진지하게 탐구했다는 증거는 영화 후반부, 생리의 정치사회적 의미를 짚어내는 부분에서 만개한다. 영화가 관객에게 요청하는 것은 단순히 '여성의 몸에 대한 이해'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여성의 생리를 긍정하는 것은 우리 정치와 사회의 몫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리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고, 사회적인 일이 될 수밖에 없다.

<피의 연대기>는 보건교과서 같기만 한 영화는 아니다. 여성의 몸을 탐구하는 교과서의 기능을 수행함과 동시에 순결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지적하는 페미니즘적 시각을 겸비하며, 여성-청소년-저소득층 등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함께 외치고 정치권을 향해 당당히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지혜를 갖춘 우리 영화 최초의 생리 다큐멘터리다.

피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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