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컴퓨터의 인공지능은 인간의 체스 실력을 따라잡을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1997년 러시아의 체스마스터 게리 카스파로프가 IBM의 슈퍼컴퓨터 '디프블루'와의 대결에서 패하면서 믿음은 깨졌다. 인공지능이 다음 대상은 눈길을 돌린 건 바로 바둑이었다.

바둑의 역사는 4천 년이 넘었다. 규칙은 간단하다. 가로 19줄, 세로 19줄로 구성된 361개의 점 위에 돌을 두어 자기 돌을 연결하는 집을 만들고 넓은 영역을 차지하는 사람이 이긴다. 하지만 바둑의 경우의 수는 우주의 원자 수보다 많다고 한다. 수천 년을 거치면서도 같은 내용의 바둑 경기는 없다고 할 정도다.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구글 딥마인드'의 공동창립자 겸 CEO 데미스 하사비스는 "가상환경과 게임은 AI 알고리즘을 테스트하기에 완벽한 플랫폼"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회사에서 개발한 바둑 인공지능 프로그램인, 인간의 직관을 흉내 내는 알고리즘으로 짠 '알파고'로 인간의 바둑에 도전장을 던진다.

2018년 1월 넷플릭스를 통해 국내 공개된 영화 <알파고>는 알파고의 시작부터 온 세상의 관심을 집중시킨 세기의 대결까지 여정을 담았다. 알파고는 개발 과정에서 유럽의 바둑 챔피언 판 후이 2단과 대결하여 5전 전승을 거두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후 구글 딥마인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바둑 기사들 중 한 명인 이세돌 9단과 2016년 3월 서울에서 5전 3승제의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를 진행한다.

결과를 알고 봐도 재밌고 모르고 봐도 재밌다

 다큐멘터리 <알파고> 중 한 장면

다큐멘터리 <알파고> 중 한 장면 ⓒ 넷플릭스


<알파고>의 연출을 맡은 그렉 코스 감독은 알파고의 모든 길을 빼곡하게 기록한다. <알파고>는 인류 과학사의 이정표가 세워지는 장면을 담은 기록물로써 가치를 지닌다. 역사가 만들어지는 순간에 흐르던 다양한 감정들, 과학의 미래를 향한 설렘, 결과를 알 수 없는 초조함, 승부가 만드는 긴장감, 인간이 이긴다는 기대, 기계에 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등을 카메라는 포착한다.

일렁이는 감정의 물결에서 이세돌 바둑기사가 느끼는 무게는 가장 크게 다가온다. 이전까진 국가와 자신을 위해 바둑을 두던 그는 알파고와 대결하면서 인류를 대표한다는 부담을 짊어진다. 이세돌 바둑기사는 실체가 없고 감정도 보이지 않는 알파고와 맞닥뜨리면서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낯섦을 경험한다. 알파고와 바둑을 두는 이세돌 바둑기사의 모습은 곧 새로운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한 인류의 현주소인 셈이다.

<알파고>는 컴퓨터 프로그램에 관심 있는 사람, 바둑을 즐기는 이, 다큐멘터리(또는 스포츠)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을 두루 만족시킨다. 이세돌 바둑기사와 알파고의 대국은 마치 스포츠 영화에서 느낄 법한 흥분을 안겨준다. 결과를 알고 보아도 재미가 넘치고, 모르고 본다면 스릴 만점이다.

이세돌 바둑기사와 알파고가 벌이는 수 싸움, 던지는 전략, 저지른 실수만큼이나 예상치 못한 전개를 접한 해설자의 탄식, 경기를 지켜보는 가족들과 기자들의 얼굴, 오류를 일으키지 않았으면 하는 딥마인드의 여러 관계자의 눈빛 등 대국장 안팎의 풍경도 흥미롭다. 여기에 영화는 일어나는 상황의 의미를 차분히, 그리고 재미있게 짚어주는 전문가들의 인터뷰를 섞어 극적 재미와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준다.

 <알파고> 영화 한 장면. 이세돌 9단이 대국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알파고> 영화 한 장면. 이세돌 9단이 대국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 넷플릭스


<알파고>는 "인공지능과 인간의 바둑 대결이 남긴 의미는 무엇일까?"란 질문에서 출발한다. 질문의 해답은 알파고가 1국에서 둔 37수, 이세돌 바둑기사가 4국에서 두었던 78수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알파고의 37수를 이세돌 바둑기사는 "바둑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굉장히 창의적인 수"라며 높이 샀다. 바둑 역사상 최강의 존재였던 알파고를 상대로 던진 이세돌 바둑기사의 78수는 "인간의 뇌가 가진 힘에 경외감이 든다"는 평가를 받았다.

<알파고>는 37수로 인해 생긴 78수의 관계를 보여주며 인공지능의 미래와 인간의 성장을 희망적인 시각으로 낙관한다. 알파고가 세상에 보여준 것과 이세돌 바둑기사가 사람들에게 들려준 바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가득한 '내일'이라는 듯 말이다. 영화 끝 무렵에 판 후이 기사가 던진 한 마디가 유독 귓가에 맴돈다.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영화 <알파고> 포스터

영화 <알파고> 포스터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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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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