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같은 놈 많이 봤어. 발 좀 담그는 척하다가 다 없어져." 배우 박정민은 2016년 10월 발간한 자신의 산문집 <쓸 만한 인간>에서 연기를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극단 형이 자신에게 한 말을 되새기며 버텨냈다고 회상한다. 박정민은 2016년, 영화 <동주>의 송몽규 역할로 국내 여러 신인상을 휩쓸며 주목받았다. 그러나 그 후 작품들의 부진과 본업 대신 책을 내는 등의 행보가 '그 역시 한 명의 반짝 스타였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하지만 17일 개봉한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을 통해서 사람들의 그런 생각이 전부 부질없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만들었다.
<그것만이 내 세상>은 사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영화다. 한때 잘나가는 복서였지만 지금은 집도 없이 떠도는 신세인 조하(이병헌)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 인숙(윤여정)을 우연히 만나 함께 살게 되는데, 그 집에서 동생 진태(박정민)의 존재를 알게 된다. 진태는 서번트증후군을 앓고 있는데 피아노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세 명의 가족이 한집에 살게 되며 생기는 코믹한 상황과 갈등, 그리고 마침내 각자의 속사정이 밝혀지고 마지막엔 서로의 손을 잡으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내려지는 예상되는 선택과 다른 영화에서 여러 번 본 듯한 사연들이 이어지는 <그것만이 내 세상>은, 이야기만 놓고 평가했을 때는 그리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명배우들의 명연기 덕분이다.
자신에 관한 모든 논란을 연기로 잠재우는 배우 이병헌은, 최근 그의 작품들과는 달리 코믹스럽고 힘을 쫙 뺀 연기를 선보인다. 하지만 그런 연기를 하면서도 다른 클래스를 보여준다. 또한 최근 tvN 예능 프로그램 <윤식당> 두 번째 시즌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배우 윤여정 역시 완벽한 연기를 보여준다. 최근 영화 <신과 함께: 죄와 벌>에서 배우 예수정이 연기한 주인공 자홍의 어머니와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다. 두 역할 모두 영화에선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한 기능적 장치로 쓰인 듯한 느낌을 주긴 하지만,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여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데에는 성공한다. <그것만이 내 세상>의 경우, 윤여정이 든든하게 가운데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덕택에 두 아들의 연기가 빛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번트 증후군에 걸린 피아노 천재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박정민의 연기이다. 서번트증후군에 걸린 진태 역을 훌륭히 연기하여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서번트증후군 캐릭터는 이젠 어느 정도 예상되는 모습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말아톤>(2005)의 배우 조승우가 연기한 윤초원 캐릭터가 유명하다. 하지만 박정민은 자신만의 스타일로 그런 예상에서 빗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박정민의 피아노 연주 연기이다. 영화에서는 박정민의 피아노 연주가 꽤 많이 나오는데, 실제론 영화에서 편집된 곡까지 합쳐 총 9곡을 연기했다고 한다. 특히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느껴지는 전율은 온전히 박정민의 공이다. 박정민의 피나는 노력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장면을 대역 없이 소화한 박정민 덕분에 클라이맥스의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온다. 연주하는 모습이 꽤 수준급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앞으로 어떤 특수한 역을 맡더라도 믿고 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게 만든다. 차기작인 이준익 감독의 <변산>에서는 래퍼 연기를 한다고 하는데, 그의 랩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박정민이 돋보이는 이 영화는 사실상 이병헌, 윤여정이라는 대배우 두 명이 박정민을 서포트하고 있는 듯한 영화이다. 실제로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조하와 인숙이 나란히 무대 위에 있는 진태를 지켜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이 꽤나 상징적으로 다가온다.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지켜보는 것 같다. 필명을 언희(言喜), 즉 '말로 기쁘게 한다'는 뜻으로 지었다는 박정민, 이제 말이 아닌 연기로써도 사람들을 기쁘게 할 준비를 끝마친 것 같다. 바야흐로 '박정민의 세상'이 도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