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수사처 박처원 처장(김윤석 분)

대공수사처 박처원 처장(김윤석 분)ⓒ 김유경


1월 14일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31주기다. 영화 <1987>은 그 사건 발생일로부터 6월 항쟁에 이르는 6개월을 담은 광장 이야기다. 광장은 사회적 이슈에 공감해 저마다 참여한 낯선 사람들이 함께하는 공적 소통 공간이다. 2017년 촛불혁명 역시 광장 이야기다. <1987>은 당시 광장의 물꼬를 튼 용감한 보통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한 멀티캐스팅 구성이다.

이 땅에서 1987년은 공안정국에 해당한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위세와 겁박이 일상에 먹히던 시절이다. 경찰청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의 어불성설을 발표하는 지경이다. 그러나 고문치사를 쇼크사로 은폐하려는 전두환 정권의 의도는 좌절된다. 국으로 가만히 있지 않아 역사의 흐름에 끼어들게 된 개인들의 선택이 배턴 터치하듯 이어지며 광장의 함성을 달구어서다.

<1987>은 자기 자리에서 제 몫의 용기를 낸 인물들을 실명으로 호명한다. 1월 14일 당시 22살이었던 박종철의 주검을 가장 먼저 목격한 의사 오연상(이현균 분)은 사망진단서에 '사인 미상'이라 쓴다. 그로 인해 검사한테 부검을 청하는 길이 열린다. 지난 2017년 6월 15일 고 백남기 농민의 사망진단서를 수정하고 사과한 서울대병원의 일을 떠올리면, 그로 인해 오 의사가 겪었을 고초가 짐작된다.

대공수사처 유정방 경정(유승목 분)이 요구하는 한밤중 시신 화장을 저지한 서울지검 공안부장 최환(하정우 분)은 더 나아가서 '시신 보존 명령'을 내리고 부검을 관철한다. 국과수 부검의 황적준(김승훈 분)도 부검의 진실을 밝히며 직업윤리를 지킨다. <1987>은 그렇게 각각의 선택을 순차적으로 부각시키면서 역사 발전의 주역이 국민 개개인임을 역설한다.

6.10 국민대회를 촉발시킨 인물들

 최환 검사(하정우 분)와 윤상삼 기자(이희준 분)

최환 검사(하정우 분)와 윤상삼 기자(이희준 분)ⓒ 김유경


영화는 신문사 칠판에 적힌 '보도 지침'을 비춰준다. 제5공화국이 언론 통제를 위해 각 언론사에 시달하던 지침을 무시하고 기자들을 독려한 동아일보 사회부장(고창석 분)과 중앙일보 사회부장(오달수 분)의 뜨거운 가슴은 그래서 빛난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로 박종철의 죽음을 처음 알린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이신성 분)와 '박종철군 고문치사 은폐조작'을 밝힌 동아일보 기자 윤상삼(이희준 분)은 그 후예다. 

도피 중인 재야인사로서 박종철 고문치사 제보를 정의구현사제단을 통해 폭로한 김정남(설경구 분), 구치소 보안계장 안유(최광일 분)의 제보로 옥중서신을 작성한 이부영(김의성 분), 1987년 5.18 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 미사에서 고문치사 은폐와 축소 조작을 폭로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승훈 신부(정인기 분) 등은 결과적으로 6·10 국민대회를 촉발시킨 인물들이다.

물론 공안검사로서 정권을 도왔던 경력의 최환 검사나 장기 비전향 수감자들을 고문한 안유 계장이 미화된 것에 대한 반론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유시민 작가의 의견에 동의한다. 지난 1월 11일 JTBC <썰전>에서 유 작가는 그 상황에서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지켜낸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보수정권이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밝혔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 한국당의 곽상도 의원보다, 과거를 딛고 떳떳한 길을 택한 그들이 지금 여기에는 더 필요하다.

어쨌거나 위 인물들과 대척적인 자리에 있는 캐릭터가 대공수사처 박처원 처장(김윤석 분)이다. 화면을 통해 보는데도, 빨갱이에 대한 개인적 원한을 레드 콤플렉스 다지기로 해소하는 그가 섬뜩하다. 어떤 경우든 명령불복종을 허용 않는 그에게 부하 수사관들은 "받들겠습니다" 외친다. 무소불위한 권력을 휘두르던 그를 구속시킨 건 고문치사 은폐와 조작을 폭로한 보통사람들의 용기다.

객석에서 광장 이야기에 스며든 경험으로 충분

 6월 항쟁 대오에 섞이는 연희

6월 항쟁 대오에 섞이는 연희ⓒ 김유경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는 울고 있다. 박종철의 아버지 박종기(김종수 분)가 떠내려가지 않은 뼛가루를 헤치며 오열하는 장면에서, 교도관 한병용(유해진 분)이 모진 고문을 견디고 회유 당하는 장면에서 안타까움이 복받친다. 머리에 최루탄을 맞아 혼절하는 이한열(강동원 분)의 모습이 슬로우 인으로 두세 번 반복될 때는 휴지로 눈을 꾹꾹 누른다. 그러면서 6·10 국민대회의 대오에 섞이는 연희(김태리 분)가 절로 된다.

<1987>의 멀티캐스팅 중 강동원이 인상적이다. 30대 중반의 그가 20대 초반 이한열의 순수한 낯빛을 연기한 건 놀랍다. 톡톡 튀는 대학신입생 연희 옆에 있어도 잘 어울린다. 장준환 감독은 이한열이 분실한 운동화 한 짝을 가공 인물 연희와의 만남에서 얻게된 것으로 설정해 상징적으로 복원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연희는 그때를 모르는 후대에게 광장의 역사를 복원해 알려주는 영화 <1987> 같은 존재다.

<1987>은 살맛나는 세상을 위해 무모해 보이는 선택을 한 이들을 기리는 영상기록물이다. 감독은 다량의 고증된 사실을 이야기로 재해석해 산만하지 않게 객석에 제시한다. 진실 캐기는 관객의 몫이다. 연희류에 속하는 내가 평소 원하던 방식의 역사물이다. 따라서 나는 <1987>에 대해 더 요구할 게 없다. 객석에서나마 역사적 선택이 행해지는 자리에 나를 대입시키며 광장 이야기에 스며든 경험으로 충분하다.

  •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