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유지태 분)는 이별을 통보하는 은수(이영애 분)에게 위와 같이 말한다. 영원할 것 같은 사랑. 두 사람이 만나 서로에게 빠져들고, 끝나지 않을 것처럼 설레는 감정을 주고 받는다. 하지만 서서히 사랑은 식어가고 관계는 느슨해진다. 또한 두 사람만의 사랑은 각자의 사회적 관계가 얽히기 시작하며 더 이상 두 사람만의 일이 아니게 된다. 그렇게 사랑은 변한다.

사랑의 시작에서 느끼는 달콤함이 큰 만큼, 사랑의 끝에 느끼는 공허함도 크다. 이러한 양가성은 비단 사랑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모든 일에는 양면적이 특성이 있다. 한 사람을 단순히 선과 악, 둘 중 하나로만 판단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단순한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양가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영화 <몬스터 콜>은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양가감정을 받아들이게 하는 이야기의 힘

학교에서는 괴롭힘을 받고, 엄마와 아빠는 이혼했으며, 심지어 엄마는 죽을 병에 걸렸다. 소년 코너는 어디에도 기댈 곳 없이 빛을 잃어 간다. 땅이 꺼지고 세상이 무너져 엄마와 헤어지게 되는 악몽은 이러한 코너의 현실을 반영하는 듯하다. 그러나 악몽은 언제나 마무리 지어지지 않은 채 끝이 난다. 이때 코너에게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몬스터가 찾아온다. 몬스터는 자신이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네 번째 이야기는 코너가 직접 해야 한다고 말한다. 네 번째 이야기는 악몽의 뒷이야기와 연결된다.

몬스터가 들려준 세 가지 이야기는 세상이 품고 있는 양가성과 관련된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왕자는 살인자이자 좋은 왕이며, 약제사는 성질이 고약하지만 바른 생각을 가진다. 특히 세 번째 이야기는 분명히 눈에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의 이야기로, 이는 코너의 현실과 연결된다. 코너를 괴롭히던 아이들은 그를 더 이상 때리진 않겠지만 대신 투명인간 취급하겠다고 말한다. 이야기가 현실로 확장된 것이다.

세 가지 이야기를 통해 코너는 점차 양가감정을 받아들이게 되고, 마지막 네 번째 이야기에서 숨겨왔던 진심을 고백한다. 아픈 엄마와의 생활에 지쳐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악몽 속에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려는 엄마의 손을 놓아 버렸다고.

코너는 엄마를 떠나 보내기 싫다. 그러나 이제 그만하고 싶다. 어느 하나는 거짓인 걸까? 그렇지 않다. 두 가지 감정 모두 진실하다.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소년으로서의 코너는 이러한 양가감정이 동시에 성립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결과 죄의식이 생겼고, 이는 악몽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몬스터의 세 가지 이야기는 현실이 단순히 흑과 백으로 나뉘지 않고 양가적 특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세 가지 이야기를 듣고 네 번째 이야기를 직접 하며 코너는 자신의 양가적 감정을 인정하며 죄의식에서 벗어나 진실을 대면한다. 그 결과 온전히 엄마와의 이별을 받아들이고 사랑, 애도할 수 있으며, 외할머니와도 소통의 길을 연다. 그렇게 소년은 어른이 된다.

오늘도 다시 <몬스터 콜>을 본다, 그리고...

양가적 감정을 인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별을 통보하는 은수에게 상우가 했던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는 대다수 우리의 말이다. 여전히 그의 말이 회자되는 이유기도 하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관계의 끝에서 머릿속에 맴도는 말은 상우의 그것과 비슷했다. 관계가 형성된 것처럼 허물어지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코너가 깨달은 것처럼 현실은 이분법으로 쉽게 나뉘지 않는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거부감을 느끼는 청년세대를 단순히 사회의 부조리를 유지하려 하는 '가해자'로 치부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시험만능주의와 일자리를 둘러싼 극한경쟁 속에서는 그들 또한 '피해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몬스터콜> 스틸컷

영화 <몬스터콜>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그렇기에 어려움을 앎에도 우리는 현실의 양가적 특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현실을 마주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장할 수 있다. 한 쪽을 악 또는 선으로만 규정해서는 사안이 해결되지 않는다. 나 또한 관계의 끝에서 정체되지 않은 채 온전히 상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다시 <몬스터 콜>을 본다. 이야기의 힘을 믿기에. 그리고 이 글을 쓴다. 코너처럼 나만의 '네 번째' 이야기를 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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