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남영동 대공분실에 있는 박종철 기념관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 있는 박종철 기념관 ⓒ 박정훈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이한열 열사 이야기를 그린 영화 < 1987 >이 입소문을 타며 꾸준히 흥행 중이다. 지난해 12월 27일 개봉 후 누적관객 270만을 돌파하며 영화 속 캐릭터들의 실제 모델에 대한 이야기들도 하나 둘 나오고 있다.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자신이 맡은 캐릭터의 실존 인물을 만나 함께 영화를 보거나 당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박종철 열사의 형 박종부씨는 장준환 감독 및 출연 배우들에게 "흥행에도 성공하고, 특히 젊은 세대가 많이 관람하여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역사의 한 페이지를 소중히 간직해주길 바란다"며 감사 인사를 전했고, 유해진이 맡은 교도관 한병용의 실제 모델 중 하나인 한재동씨는 "87년 당시, 실제로 비둘기를 손에 들고 검문을 통과할 때의 아슬아슬한 기억이 떠올랐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뜨겁고 치열했던 만큼 당시를 지나쳐 이젠 기성세대가 된 이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영화엔 1987년 1월부터 6월까지의 과정만 박제됐다. 하지만 시간은 언제나 그랬듯 계속 흘렀고,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많은 인물들은 역사적 갈림길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했다. 이 글을 통해 실제 모델과의 비교를 넘어 그들의 현재 모습, 그리고 이들과 관련해 잊지 말아야 할 사실들을 정리했다.

박종철 열사가 지키려 했던 선배 박종운

공안 경찰에 의해 고문당하다 억울하게 죽은 박종철 열사가 끝까지 지켜내려 했던 선배로 알려진 박종운. 영화에 직접 등장하진 않지만 배후를 묻는 경찰의 질문에 박종철은 끝내 정확한 정보를 발설하지 않았다. 

박종철 사망 이후 1년이 지나 박종운씨는 <한겨레신문>의 주선으로 박종철 열사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비롯한 유족을 만난다. 애써 먼저 위로하는 어머님을 향해 박종운씨는 "철이나 저나 모두가 골고루 잘사는 세상을 만들려고 했는데 아직도 안 돼서 마음 놓고 울 수도 없을 것 같다"며 애써 마음을 추스르는 모습을 보였다.

 박종운씨가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애도사.

박종운씨가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애도사. ⓒ 한겨레


박종운씨는 박종철 열사 2주기인 1989년 1월 14일 <한겨레신문>(아래 <한겨레>)에 보낸 애도사를 통해 '종철의 죽음은 나약한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나락으로 날 밀어넣기도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경찰들의 만행에 대한 치떨리는 분노와 복수심에 불타게 했다"며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기 쉬운 종철의 죽음에 대해 알리면서 그의 투쟁정신, 동지애, 의리를 모두 본받을 수 있게 하고 싶다"는 다짐을 드러냈다.

그로부터 10년 뒤 <한겨레>는 박종운씨의 근황을 전한다. 박씨는 1993년 국회 비서관으로 정치계에 입문한 이후 1995년부터 수년 간 김충환 강동구청장의 비서실장으로 일한다. 김충환 구청장은 민주당 소속이었다가 이후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바꿔 국회의원 및 원내 부대표까지 지낸 인물. 이 영향일까? 박종운씨 역시 한나라당에 입당해 세 차례 공천을 받아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를 기반으로 출마하지만 모두 낙선했다. 이 때문에 '오정의 낙선왕'이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했다.

2015년까지 그는 극우 보수 성향 인터넷 매체인 <미디어펜>의 논설위원을 맡아 글을 써왔다. '박근혜-시진핑 평화통일 기여, 한미동맹와해론은 기우', '세월호 구조실패, 박근혜정부 돌팔매질 할 수 있나', '쌍용차 굴뚝 농성, 파업이 아니라 범죄였다' 등이 그가 써왔던 글이다.

 극우 성향 인터넷매체 <미디어펜>에 글을 쓴 박종운씨.

극우 성향 인터넷매체 <미디어펜>에 글을 쓴 박종운씨. ⓒ 미디어펜 화면캡처


이한열 부축한 이종창씨는?

영화에서 '잘생긴 청년'으로 등장한 강동원의 캐릭터는 누가 봐도 이한열 열사를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1987년 6월 9일 항쟁 당시 경찰이 조준해 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사망한 이한열 열사와 함께 널리 알려진 사람이 있으니 바로 항쟁 당시 의식을 잃은 이한열 열사를 부축한 이종창씨다. 영화 후반부에도 이 장면이 잠깐이나마 담겼다.

<한겨레> <동아일보> 등에 따르면 이한열 열사와 같은 학교 도서관학과의 동갑내기였던 이종창씨는 1990년 8월 '조국통일 촉진그룹 사건'에 연루돼 수배생활을 하면서 2년여 간 공장에 위장취업을 했다. 그리고 "민주적 지식 전파운동의 일환"이라며 1993년 모교 도서관에 취직했다. 1987년 항쟁 당시 시위대 맨 앞이었던 그 역시 사흘 뒤 현장에서 머리에 돌을 맞고 이한열 열사가 있던 중환자실에 실려 갔었다. 당시 기억에 괴로워하던 그는 1997년 한 인터뷰에서 "이한열의 정신을 잘 잇고 있는지 모르겠다. 6월이면 늘 빚진 마음"이라며 "살아남은 자들이 여전히 할 일이 많다"고 말한 바 있다.

모교 도서관 일을 그만 두고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이종창씨는 뜻이 맞는 사람들과 현재까지 매년 이 열사 추모식을 열고 있다. 최근 30주년 추모식 관련 < YTN > 인터뷰에서 이씨는 "민주주의는 항상 참여하고 고민하고 감시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후퇴할 수 있다"며 "일상생활에서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항상 깨어있는 시민으로서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기회 있을 때 행동하는 시민의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대해서 그는 "6월 항쟁 승리가 촛불 광장으로 올곧게 계승된 결과"라 평하기도 했다. 현재 그는 파주가람도서관 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사건 최초 보도한 <중앙일보>, 위험 무릅 쓴 <동아일보>는?

박종철 열사 사망을 가장 먼저 알린 건 영화에 나오듯 <중앙일보>였다. 영화에선 보도지침을 어겼다며 언론사에 공안 경찰들이 들이닥친 순간에 사회부장이 해당 기사를 쓴 신성호 기자에게 연락해 몰래 피하도록 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는 어땠을까. 

배우 오달수가 자청해 맡았다는 <중앙일보> 사회부장 역은 금창태 당시 편집국장대리를 모델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 <미디어오늘> 등 복수 매체에 따르면 그는 이미 인쇄 중이던 윤전기를 멈추게 한 뒤 신성호 기자가 급히 보고한 기사를 사회면에 2단 기사로 넣게 했다. 그렇게 해서 <중앙일보> 1.5판 7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릴 수 있었다.

'14일 연행되어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아오던 공안사건 관련 피의자 박종철군(21·서울대 언어학과 3년)이 이날 하오 경찰조사를 받던 중 숨졌다. 경찰은 박 군의 사인을 쇼크사라고 검찰에 보고했다. 그러나 검찰은 박 군이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 중이다. (후략)' - <중앙일보> 1987년 1월 15일자 7면.

 영화 < 1987> 속 한 장면.

영화 < 1987> 에서 배우 이희준은 박종철 열사 사망 원인을 보도한 <동아일보> 윤상삼 기자로 분했다. ⓒ CJ엔터테인먼트


이처럼 진실을 세상에 처음 알리는 데 공헌한 금창태씨는 승승장구하며 1999년 <중앙일보> 사장직을 맡았고, 2001년 퇴사해 <시사저널> 사장직을 맡는다. 당시 영향력을 키워가던 <시사저널>이었지만 금창태 사장은 삼성그룹의 비리를 파헤친 일선 기자들에게 기사를 쓰지 말라는 압력을 가하다가 결국 임의로 기사를 삭제시킨다. 이로 인해 소속 기자들이 전원 파업했고, 회사를 뛰쳐나와 <시사인>을 창간하는 이른 바 '시사저널사태'가 발생했다.

특종 기사를 쓴 신성호 기자는 여러 부서를 거치다가 2000년 논설위원을 맡았다. 이후 전국부, 사건사회부 부장, 사회담당 부국장 직을 맡았고 2006년엔 수석논설위원을 지냈다. 2007년 고려대학교 초빙교수를 지내면서 교계에 발을 들였고, '박종철 탐사보도와 한국의 민주화 정책변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현재는 성균관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데 2015년 박근혜 정부 때 청와대 홍보특보로 일했다.

<중앙일보>의 최초 보도 이후 <동아일보>는 1987년 1월 16일과 17일에 거쳐 당국의 발표와 달리 박종철이 고문에 의해 사망했으며, 그것이 물고문이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이 보도로 전국에 항쟁의 불씨가 퍼지게 된다. 이 기사의 주역 중 한 명이 바로 영화에서 이희준이 연기한 윤상삼 기자다.

해당 보도 이후에도 윤상삼 기자는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며 분투했다. 1996년부터 도쿄 특파원으로 근무했는데 3년 뒤 간암 말기 진단을 받고 사망했다. 향년 42세. 당시 그는 취재뿐만 아니라 회사 간부 및 외부 인원의 의전을 맡는 등 업무 이외 일로 잦은 음주를 해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동아일보>는 윤 기자를 순직 처리하지 않고 회사장이 아닌 편집국장으로 치러 강하게 비판받기도 했다.

유족은 이후 소송을 제기했고, 2002년 4월 서울행정법원은 '업무와 사망 사이에 인과관계가 관계가 있다'며 산재를 인정,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고 윤상삼 기자의 부인 엄영숙씨는 "(이 일이) 남편의 명예회복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소송에서 이긴다면) 사람과 자신의 직업을 특별히 좋아한 남편 윤상삼 기자가 인정받게 되는 일"이라고 당시 소송 이유를 밝힌 바 있다.

한편 <동아일보>는 영화 개봉 직후 회사 SNS를 통해 '< 1987 >은 현재의 <동아일보> 기자들에게도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게 하는 거울 역할을 수행한다'는 문구와 함께 기사를 인용하며 홍보성 글을 올렸다. 하지만 실제로 <동아일보>는 1974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 독재에 저항하는 기사를 금지시키고 권력의 언론 탄압에서 취재하고 기사 쓸 자유를 달라'며 이른바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요구하던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고시키며 '동아투위'를 촉발시킨 곳이기도 하다. 현재까지 이 문제에 대해 <동아일보>는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당시 <동아일보> 해직 기자들과 <조선일보> 해직 기자들이 주축이 돼 1988년 5월 <한겨레신문>(현재의 <한겨레>)을 창간한다.

민주화 운동의 상징, 김정남은?

영화에서 설경구가 연기한 김정남은 실제로도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1942년 대전에서 태어나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그는 6.3 항쟁의 배후인물로 지목돼 옥살이를 했고,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추앙받으며 동시에 1987년 6월 항쟁 직후까지 도피 생활을 해야 했다. 이후 은둔생활을 했지만 김영삼 대통령 임기 때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 비서관 직을 맡기도 했다.

그는 비서관 직을 떠난 이후 한국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정리한 책 <진실, 광장에 서다>를 썼다. 2005년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김정남씨는 "미진하고 거칠지만 엉성한 밑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위안을 얻는다"며 "불과 20년 안팎이 지난 일인데 그때를 너무 쉽게 잊는 것 같아 기억을 되살리고, 당시 이렇게 살았다는 것을 기록함으로써 후세들이 간접적으로나마 체험을 공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에 대해 2007년 <조선일보>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전 대표 지지 모임인 '국가미래전략포럼'의 대표를 맡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으나 오보인 걸로 밝혀졌다. 당시 <오마이뉴스>의 취재에 김정남씨는 "그쪽에 있는 사람들이 더러 나를 존경한다고 왔다갔다 했지만 실제 아무 관계가 없다"며 "다소 의도적으로 (이름을) 넣은 게 아니냐 생각도 드는데 관계 없는 일"이라고 답한 바 있다.

 TV 뉴스에 보도된 박처원 당시 치안감.

TV 뉴스에 보도된 박처원 당시 치안감. ⓒ MBC


서슬 퍼렇던 박처장은?

김윤석이 연기한 영화 속 가장 강력한 악역 캐릭터 박처장은 알려진 대로 박처원을 모델로 삼은 인물. 그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김윤석 또한 "뉴스에도 잘 노출이 안 됐던 인물이라 정보를 찾기 참 힘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김윤석은 < 1987 > 시나리오를 쓴 김경찬 작가가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인물을 만들어 갔다.

<중앙일보> 등 당시 일간지들은 박처원을 '1980년대 대공 수사의 전설이자 대부로 추앙받은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평안남도 용강 출신인 그는 1947년 스무 살 나이로 경찰에 투신한 뒤 줄곧 40년 넘게 대공 분야 전문으로 활약한다. 1975년 총경, 1982년 경무관으로 승진을 거듭, 1980년 후반부턴 치안본부 5차장을 지낸다. 영화 속 처장이라는 직함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존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건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 지시한 혐의로 구속되면서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총애하며 도피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고. 이로 인해 1996년 그는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받았다. 당시에도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성이나 사과가 전혀 없었다.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한 보도는 거의 없다. 배우 김윤석은 인터뷰 중 "박처원은 자신의 행위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해외로 이민을 가 살다가 사망한 것으로 안다"고 답하기도 했다. 

 영화 < 1987> 속 한 장면.

영화 < 1987> 속 한병용(유해진)과 연희(김태리)는 재야인사의 서신을 전하기 위해 여러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다. ⓒ CJ엔터테인먼트


그밖에 인물들

여러 관련 기사가 나왔지만 영화 속 유해진이 맡은 교도관 한병용은 영등포교도소 교도관으로 일한 한재동씨와 교도관에서 퇴직한 전병용씨를 합친 캐릭터다. 영화에서 한병용은 당시 해직 기자였던 이부영(김의성)이 쓴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에 대한 진실을 재야인사 김정남에게 전한 인물로 그려졌다. 실제로는 한재동에서 전병용씨를 거쳐 재야인사 김정남에게 전달된 것이다. 또한 최민식의 동생인 배우 최광일이 연기한 보안계장 역시 이부영에게 협조한 캐릭터로 담겼는데 실제 모델은 안유씨다. 한재동, 전병용, 안유씨 모두 교도관의 내부고발자로 고문치사사건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데 기여한 인물.

이들의 활약과 신원은 20여 년이 지난 뒤에야 알려졌다. 한재동씨는 2007년 <오마이뉴스>와 만난 자리에서 "겁은 안 났다, 목을 이미 걸어부렀으니까"라고 편지 전달 당시의 심경을 전한 바 있다. 또 2012년 박종철 열사 25주기 추도식에 등장한 안유씨는 "당시 재야인사와 대학생 등 공안 관련 사범들을 감시하고 회유하는 역할을 했다"며 "대공수사처가 가족을 내세워 협박하고 회유하는 모습, 결국 엉뚱한 학생을 빨갱이로 몰아 죽이고 사건을 은폐, 조작하려는 것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 이부영 전 의장에게 털어놨다"고 말했다.

안씨는 구미유학단 간첩단 사건 피해자 등을 전향시킨다는 명목으로 고문한 일도 있다. 이 때문에 당시 피해자 중 한 사람인 강용주씨는 영화 < 1987 > 보이콧을 외치기도 했다. 안유씨는 사건 이후 직책을 이어갔고, 서울교정청장까지 지내다가 2004년 정년퇴직했다.

김태리가 연기한 연희는 이야기의 극적 효과를 위해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이긴 하다. 영화에선 삼촌 한병용의 부탁으로 재야인사의 주요 편지를 전달하는 일을 종종 하는 걸로 그려지는데 실제로 한 여성이 역시 옥중서신을 재야인사에게 전달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겨레> 등에 따르면 당시 김정남씨의 도피를 도운 인물이 고영구 변호사였고, 고 변호사 부인인 황국자씨가 그 서신을 정치권과 정의구현사제단 등으로 전달하는 데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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