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곤조곤'은 책과 영화, 드라마와 노래 속 인상적인 한 마디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무심코 스치는 구절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이야기로 풀거나, 그 말이 전하는 통찰과 질문들을 짚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우울, 고통, 절망, 좌절

고통은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불쾌한 경험이다. 하지만 나쁜 것만 남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괴로움은 창작력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 pixabay


고통은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불쾌한 경험이다. 하지만 나쁜 것만 남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괴로움은 창작력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남자 친구에게 차인 후 엉엉 울며 술을 마시다 대뜸 노트를 꺼내 들고 '이걸 에세이의 소재로 삼아야겠어!'라고 외친 적도 있다(물론 전 애인이 볼까 봐 그걸 그대로 적지는 않았다).

왕따, 군대에서의 폭력, 성소수자로서 혐오에 마주한 경험 등 꺼내놓지 않은 불행한 개인사가 없을 정도다. 하지만 그렇게 글을 쓰다 보면 허무함이 밀려오곤 한다. 이렇게 해서까지 써야만 하는 것일까.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자기 고통을 팔아먹으며 글을 쓰는 사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나는 '그래도 남은 것 중 하나는 좋은 게 있어야지'라며 속으로 볼멘소리를 하곤 한다.

사실 누군가는 '그래도 너는 뭐라도 있으니 편하게 글을 쓴다'라고도 하지만 아주 그런 것 만도 아니다. 아무리 자원이 된다고 해도 고통은 여전히 고통이다. 마주하는 게 달갑지가 않다. 그런 글을 쓰고 나면 머릿속에는 '일단 술을 한 잔 마셔야겠다'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이 일이 나에게만 그런 것도 아닌가 보다.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 레이디 가가: 155cm의 도발 >에서 한창 음반 작업을 하던 레이디 가가는 그렇게 말한다. "곡을 쓸 때는 마음속 아픔을 들여다 볼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개복 수술을 하는 것 같다"고. 속을 다 헤집어 놓는 것 같다고.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입에서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래요, 그건 그런 일이죠.

'진심과 영혼의 기록', 진솔한 앨범에 담은 '고통'

 <레이디 가가 155cm의 도발> 스틸컷

<레이디 가가 155cm의 도발> 스틸컷 ⓒ 넷플릭스


< 레이디 가가: 155cm의 도발 >은 레이디 가가가 앨범 < Joanne >을 만들던 시기로 전반부를 채운다. '조앤(Joanne)'은 그녀의 실명 일부이자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 만나지 못했으나 영감의 원천이 된 고모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앨범에는 레이디 가가 스스로가 '진심과 영혼의 기록'이라고 부를 만큼의 진솔함이 담겼다.

실제로 전위 예술을 방불케 할 만큼 화려한 의상을 입었던 이전과 달리 레이디 가가는 단촐한 티셔츠에 숏팬츠만을 입고 무대에 오른다. 눈에 띄는 것은 그녀가 진정한 자신을 드러냈다 공언한 이 앨범이 사실은 개인적인 고통의 기록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A-yo'나 'Diamond Heart'처럼 흥이 넘치는 트랙도 있지만 대부분의 노래에서 레이디 가가는 상실과 실연, 배신과 암울한 시대를 이야기한다.

물론 가가는 이전부터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다룬 노래를 부르곤 했지만 유독 진심을 담았다는 앨범에 그런 곡이 가득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이 노래들은 그녀의 다른 자전적인 곡들과 달리 극복의 서사를 담고 있지도 않다. 리드 싱글인 'Perfect Illusion'만 봐도 가사는 '그건 사랑이 아니라 완벽한 환상이었어'라는 내용 너머로 나아가지를 않는다.

'million reasons'에서도 그녀는 엇나간 애정이 주는 고통 속에서 '그래도 너를 떠나지 않을 하나의 이유를 줘'라고 요구하지만 끝끝내 그것은 갈구에서 그쳐버린다. 'Joanne'은 결국 누군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리고 있고, 'Angel Down'에서는 폭력의 시대에 차라리 쓰러진 천사들을 보호하겠다고 말한다. 솔직히 사실상 이건 체념에 가깝다.

 <레이디 가가 155cm의 도발> 스틸컷

<레이디 가가 155cm의 도발> 스틸컷 ⓒ 넷플릭스


창작자가 '아픔을 드러내는 것'의 의미

이 같은 경향은 < 레이디 가가: 155cm의 도발 >에서도 이어진다. 이 작품에는 보통 뮤지션을 다루었으면 등장할 법한 무대 위의 화려한 퍼포먼스 장면은 일체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화제를 모았던 슈퍼볼 하프타임 공연은 아예 준비 과정과 끝난 직후의 상황만을 보여줄 정도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을까.

다큐멘터리에는 섬유근육통으로 고통받는, 이어지는 결별에 의연한 척 하지만 사실은 외로움에 눈물을 떨구는, 새 앨범이 성공하지 못하면 어떨까 불안감에 시달리는 레이디 가가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가장 압권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도중에 '새 앨범의 전곡이 유출되었다'는 소식을 듣는 장면. 이쯤 되면 누가 시켜주지도 않을 '팝스타, 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다큐멘터리든 음반이든 자신의 맨얼굴을 보이고 싶어 한 작품에서 레이디 가가가 이런 선택을 한 이유는 명백하다. 어느 누구든 자신의 진짜 아픈 구석 드러내 보이길 좋아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고통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 발생하고 나는 그 속에서 스스로가 작아지고 초라해짐을 느낀다. 남들이라고 모를까? 솔직히 말하면 연민이란 명백하게 '내려다보는' 행위다.

나는 겪지 않고 있는 불행 탓에 무너진 이들을 안타까워 하는 일. 우리는 마치 상처 입은 어린 들짐승을 보듯이 그런 사람들을 본다. 작고 무력하고, 그래서 우리의 눈물을 짜내는 존재들. 보는 것은 괜찮지만 절대로 되고 싶지는 않은 부류. 많은 이들의 생각과 달리 대부분의 아픈 사람들은 이걸 명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말을 안 하는 것이다. 단지 창작자들에게는 이 두려움을 넘어서는 표출 욕구가 있을 뿐이다. 혹은 마감이 있거나.

 <레이디 가가 155cm의 도발> 스틸컷

<레이디 가가 155cm의 도발> 스틸컷 ⓒ 넷플릭스


"그러니까 앞으로 나아가야죠"

말하자면 모든 고통은 자체의 성격과 무관하게 항상 개인적이고 내밀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거꾸로 이를 드러내는 행위는 진솔하게 자신을 펼쳐 보인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다. 나의 궁금증은 하나였다. 도대체 어떻게 견딜까.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나의 모습은 스스로도 보고 싶지가 않다. 하지만 그런 부분을 글로 쓰려면 어떻게든 나는 그 앞에 다가가 관찰을 해야 한다.

시간이 흘러서 어느 정도 남의 일 보듯 하는 게 가능한 경험도 있지만 수치심과 모멸감은 옅을지언정 사라지지는 않는다. 하다못해 나야 몇 쪽짜리 글에서 모든 게 끝나지만, 레이디 가가는 앨범도 만들고 2시간에 가까운 다큐까지 찍지 않았는가. 방식은 비슷할지라도 깊이의 차원이 다른 셈이다. 후유증을 도대체 어떻게 감당할까.

답은 영화 속에 존재했다. 레이디 가가는 이렇게 말한다. "과거의 일을 다시 떠올릴 순 있지만 시간을 되돌릴 순 없어요, 그러니까 앞으로 나아가야죠." 간단하고 명료하지만 참으로 어려운 결론. 그녀의 말을 들으며 세상의 모든 옳은 일은 너무도 당연하지만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을 다시금 새겼다. 아니, 어쩌면 그 말은 틀렸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다큐멘터리 속에서 레이디 가가는 그렇게 하니까.

두려움 속에서도 그녀는 새 앨범의 성공을 위해 홍보에 매진하고 몸을 옥죄는 통증 속에서도 예정된 스케줄을 소화하러 나선다. 슈퍼볼 하프타임 공연 준비 과정은 가가의 완벽주의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다.

영화 내내 육체적 통증과 깊은 감정적 고통은 보는 이가 괴로울 만큼 반복적으로 전면화되지만, 레이디 가가는 매번 그 모든 것을 딛고 앞을 향해 자기 자신을 던진다. 땅에서 발을 높이 떼는 그 도약의 무게는 무겁기만 하지만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이처럼 < 레이디 가가: 155cm의 도발 >에는 입으로 말해지는 원칙이 아니라, 그것을 온몸으로 실현시키는 사람이 등장한다. 이렇게 성실하게 전달하는 교훈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레이디 가가 155cm의 도발> 포스터

<레이디 가가 155cm의 도발> 포스터 ⓒ 넷플릭스



레이디가가 레이디 가가: 155CM의 도발 고통 창작 JOAN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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