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서병수 시장을 비판하며 사과를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는 민병훈 감독과 <황제> 배우들

2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서병수 시장을 비판하며 사과를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는 민병훈 감독과 <황제> 배우들 ⓒ 부산영화제


2014년부터 올해까지 4년간 국내 영화제 이슈를 모두 빨아들인 건 부산국제영화제였다. <다이빙벨> 상영에 따른 정치적 압박, 예산 삭감과 표적 감사,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의 강제 퇴임과 영화단체들의 보이콧에 이르기까지 한 해도 조용한 적이 없을 만큼 부산영화제는 힘든 시기를 보냈다.

이 흐름은 올해도 이어졌다. 부산영화제의 기둥과 같았던 김지석 부집행위원이 멀리 프랑스 칸에서 타계해 부산영화제뿐 아니라 한국 영화계에 큰 아픔과 슬픔을 안겼다. 이는 김동호 이사장과 강수연 집행위원장이 올해 행사 직후 바로 사퇴한 것에도 영향을 끼쳤다. 

김지석 수석 부집행위원장의 사인은 심장마비였는데, 가까웠던 영화계 인사들은 부산영화제 사태 과정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일부 영화인들은 김 부집행위원장의 사망 이유를 '권력에 의한 압박'으로 인식하는 분위기다. 부산영화제를 4년간 괴롭혔던 박근혜 정권과 함께 서병수 부산시장 등이 배경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22회 부산국제영화제 김지석 부집행위원장 추모행사에서 고인의 사진에 입맞추고 있는 이란의 거장 모흐센 마흐발바프 감독

22회 부산국제영화제 김지석 부집행위원장 추모행사에서 고인의 사진에 입맞추고 있는 이란의 거장 모흐센 마흐발바프 감독 ⓒ 부산영화제


서 시장은 김지석 부집행위원장 추모에 초점을 맞춘 올해 부산영화제에 레드카펫으로 입장해 '고인을 욕되게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개막식에서 민병훈 감독을 비롯해 방은진 감독 등 많은 감독들이 피켓 시위 등으로 사과를 촉구했으나 서 시장은 이를 끝까지 무시했다. 결국 폐막식에서 다큐멘터리상 수상작인 <소성리> 박배일 감독의 공개적인 비판을 받는 망신을 감수해야 했다.

영화계는 서병수 시장이 문화와 영화에 대해 무지한 수준을 넘어 공든 탑을 무너뜨리고 성장을 막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하겠다는 자세다. .

한 가지 위안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파행으로 얼룩졌던 상처가 정상화의 단초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월 15일 부산영화제를 방문해 정상화에 힘을 실어줬고, 지난 4년간 박근혜 정권과 서병수 부산시장에 상처받은 영화계 인사들을 위로했다. 영화계 인사들은 새해 신임 이사장으로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이 복귀하면 모든 게 순리대로 풀릴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시장 때문에 '죽고' 시장 덕분에 '살고'

 2017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레드카펫으로 입장하고 있는 조직위원장 김승수 전주시장과 이충직 집행위원장

2017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레드카펫으로 입장하고 있는 조직위원장 김승수 전주시장과 이충직 집행위원장 ⓒ 전주영화제


상대적으로 가장 돋보인 것은 전주국제영화제였다. 서병수 시장이 부산영화제를 훼손시킨 것과 비교해 전주영화제는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승수 시장은 반대되는 행보를 보였다. 표현의 자유를 위협한 부산을 겨냥해 '영화 표현의 해방구'를 슬로건으로 세워 확실한 차별성을 나타냈다. 영화진흥위원장을 역임한 이충직 집행위원장은 안정감과 부드럽고 강단 있는 리더십을 통해 전주영화제의 위상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전주영화제는 지난해 국정원 간첩 조작을 고발한 <자백>에 다큐멘터리 상을 준 데 이어 올해는 사드 반대 투쟁을 다룬 박문칠 감독의 <파란나비효과>에 상을 안기며 정치적 환경에 간섭받지 않겠다는 각오를 나타냈다. 박근혜 정권 시절엔 다큐멘터리 <노무현입니다>의 제작을 지원했는데, 영화가 흥행에 크게 성공하면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표현의 자유도 지켜주고 수익까지 얻는 효과를 얻은 것이다.

이 때문에 박근혜 정권에서 전주시가 지방자치단체로서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권력의 압박에도 정치사회적으로 예민한 다큐를 거침없이 상영해 블랙리스트에 올랐지만, 역으로 전주영화제의 선명성과 의지가 지난 정권에 의해 인정받은 셈이다. 

부천영화제도 지난해 조직위원장을 이양한 김만수 시장의 결단으로 독립성과 자율성이 보장되면서 초기의 명성을 되찾아가고 있다. 올해 공영방송을 훼손시킨 주범들을 고발한 최승호 감독의 <공범자들>을 첫 상영했고, 지난해 12월 타계한 한국독립영화 1세대 홍기선 감독의 특별전을 준비하는 등 정권교체 이후 표현의 자유 첨병 역할을 하며 영화제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제천영화제 역시 허진호 집행위원장이 안정감 있게 휴양영화제로서의 기틀을 다지고 있는 중이다. 최근에는 제작지원 프로그램을 다시 가동해 음악영화 성장에 기여하는 모습인데, 확장보다는 기존 규모를 유지하면서 내실을 다지려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는 국내 다큐멘터리 진흥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영화제답게 다양한 다큐멘터리 신작들을 선보이며 주목됐다. 다만 외부 협력업체를 통해 개막식을 온라인으로 중계하면서 초청한 음악인이 퍼포먼스 도중 제지당하는 상황을 노출하는 등 어설픈 준비로 안팎의 비판을 받았다. 또한 이 과정에서 부산영화제 다큐멘터리 경쟁 초청을 포기한 개막작을 놓고 일부에서 사실과 다른 악의적 주장을 펼치는 상황이 나타나기도 했다.

 지난 10월 부산영화제 개막식에서 레트카펫 입장으로 비난을 받은 서병수 시장이 폐막식에서는 일반 출입구로 입장하고 있다.

지난 10월 부산영화제 개막식에서 레트카펫 입장으로 비난을 받은 서병수 시장이 폐막식에서는 일반 출입구로 입장하고 있다. ⓒ 부산영화제


한 가지 특징적인 것은 자유한국당 소속 시장들이 전통적으로 영화제를 망쳐 놨다면 민주당 소속 시장들은 상대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며 영화제 중흥에 일조하고 있는 점이다.

2004년 부천시장이 영화제 집행위원장을 쫓아낸 부천영화제 사태나 2014년 부산영화제 사태를 일으킨 시장은 모두 자유한국당과 전신인 한나라당 소속 시장이었다. 제천영화제도 자유한국당 전신인 새누리당 소속 시장이 있을 때 폐지를 언급하기도 했다. 시장이 갈등 과정에서 필요한 역할을 했던 전주영화제를 제외하고는 시장이 어떤 정당이냐가 영화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모습이다.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 상태에서 선거 결과가 향후 국내 영화제에 적잖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자유한국당은 '망쳐놓고' 민주당은 '지켜내고'

부산영화제가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영화제들은 발견과 발굴을 통해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표현의 자유가 주요 화두가 되면서 영화제마다 정치 사회적으로 민감한 작품을 선보이려 애쓴 것도 특징이었다. 부산영화제와 전주영화제가 사드 반대 투쟁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주요 수상작으로 선정하고, 부천영화제도 <공범자들>로 가세한 것은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국내 영화제들은 보수정권이 불편하게 생각하며 지원을 없애거나 삭감하던 한국독립영화를 측면에서 지원하면서 한국영화의 버팀목이 됐다. 박근혜 정권이 영화제 지원 예산을 크게 삭감하면서 어려움이 많았으나,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 새해 예산에서는 이를 다시 증액해 한시름을 놓게 됐다.

 박근혜 정권에서 지원 삭감과 배제 등으로어려움을 겪엇던 인디다큐페스티발과 인디포럼영화제

박근혜 정권에서 지원 삭감과 배제 등으로어려움을 겪엇던 인디다큐페스티발과 인디포럼영화제 ⓒ 인디다큐/인디포럼


인디포럼과 인디다큐 등 독립영화제들은 여전히 살림 속에 독립영화의 정신을 놓지 않았는데, 최근 문화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과정에서 국정원 간부가 문체부 관계자에게 이들 영화제의 지원을 제약하라는 의미의 문자를 보낸 게 드러나기도 했다. 작은 규모의 영화제를 지원하는 예산 역시 문재인 정부가 늘리면서 이들 영화제들의 숨통이 조금은 더 트일 전망이다.

규모가 크지 않은 영화제들 대부분이 내실 있는 행사로 알차게 치러진 것도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대표적으로 5회 무주산골영화제는 차별화된 주제로 관객몰이에 성공하며 안착하며 무주를 영화도시로 인식시켰다. 2회를 맞은 울주세계산악영화제도 산악영화제로서의 성장 가능성을 엿보였다. 특히 울주군이 제작 지원한 허철 감독의 <돌아온다>가 지난 9월 몬트리올국제영화제에서 금상을 수상하는 의미 있는 성과를 냈고, 이는 울주산악영화제에도 기쁜 소식이었다.

청소년대상 영화제의 경우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는 주요 인사들이 부산영화제 사태에 적극 나서며 서병수 시장과 대립했다. 이 때문에 미운털이 박힌 듯 예산 지원이 넉넉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다. 그럼에도 상영작품을 늘리며 국내 대표 어린이청소년 영화제로 위상을 키웠다. 상대적으로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는 수년 전의 스태프 임금 미지급 논란과 지원금 횡령 등으로 신뢰를 잃은 이후 영화인들의 외면을 받는 모습이 이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올해 행사는 개최했지만 관객들의 외면이 계속되면서 초라한 영화제로 추락했다.

새로운 영화제들도 생겨났다. 지난 8월 서울에서는 역사영화제 프레 페스티벌이 열렸고, 9월 양양 해변에서는 그랑블루 페스티벌이 시작됐다. 역사영화제는 김대현 감독과 정병각 전주영상위원장 등이 준비를 맡고 있는데 2018년 군산과 서천에서 1회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랑블루 페스티벌은 이현승 감독이 만든 영화제로 '이현승 영화제'라고도 불린다. 양양 죽도해변에서 야외 스크린을 통해 서핑과 영화를 즐기는 행사인데, 참석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으며 의미 있는 첫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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