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SBS 라디오 <배성재의 텐> 막내작가가 이른바 '남혐 논란'에 휘말려 타 프로그램으로 전출됐다. 9월 방송 중, 작가가 '여성시대'라는 '여성향' 인터넷 커뮤니티의 회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 계기였다.

'작가가 '남혐'을 한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작가의 개인 SNS가 추적됐다. '방금 너 때문에 여성 인권이 한 50년 쯤 후퇴했다'고 적힌 계정 속 글이 캡처돼 널리 퍼졌다. 해당 글이 올라온 건 유아인 발언과 관련된 젠더 담론이 뜨거웠던 시기였다. 그래서 혹자는 해당 글이 유아인을 비난하는 것이라 해석했고 이를 '남혐'의 증거로 삼았다. 한서희씨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한다는 사실도 '남혐'의 증거로 해석됐다.

일부 <배성재의 텐> 청취자들은 이런 사실을 근거로 작가가 '남혐 성향'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고 작가의 프로그램 하차를 요구했다. 청취자 게시판이나 라이브채팅 댓글에서 하차 요구가 이어졌다. 작가는 7일 사과문을 게재했다. <배성재의 텐> 제작진 측도 사과문과 함께 작가가 타 프로그램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공지했다.

한편, 그로부터 5일 뒤인 12일 웹툰 작가 귀귀는 자신의 공식 블로그(https://blog.naver.com/tarboy/221161517631)에 '페미니스트 선언합니다!'라는 제목의 만화를 올렸다. 웹툰 관련 상품 홍보를 위해서였다. 작가는 작품 속 뚱뚱한 여성에게 페미니스트 티셔츠를 입힌 뒤 성기 부위에 '전복'의 사진을 붙였다. 작가를 대변하는 캐릭터는 그 전복을 핥는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조롱하며 전복에 침을 뱉는다. 이 만화는 수많은 논란을 일으켰고 결국 비난 속에 프로젝트는 취소됐다. 텀블벅에서 귀귀 패키지를 기획하고 제작한 재담미디어는 짧은 사과문을 올려 프로젝트의 중지를 공지했다.

14일 귀귀는 공식 블로그 및 SNS 계정에 텀블벅 취소를 알리는 게시글과 함께 새로운 만화를 올렸다. 패키지 만화를 비난한 사람들을 '페미니스트'로 총칭해 비꼬는 내용이었다. 이후 귀귀와 재담미디어는 공식 게시글을 올리지 않고 있다.

배성재의 텐, 그리고 귀귀

 배성재의 텐

ⓒ SBS


'여혐'과 '남혐'은 다른 배경을 가진 단어다. 두 단어는 '남녀'로 대칭적이지만 단어가 주장하는 바는 전혀 다르다. '여혐'은 주로 페미니즘 진영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단어다. 그들은 '여혐'을 현존하는 여성 억압으로 정의한다. 페미니즘은 여성을 피해자로 두고 사회와 사회의 기득권인 남성을 가해자로 바라본다. 남성은 가해자이기 때문에 여성 억압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 책임을 방기하는 행위도 '여혐'에 포함된다. 그래서 '여혐'은 남성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여성 억압을 중단하거나 폐기할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반면, 페미니즘 진영의 대척점에 선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남혐'은 남성을 피해자로 규정한다. 많은 남성들은 '남혐'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남성에게 부과되는 책임들이 불합리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남혐'은 '여혐'과 달리 남성이 경험해 온 피해자성보다 남성을 가해자로 지목하는 목소리에 더 크게 반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바꿔 말하면 '여혐'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기 전에 '남혐'이라는 말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애초에 여성 혐오가 없었다면 남성 혐오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혐, 여혐 하는 사람 극혐"이라는 개그맨 황현희의 라임은 첫눈에 중립적으로 보이지만, 남혐과 여혐이 동등하다는 프레임을 구축하며 페미니즘 반대 진영의 입장을 대변한다.

'남혐'을 외치는 사람들의 슬로건은 "우리 모두 평화롭게 살자"이다. 자신이 가해자로 부당하게 지목받기 전으로 돌아가자는 게 골자다. 반면 페미니즘은 여혐이 팽배한 사회를 뒤집어엎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쓸 때,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성평등주의' 같은 말을 쓴다. 이는 페미니스트들을 폭력적인 선동자들로, 자신들을 평화적이고 객관적인 중립자로 보이게끔 만드는 효과가 있다.

두 사건에서 각 진영은 당사자를 '여혐' 또는 '남혐'으로 지목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각 진영은 무엇을 여혐 그리고 남혐으로 규정하고 있는가' 들여다 볼 수 있다. 귀귀는 페미니즘 진영이 무엇을 여혐이라 지적하고 있는지를 드러내고, 배텐 사건은 반대편 진영이 남혐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혐과 남혐
 귀귀 웹툰 중 일부

ⓒ 재담미디어


귀귀의 '여혐'은 이미 존재하는 여성 억압을 답습하면서 작동한다. 귀귀는 '페미니스트'를 비웃기 위해 그들에게 성적 매력이 없다고 묘사한다. 

웹툰의 피날레는 귀귀가 결국 이런 행위를 거절하고 성기에 침을 뱉는 장면이다. 여성은 귀귀에게 성적 대상에 불과할 뿐이고, 페미니스트인 여성은 그런 가치도 없다는 것이다. 여성의 모든 것이 성기능으로 치환되는 귀귀의 논리에서 마지막 장면은 '너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선언으로 읽힌다.

귀귀의 만화에 출연하는 것은 '여자'가 아니라 여성의 성기이다. 그는 침을 뱉으며 여성의 성기를 부정하고, 그로써 여성은 존재 가치를 잃는다. 이런 성적 대상화는 인류 역사의 대부분을 지배한 전형적인 여성 억압과 유사하다. '여혐'이 기존에 존재하는 여성 억압을 지칭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반면 <배성재의 텐> 막내작가의 '남혐'은 남성을 가해자로 지목하고 그 책임을 묻는 행위다. "너 때문에 여성 인권이 한 50년 쯤 후퇴했다"는 고발이다. 작가 본인은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청취자들 중 일부는 '너 때문에'라는 문구가 유아인을 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작가의 발언이 직접적으로 "평화롭게 살자"고 주장하는 유아인과 그 지지자들을 여성인권 후퇴의 주범으로 고발한 것이라고 문제 삼았다.

또한 청취자들은 막내작가가 페미니즘 일부 진영의 '사적 복수'에 동의할 것이라고 추측하여 그를 '남혐'이라 칭한다. 미러링을 무기로 하여 자신의 가해자성에 책임을 지지 않는 '한남(한국남자)'들에게 자신들이 당한 폭력 그대로 돌려주겠다는 기조가 발견되는 커뮤니티, 여성시대의 회원인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작가가 한서희를 팔로우 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막내작가의 전출은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진영이 '남혐'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고 또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발화 권력의 차이

이번에 일어난 두 사건에서 우리는 두 진영의 권력이 얼마나 차이 나는지 엿볼 수 있다. 귀귀 사건은 높은 수위의 여혐적 발화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당당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반면 배텐 사건은 극도로 희미하고 간접적인 남혐적 발화가 공적 불이익을 야기할 수 있음을 확인해준다. 귀귀는 커리어 내내 여성혐오를 직접적으로, 꾸준하게 발화했다. 그 폭력의 카타르시스가 그의 인기 비결이다. 논란이 된 만화는 아예 주제 자체가 여성혐오다. 심지어 패키지가 취소되고도 그는 당당하다. 사과한다고 올린 만화이지만 그 내용은 사실 조롱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사과가 향하는 진짜 대상은, 자신의 뜻을 지지해 텀블벅에 참여하였으나 상품을 받지 못하게 된 이들이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발화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해하지 않는다.

반면 <배성재의 텐>의 막내작가는 자신의 '남혐 성향'을 부인했다. 그는 7일 올린 사과문에서 "작가라는 특성상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기 위해 여러 커뮤니티에 가입돼 있다"고 했다. 그는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은 친구와 개인적인 일로 통화를 한 후에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올린 사진"라며, "나는 남성 혐오자가 아니"라고 밝혔다.

귀귀의 만화는 '여혐'이며 이를 추종하는 이들 역시 '여혐'임을 부정할 수 없다. 반면에 막내작가가 '남혐'으로 기소된 이유들은 지극히 사소한 정황과 의혹에 불과하다. 또 그는 무엇보다 귀귀와 달리 자신의 페미니스트적 성향을 제작에 반영한 일이 없다. 작가라는 그의 직업적 특성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가 진짜 '남혐 성향'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의혹과 요구만으로, 작가는 본래 자신이 맡고 있던 프로그램에서 밀려났다.

또한 SBS가 여태까지 일베 관련 방송사고에 대해 취해온 미온적인 입장을 생각해보면 '유독 대처가 빠르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이지혜 기자는 <뜨거운 사이다>에서 "이 과정이 너무 신속하다는 데 놀랐다. 해당 방송사는 일베에서 쓰는 이미지를 수차례 써서 논란이 된 방송사인데 일베 논란 때마다 어떤 조치가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반면에 이번에는 너무 빠르게 조치가 됐다"고 말했다. 그것이 작가의 정신적 평안을 위한 조치였다 하더라도, 어쨌든 청취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켰고, 그 성공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비슷하듯 다른 두 사건은, 두 종류의 언행(발화)이 공적 영역에서 '왜' 그리고 '어떻게' 불공평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남혐'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정말 원하는 게 평화라면, 페미니즘 진영의 목소리를 자르는 게 아니라 보호해야 한다. 정말 '남혐'을 없애고 싶다면, 남혐적 발화 자체를 공격할 것이 아니라 '여혐'을 해소하는 데 동참해야 한다. 그 편이 윤리적으로도, 전략적으로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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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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