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초행> 김대환 감독.

ⓒ 권우성


장편 영화 데뷔작 <철원기행>으로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을 받아 단숨에 주목 받는 신인 감독이 된 김대환 감독은 올해 12월 두 번째 장편 <초행>으로 관객들을 다시 찾았다. 결은 약간 다르나 이번에도 '가족' 영화다. '가족 영화'라 해서 <초행>을 연말에 가족들끼리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보러 가는 영화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초행> 속의 가족 관계는 용광로처럼 갈등을 잔뜩 안고 있다. 그 갈등은 7년 동안 연애를 해온 남녀 주인공 지영(김새벽 분)과 수현(조현철 분)이 각자의 가족을 만나러 가면서 폭발한다.

지영과 수현의 부모님이 서로 주고 받는 대사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또 일상적이라 놀랍기만 하다. 배우들에게는 '상황'만 주고 그 상황에 따르는 대사는 현장에서 쌓았다. 지난 19일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만난 <초행>의 김대환 감독은 "영화 속 대사들의 80%는 현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밝혔다. 김새벽이 <초행>서 한 '살아봐도 모르겠으면요?'라는 대사도 이러한 '즉흥극'의 산물이다.

'현장서 원하는대로 결과물이 안 나오면 어떡하냐'는 질문에 김대환 감독은 담담하게 "그러면 현장에서 바꾸면 된다"고 답했다. 대략의 대화 내용을 배우들에게 던져주고 좋은 대사가 나오면 건져 올리는 식이었다.

"촛불집회 현장 '그냥' 담고 싶었다"

 영화 <초행> 김대환 감독.

ⓒ 권우성


- <철원기행>에 이어 <초행> 역시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학생 때부터 호기심을 갖고 생각해 온 관계였다. 장편 영화를 만들며 그 관계에 조금 더 집중하게 됐다. 영화적으로도 가족 관계는 흥미롭다. 가족 구성원 안에 세대 차이도 있고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한다. 가족을 통해 영화를 바라봤을 때 한국적인 모습을 잘 보여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 이번 작품을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었나?
"몇 년 동안 영화를 준비하면서 사는 데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살고 싶지 않다는 게 아니라 연애를 하는 중이었는데 우리 둘이 살 수 있을까? 결혼은 가능할까? 그런 막막한 지점들이 있었다. 불안을 가진 우리 세대 청춘들이 많고 그 청춘들이 영화에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보다는 옆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 용기를 갖고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 결혼을 앞둔 세대가 아닌 다른 세대에게는 어떤가?
"어제(18일)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면서 그걸 느꼈는데 한 어머니께서 '쟤네 둘(영화 속 주인공인 지영과 수현) 누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왜 그런 건(장치) 하나도 안 만들었냐'고 하시더라. 뭐랄까 어른들은 이 두 사람을 좀 더 측은하게 바라보는 것 같다. 우리 세대는 그보다는 공감을 표했고 본질에서는 두 사람의 연애에 집중해서 봤던 것 같다. 이 두 사람이 그래서 헤어지는지 헤어지지 않는지. 어른들은 두 사람을 하나의 뭉치로 바라봤다면 우리 세대는 별개로 바라본다는?"

- 전작에서도 '철원'이라는 지역이 잘 드러났다면 이번 영화에서도 각각 지영과 수현의 부모가 사는 '인천'과 '삼척'이라는 지역이 강하게 부각된다. 이유가 있나?
"아내의 본가가 인천이기도 했고 삼척에는 외갓집이 있다. 그래서 인천과 삼척을 택한 건 아니지만 문득 떠올랐다. 인천에서 2년 정도 살았을 때 도시 전체가 회색빛 같고 좀 답답했다. 고향인 춘천을 떠나 인천에 2년을 있었는데 친구들도 춘천에 있고 외로움도 커서 그랬던 것 같다. 공장 같은 것도 많고 이미지도 좀 무서웠다. 삼척은 시골임에도 큰 공장들이 있고 그런 생각들이 영감으로 나왔던 것 같다. 내가 지역에 느꼈던 감정이 잘 드러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초행'이라는 영화의 제목이 간결하고 영화 전체를 잘 함축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떤 과정을 거쳐 지어진 건가?
"전통 혼례 과정을 살펴보니 남자가 여자 쪽 집안에 가서 인사를 드린다는 단어로 '초행'이라는 말이 있더라. 이런 게 있구나 싶어 흥미로웠다. 또 시나리오에 계속 나오는 내비게이션을 잘 못 봐 길을 잃는다든지 자기들이 주차해둔 차를 어디에 뒀는지 잊고 있다든지 '초행길'을 갔을 때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불안감이 잘 맞닿아 있었다. 결혼이나 작년 촛불집회나 모두 우리에게 다 처음 있는 일이기도 했고 초행길을 가는 사람들과 닮아있지 않나 싶어 '초행'으로 정했다."

- 사실 '결혼을 앞둔 남녀'라는 영화의 전반적인 주제와 촛불집회가 약간 동떨어진 것 같다는 느낌도 있었는데 작년 촛불집회 현장을 영화 속에 담은 이유가 있나?
"일단 '찍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찍어도 되나?'라는 생각도 들었고. 혹여나 기회주의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시대의 우리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영화의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주말마다 집회가 벌어지는 상황을 모른 척 넘어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촬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단순히 수현과 지영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처음 가보는 길이었고 개인에서 사회로 확장되는 지점이 있었고. 두 사람이 손을 잡고 그 인파 속을 걷는 것 자체가 의미심장한 엔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 두 사람에게 매순간 놀랐다"

 영화 <초행>의 한 장면

ⓒ ㈜인디플러그

- 김새벽/조현철과는 어떻게 함께 작업하게 됐나.
"새벽씨는 바르샤바 한국 영화제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때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자연스러게 애써 드러내지 않으려는 연기? 연기자로서 굉장히 어려운 지점이긴 한데 캐릭터에게 집중해 편하게 연기하는 모습이 좋았다. 현철씨도 전작을 보면 이 사람이 실제 캐릭터야 아니면 조현철이야 싶을 정도로 개성이 강하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나면 어떨까 호기심이 있었고 무엇보다 선한 사람들이었다. 그 지점이 되게 중요했다. 그러면 나도 같이 작업하기 편하지 않을까? 시나리오 없이 즉흥 연출을 했을 때 선함이 있는 사람이 상황을 더 리얼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다."

- 원래 짜인 대본은 몇 퍼센트 정도였나?
"현장 즉흥성은 80% 정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흐름 정도만 시나리오에 있었다. 인천에 가서 가족들과 무슨 감정을 느낄 것인지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고 어머니와 지영의 관계는 어떤지 정도의 골격은 있었는데 살을 붙이는 건 현장에서 주로 이뤄졌다. 지영의 어머니 대사는 내가 도저히 쓸 수 없었기에 현장에서 조경숙 선배님(지영 어머니 역)이 많이 만들어주셨다. (대사가 액션과 리액션으로 구분돼있다면) 주로 액션 쪽의 대사를 내가 만들었고 리액션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김새벽의 대사인 '살아봐도 모르겠으면요?'가 나왔다."

- 장편 연출 경험이 많지 않은 감독이다. 즉흥적으로 대사를 만든다는 것이 불안하진 않았나.
"영화도 어떻게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시작했다. 한 신 한 신 집중해서 치열하게 찍다 보면 어느 순간 영화의 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사실 불안하다. 영화가 어떻게 끝날지 나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항상 하루 전에 다음날 찍을 걸 고민하다 보면 찍을 것이 나오는 상황이 반복됐던 것 같다. 어느 시점부터는 불안하지 않았다. 영화는 결과의 예술이라 찍어서 나오면 되지 않나 싶었다."

- 즉흥극이다 보니 영화를 찍는 중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을 것 같은데.
"두 사람 모두 굉장히 집중력이 좋고 영리한 사람들이라 매 순간 나를 놀라게 했다. 촬영한 첫날부터 두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 영화를 이끌어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두 사람이 같이 사는 집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첫 촬영이었는데 촬영에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흥미롭더라.

 영화 <초행> 김대환 감독.

ⓒ 권우성


- 이런 실험을 하게 된 배경이 있나.
"첫 영화인 <철원기행>은 스토리보드와 카메라 워킹 등 모든 준비를 하고 찍었고 그 나름의 성취가 있었다. 이번에는 예상치 못한 걸 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초행>을 찍기 전 <춘천 춘천>이란 영화의 제작에 참여했는데 그 영화에는 시나리오가 없었다. <초행>과 비슷하게 회의를 해서 다음 날 무슨 장면을 찍을까 논의했는데 그때 쾌락이 컸다. 카메라가 녹화되는 순간을 보고 있으면 마법이 펼쳐지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 한 번도 영화를 찍으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이번에도 그런 성취감을 느끼고 싶었다. 또 결혼이라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에서 시나리오로 가이드라인을 정해놓고 끝을 향해 달려가는 것도 의미가 있을까 싶었고 그렇게 찍는 게 결혼도 하지 않은 내게 너무 오만한 것 아닌가 싶었다."

- 결혼을 안 하셨나.
"50일 전에 했다. 영화를 찍고 나서 본격적으로 결혼을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어떤 감정의 변화가 생겼다기보다는 이전부터 결혼하고 싶었고 그렇게까지 두려워할 이유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9년 정도 연애를 하니까 인생에서 한 번도 무언가 책임져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한 번쯤 인생의 한 과정으로 필요하지 않나 생각도 들었고. 형태가 무엇이 됐든, 도장을 찍든 안 찍든, 결혼식을 하든 안 하든, 그 형태보다 같이 있다는 것 자체가 결혼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으로 된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 선택에 있어서 조금 덜 두려워해도 될 것 같다."

 김대환 감독의 <초행>(2017) 포스터

ⓒ ㈜인디플러그


김대환 감독은 계속 바빴고 앞으로도 바쁠 예정이다. 김 감독은 봉준호 감독의 차기작 시나리오를 완성했고 1월부터 프로듀서로 참여하는 작품의 촬영을 준비하고 있다. 1월 촬영이 추울 것 같아 걱정이란다. 그가 동시에 준비하고 있는 차기작에는 한 중년 커플이 춘천 청평사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이야기를 담았다고. 한 작품 정도 더 '가족'을 화두로 찍고 그 이후로는 모르겠다고 했다.


초행 김새벽 김대환 감독 조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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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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