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캐릭터 사용은 새롭지는 않은 서사라고 할 수 있다. 당장 창작 뮤지컬에서도 떠오르는 서사들이 많다. 특히 작가 서사 외에 '관념' 캐릭터가 등장하는 서사가 눈에 띈다. 이 시리즈는 작가와 관념 캐릭터를 활용하는 작품의 미덕과 나름의 아쉬움을 이야기하고자 기획됐다. [편집자말]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뮤지컬 <아가사> 재연 당시 포스터.

ⓒ 아시아브릿지컨텐츠


1926년 12월, 추리 소설 작가 아가사 크리스티가 11일 동안 실종됐다가 돌아왔다. 뮤지컬 <아가사>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은 당시 사건에 상상을 덧붙여 만든 창작극이다. 2014년 소극장 초연과 2015년 대극장 재연을 거쳤지만, 아시아브릿지컨텐츠가 폐업하면서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공연 리스트에 올라와 버린 뮤지컬 <아가사>. 이 작품을 사랑하기에 아쉬움이 많다. 이 작품은, 다루고 있는 주인공이 '여성 작가'라는 점에서부터 가시적으로 다른 작품들과 차이가 드러난다.

<팬레터> <사의 찬미> <아가사> 모두 작가의 관념을 보여주지만, 그 작가와 관념의 성별 관계도는 다르다. <팬레터>는 남성 작가의 여성 관념이 보이고, <사의 찬미>는 남성 작가(와 그의 연인 윤심덕)와 남성 관념이 보인다면, <아가사>는 여성 작가의 남성 관념이 보인다. 관념의 본체가 '여성'이라는 점은, 단순히 극의 주인공이 여자라는 점을 넘어서 이 작품이 돋보일 수 있게 한다.

필자는 <팬레터>의 미덕이 '이브 혹은 피그말리온의 전복'이라 이야기했다. 남성 인물이 주체가 되어 여성을 만드는 것은 성경의 창조 모티프에서부터 그랬듯 다소 흔하다. 제1 인간은 주로 남성이었다. <아가사>는 그 점을 깬다. 아예 남성이 여성을 만드는 서사 자체를 뒤엎어버리는 것이다. 로이는 아가사로부터 만들어졌다. 제1 인간이 여성이었다는 점에서, 지금 봐도 뮤지컬 <아가사>의 미덕은 돋보인다.

이분법의 전복


이성과 감정은 각각 남성과 여성의 특징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뉘었다. 이성과 남성은 긍정되고, 감정과 여성은 부정되는 양상이 많았다. 하지만 이 뮤지컬에서는 그 구분 자체를 뒤엎는다. 아가사와 로이를 살펴보자. 로이는 시종일관 '죽여 버려요'를 외치는, 아가사의 '살의'이다. 살의는 가장 극단적이고 강렬한 감정이나 욕망이라 읽을 수 있다. 그런 로이를 만류하는 건 아가사이다. 물론 이야기가 전개되며 스스로 분노에 차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 이전까지 아가사는 도덕을 이야기하는 인물이었다. 이 점에서 아가사는 로이에 비해 이성적 존재라 읽을 수 있겠다. 또한, 주목할 점은 아가사가 '작가'라는 점이다. 특히 추리 소설 작가이다. 플롯을 짜고, 범죄를 스케치하는 추리 소설 작가. 로이를 떼 낸 아가사의 모습은 실로 이성적인 인간이다.

<아가사>는 여기서 통상적인 이분법에 몇 가지 변주를 준다. 첫째, 감정적 존재인 남성 인물과 이성적 존재인 여성 인물의 배치이다. 둘째, 하지만 그 남성 인물은 여성 인물의 일부이다. 이때 여성 인물은 '감정적 존재'나 '이성적 존재' 한 가지로 정의되고 대상화되는 존재가 아니다. 여성 인물은 이성적이고 감정적인 영역이 모두 공존하는 인물로 존재한다. 나아가, 인간의 성질은 '이성적이다' '감정적이다' 한 가지로 온전히 설명할 수 없음을 보인다.

또한, 이성과 감정의 위계질서에 주목해본다. 아가사가 일상이라면 로이는 일탈이다. 일탈은 또한 비이성적 영역으로 분리되며 부정적인 것, 막아내야 하는 것으로 존재해왔다. 하지만 작품 속 로이는 실로 매력적인 남성 캐릭터다. 일탈, 비이성적 존재, 감정, 부정적인 것이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진다는 것은, 이성과 감정의 이분법적 구도와 위계질서에 한 번 더 흠집을 내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상징성들의 입체성

또한 '테세우스 신화(아리아드네의 협력을 얻어 미궁에서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친 그리스 영웅)'와 <아가사>가 상응하며 나타나는 상징성들은 고정되지 않고 입체적이다. 예를 들면 아가사가 테세우스일 때 레이몬드는 붉은 실이고 아리아드네일 것이다. (이 맥락에서 <아가사>는 아가사라는 여성 영웅을 내보이는 영웅 신화적 작품으로 읽힐 수 있다) 이때 로이는 괴물이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괴물과 다른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고 괴물은 테세우스를 사랑한다. 둘은 서로의 조력자가 된다. 또 레이몬드는 아가사가 미궁 속에서 죽이고 싶어 하는 존재 중 하나였다는 점에서 그 또한 괴물이 될 수도 있다.

또 액자 밖을 중심으로 보면 레이몬드는 테세우스다. 그 미궁 속으로 들어가 악몽을 유발하는 괴물을 물리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아가사는 아리아드네가 된다. 하지만 동시에, 아가사의 실종 사건이 레이몬드에게 악몽을 유발하던 이유였다는 점에서 아가사는 괴물일지도 모른다.

이는 얼핏 들었을 땐 무슨 뜻인지 이해되지 않는 말들일 것이다. 하지만 <아가사>에서는 아주 아름답게 녹아있다. 그리고 이는 극의 주제와도 맞닿는다. 이는 세상의 이분법이 그토록 명확하게 나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인했을지도 모른다.

살해 없는 관계

살해 없는 세계는 <아가사>가 보여주는 미학의 정점이다. <아가사>는 의외로 따뜻한 뮤지컬이었다. 대표 넘버 중 하나가 '널 죽이고 싶어'라는 아주 직관적인 제목임에도 말이다. 아가사는 살의에 불타다가도 이내 정신을 차리고 칼을 거둔다. 그리고 로이가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됐을 때, 이제는 로이를 죽이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로이를 죽이지 않는다. 대신 로이에게 이야기한다. 사라져 달라고. 로이는 그런 아가사의 말을 따른다. 아가사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어떤 살해도 없다.

살해로 상징되는 세계는 오이디푸스로 대변되는, 남성적 세계의 전형적 계승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가사>에서는 그런 살해가 없다. 애초에 아버지 없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은 어머니와 같은 위치의 베스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 베스조차 살해당하지 않는다.

액자 밖에서 돋보이는 아가사와 레이몬드의 관계가 그러하다. 사실 레이몬드가 아가사를 살해한다고 해도 이는 크게 무리인 설정은 아니다. 결국, 자신의 악몽의 원천이니까. 하지만 둘은 대신 서로의 붉은 실이 되어주는 것을 택한다. 아가사에게는 레이몬드가 과거 미궁 속에서 나올 수 있던 붉은 실이었다면, 현재에서 아가사는 레이몬드의 붉은 실이 되어준다. 그 끝없는 악몽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붉은 실.

세대 간의 교체를 설명하던, 가장 오래된 담론은 아마 오이디푸스라는 서양적 신화였을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상징하는 게 정말 말 그대로의 부친 살해는 아니다. 하지만 어쨌든 최소한 아들은 아버지를 무찔러야 한다. 새로운 세대는 오래된 세대를 물리쳐야 한다. 그리고 오래된 세대는 그런 새로운 세대를 견제해야 한다. <아가사>에서는 그런 게 없다. 이미 유명 추리 소설 작가가 된, 일종의 구세대인 아가사와 젊은, 신세대의 추리소설 작가 레이몬드는 절대 투쟁하지 않는다. 이 서사가 보여주는 것은 신세대와 구세대가 그렇게 대립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오히려 화합할 수 있다는 일종의 희망이다.

괴물의 긍정, 미로의 긍정


참 재밌는 것은, 그렇게 로이를 죽이고 싶어 하던 아가사가 다시 로이를 찾아갔다는 것이다. '추리 소설을 쓴다는 것은 거대한 미궁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이유로. 자신의 감정이나 욕망을 만나는 것,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만나는 것, '괴물'을 만나는 것. 괴물은 내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존재다. 치명적인 독이 될 수도 있지만, 정도에 따라 그는 약으로 쓰일 수도 있다. 괴물은, 긍정적인 존재다.

생각해보면 아가사와 로이의 관계도 그랬다. 아가사는 로이를 살해하지 않았다. 그가 괴물이라고 해도, 죽이지 않는다. 대신 이야기한다. 사라져 달라고. 로이는 그런 아가사의 부탁에 수긍한다. 그리고 아가사의 행복을 바란다. 다소 허무할 수도 있는 이 결말은,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결말이다. 아가사와 로이가 분리된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로이의 아가사에 대한 애정은 결국 자기애다.

로이를 죽이지 않은 데에 대해서, '그냥 로이가 자신의 일부이기 때문'이라고 반론할 수도 있겠다. 이 반론은 오히려 <아가사>의 장점이 된다. 극 중 '괴물'로 상징되는 로이가 주체이자, 주인공이며, 일종의 영웅과도 같은 아가사의 일부이다. 이는 이분법을 전복시키는 <아가사>의 미학으로 회귀한다. 내가 괴물일 수 있다는 것. 내가 빠져 나오기 힘든 미로 그 자체일 수 있다는 것. 이 이야기는 더 비극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우리가 모두 그렇기 때문이다. 우리는 온전한 선이 될 수 없으니까.

<아가사>는 긍정한다. 괴물을, 미로를, 그 타자인 것들을 주체인 나와 동일시하면서 말이다. 괴물은 더 나를 해치는 존재가 아니다. 나를 사랑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자기 자신이며, 그러기에 나를 위해줄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니까 아가사는 몇 번을 거쳐 타자들을 복원해내는 셈이다. 젠더 권력 내에서 타자였던 여성을, 억압당하던 감정을, '괴물'과 '미로'를.

객석을 나와서, 일상으로

<아가사>가 얘기하는 것은 일상과 일탈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다. 일상은 이성, 도덕, 규범의 세계라고 읽을 수 있다. 이분법에 의하면 그들은 욕망, 감정 등의 일탈적 세계와 구분되는 듯하다. 하지만 <아가사>에서 이는 결코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아가사의 일부가 로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연극·뮤지컬 계에서 흔히 사용하는 '관념' 캐릭터를 그대로 차용한 듯 보이지만, <아가사>는 오히려 그 설정으로 작품성을 더한다.

이는 다시 객석을 나와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관객들에게 이어진다. 결국,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극 중 아가사와 관객들은 공통점을 지닌다. <아가사>는 그 일탈마저 긍정한다. 추리소설을 쓰기 위해, 거대한 미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긍정한다. 그 일탈이 존재하는 삶을 긍정한다. 그 일탈은 굳이 '살의'와 같은 거대한 감정이 아니어도 된다. 이성적인 삶에서부터 어긋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일탈처럼 여겨오도록 학습하지 않았나.

어쩌면 공연을 보는 것, 그리고 사랑에 빠지는 것도 일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던 행위였을지도 모른다. 취미 생활은 이성적 일상으로는 여겨지지 못하는 작은 일탈들이다. <아가사>에서 이는 상관없다. 우리는 각각의 추리 소설을 쓰고 있고, 그러기 때문에 그 미궁으로 들어가는 것쯤이야 괜찮다. 이 점은 아가사가 여성 인물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또 의미를 더한다. 공연계의 관객 다수는 여성이다. <아가사>는 여성 관객이 이입하기 쉬운 여성 주인공을 통해, 작품 외적으로도 소외됐던 이들에게 힘을 실어준다.

물론 <아가사>가 완벽한 작품이었던 것은 아니다. '추억 미화' 탓에 더 좋은 작품으로 기억되는 면모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뮤지컬이 보여줬던 작품성과 가능성은 충분했다. 부디 이 작품을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미궁 속으로 사라지기엔, 이 작품, 너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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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까칠하게 공연을 보고, 이야기 합니다. 때로 신랄하게 '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잘 만든 작품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하지 않을까요? / 해외 관극도 함께하며, 잘 만든 서사를 기다리는 중.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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