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지 불가해한 모습들, 설명하기 어려운 발견하지 못한 인간성을 담고 싶었어요." (감독 김의석)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을 수상한 영화 <죄 많은 소녀>는 여고생 경민의 죽음 이후로 삶이 급변한 또래 친구 영희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다. 인물들은 저마다 진실을 증명하려고 의심하고 자학하고 외면하지만, 갈등 속에서 진실에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없다.

경민의 죽음을 친구의 탓으로 돌리는 한솔과 딸 경민의 죽음 원인을 타인에게서 찾으려는 어머니의 모습은 또 다른 희생을 되풀이하게 한다. 마치 그들은 죽으러 가는 인간의 뒷모습처럼 보인다. 감독은 이를 출구 없는 삶, 인간성의 오류라고 했다.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을 선택했어요. 자학 행위가 굉장한 오류인 거죠. 그런 오류들의 과정을 담아내고 싶었어요. 가해자는 존재하지 않지만 나를 향한 어떤 시선들이 존재하죠. 누군가에게 내가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화내거나 대응하고 싶은데 대응할 상대가 없거나 너무 많은 거죠.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 방향성이 자신에게 향하는 모습을 담아내고 싶었던 거죠. 영희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들도요. 비극적이라 느껴졌어요." (김의석)

 영화 <죄 많은 소녀> 스틸컷

영화 <죄 많은 소녀> 스틸컷 ⓒ 죄 많은 소녀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 가시밭길을 가는 영희 역은 전여빈이 열연했다. 이 작품으로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과 제43회 서울독립영화제 '독립스타상'을 품었다.

"글의 무게가 상당했어요. 감독님이 묻지도 않았는데, 제 안에 있었던 무언가 감추고 싶은 기억들, 나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변호하고 싶었던 나날들을 이야기를 하게 되었어요. 감독님이 너무나 잘 들어주셨어요.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이야기해주셨고, 글의 무게가 훨씬 던 단단하게 제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배우 전여빈)

거짓 증언하는 한솔 역은 고원희가 맡았고, 영희 목에 난 구멍에 손을 얹고 눈물 흘리는 다솜 역은 이봄이 연기했다.

"제가 경험하지 못한 이야기이고 감독님이 만들어주신 인물이니까 감독님과 대화를 많이 했어요. 시나리오 분석도 많이 했고요. 촬영하면서 힘든 순간이 있다면 저희끼리 손잡고 응원해주었어요. 산책하고 다독이면서 촬영을 했습니다." (배우 이봄)

6일, 인디스페이스에서 관객과의 대화가 열렸다.

감정의 혼란

작품은 김의석 감독과 함께 살던 친구가 실종되면서 그가 겪은 원망과 분노, 그리움과 부끄러움, 실패 등 감정의 혼란에서 기원했다. 온전히 감독 자신의 이야기다.

"소중한 친구를 잃고 감정을 꽁꽁 싸매고 영화를 멀리하고 지내고 있었어요. 어느날, 영화로 담아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제가 아직 살아남아 있는 이유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김의석)

감독 자신을 투영한 인물은 죽음의 원흉으로 지목되고 자살 시도를 하는 영회뿐만 아니라, 모든 인물이다.

"교장 선생, 담임 선생이 자기식대로 학교를 지키려 외면하는 모습들이 제가 경험했던 제 안에 있는 모습 중 하나였어요. 그 인격을 다 쪼개서 캐릭터에 부여해서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실제로 제가 경찰서에 조서를 쓰러 갔었어요.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 달라 해서 기록을 남겼어요. 편하게 써달라고요. 썼어요. 쓰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쓰고 읽어봤는데 다 핑계만 대고 있더라고요. 제가 그렇게 사랑했던 친구인데요. 내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근데 마지막에 밝혀졌으면 좋겠다고 쓴 거예요. 저 자신이 너무 비열해 보였었어요." (김의석)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한계를 체감했다는 감독의 말을 통해 추리하면 영희의 결백 증명은 자신 스스로의 결심이라기보다 마녀사냥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처럼 보인다.

"죄책감은 누가 느끼라고 하지 않아도 느끼죠. 하지만 그걸 가지고 있지도 못해요. 이 경계 안에 있는 사람들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다솜도 그 하나의 모습이었어요. 그래서 영희에게 증명을 받고 나는 너의 편이라는 것을 확인을 받고 싶어 하는 모습을 넣었어요. 영희에게 집중되는 이 드라마가 살짝 넓어지게 해서 주변 인물들이 다 그렇구나, 혹은 우리도 그렇구나 느끼게 하는 거죠. 카메라는 항상 조금 낮은 아이의 높이에서 존재해요. 우리도 그중에 하나인 거죠." (김의석)

모든 것에 대한 의심

인물들은 자신의 목소리 혹은 자신이 듣고 싶은 목소리를 찾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타인에게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사건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극단적 태도를 보이고, 타인을 향한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자해하고 모의한다.  영희는 생리를 의심하는 양호 선생에게 불쑥 피 묻은 생리대를 꺼내 보여준다.

"의심을 당하는 과정에서 증명해야 하는 것을 봤어요. 방심하는 사이에 도전적으로 확 내밀어야겠다. 영희는 이런 일에 질린 거죠. 생리대 장면은 영화와 결부해서 이야기하면, 우리는 계속 심문을 통해서 미스터리 영화를 풀어가는 것처럼 그 날의 진실에 도달했다고 봐요." (김의석)

감독은 이 장면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매번 일어나는 일이잖아요? 매번 일어나는 일지만 저는 이 고통을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 장면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남자인 제가요. 논란이 되더라도 확실하게 넣어 소통이 전혀 될 수 없는, 배려가 전혀 없는 이 사회를 확실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요. 논란이 되고 불편하신 분도 계시겠지만 비극이잖아요? 아주 가까운 곳에서 계속 일어나는 일이고요. 그것에 대해 말 못하고 의심을 하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김의석)

 감독 김의석

감독 김의석 ⓒ 김광섭


같은 여성조차도 이를 의심하는 상황은 감독이 영화를 통해 지속해서 증명하고 싶은 메시지다. 그는 성별의 구분 없이 이 장면을 한 사람의 시위로 봐주었으면 싶겠다고 강조했다.

"친구와 가까워졌고 진실에 도달했으며 소통했다고 생각하는 이런 과정들... 계속 대화하고 말과 생각을 나눈다고 착각하고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티끌만큼도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수화 장면도 마찬가지고요." (김의석)

'나는 여러분이 원하는 나의 죽음을 완성하러 왔습니다.' 영희가 자살 시도 후 학교에 돌아와 수화로 친구들에게 말을 건네는 장면이다. 자살 후유증으로 전처럼 온전하게 말할 수 없지만 그가 처음으로 내는 무언의 목소리다. 하지만 친구들은 수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어색하게 손뼉 치며 돌아온 영희를 환영한다. 감독이 말하는 비극이다.

초반부 영희와 한솔, 경민이 한 공간에 있는 장면이 나온다. 그 안에서 비밀스러운 귓속말이 오가고 지하철 플랫폼 장면으로 이어진다. 경민은 영희와 한솔을 향해 소리친다. 터널이 시작되기 전, 경민의 죽음 이전이다.

'심장을 찔러 흘린 피로 금단을 견디는 가시여. 네가 애써 감추어놓은 너의 빛이 조금은 너 자신도 비추기를'

- '죄 많은 소녀'보다 영문 제목인 'After My Death'가 더 영화와 가깝지 않나요?
김의석 "'죄 많은 소녀' 영문 제목에 정이 가는 부분이 있어요. 'My'가 들어가기 때문이죠. 제목을 볼 때마다 저의 죽음 뒤에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서 정이 가요. 번역해볼까 생각도 했어요. 번역하지 않고 '죄 많은 소녀'로 택한 이유는 이 인물들을 통해서 세상을 더 확실하게 보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제목을 통해서 연상되는 인물들이 있을 거로 생각했어요. 제가 하고 싶은 화두에 대한 것을 너무 펼쳐놓으면 관객분들이 길을 잃으실까 봐 '죄'라는 단어를 썼어요. 종교적인 은유를 넣었죠. 패러디를 했죠. 인간의 실패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감지만 되는 정도로요."

 배우 전여빈

배우 전여빈 ⓒ 김광섭


- 서영화 배우와의 연기 호흡은 어땠는지?
전여빈 "극 중에서 서로 표독스럽고 살 떨리게 완전히 마주한 상황이잖아요? 적으로요. 촬영장 안에서는 저를 정말 많이 챙겨주셨어요. '할 수 있다', '용기를 낼 수 있어' 해주셨죠. 어느 순간에 감정이라는 것이 극한에 닿아 연기를 해야 하는데 저는 사회화가 된 나머지 화를 덜 내는 것, 참는 것이 연기를 자꾸 방해하는 거예요. 스물아홉 해 동안 사회 속에서 살았잖아요? 선배님이 그것에 대해 말해주셨어요. '여빈아, 너는 할 수 있어. 너를 그냥 놓아도 돼. 해도 돼' 해주시는 거예요. 내가 지금 정말 함께 해주는 사람들을 위하고 있다면, 나 스스로의 내 시간을 위하고 있다면, 정말 진실로 이것을 잡고 싶다면, 집중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정말 그러려고 서로 굉장히 노력했어요. 선배님은 나름대로 정말 몰입했고요. 저는 선배님만큼은 잘 안되더라고요. 계속 깨지기도 했어요. 그때마다 붙잡아 준 것은 감독님, 스태프님, 동료들, 선배님 항상 할 수 있다 해주셨어요."

- 인물을 여고생으로 설정한 이유가 있다면?
김의석 "시나리오를 쓰는 내내 기억을 떠올리고 알 수 없는 이유들을 복기하면서 정확하게 표현할 캐릭터를 찾고 싶었어요. 그런데 불안하고 예민하고 감정적으로 표현의 폭이 넓은, 더 많이 느끼는 캐릭터가 필요했어요. 고민하던 끝에 여고생을 생각을 했어요. 영희 모습을 생각했죠. 그 아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짜나가니 증폭이 되면서 여성의 이야기가 되어갔어요. 나름의 공부를 통해 누구를 대변하겠다가 아니라, 나도 그가 되려고 하고, 그녀도 내 모습이고요. 성별을 떠나서요."

 배우 이봄

배우 이봄 ⓒ 김광섭


- 다솜을 연기하면서 찍기 힘든 신은?
이봄 "공감이 되지 않는 감정은 없었고요. 표현하는 부분에 대해서 많이 고민했어요. 병실에서 영희를 만났을 때, 영희 목에 특수 분장이 되어 있었거든요. 보자마자 왈칵 눈물이 나는 거예요. 죄책감이랄까? 너무 마음이 안 좋아서 눈물 글썽이면서 '저 아무렇지 않게 못할 것 같아요. 언니, 나 마음이 슬픈데…' 언니와 감독님이 다독여주셔서 진정하고 다솜으로 돌아가서 연기를 해야겠다 그런 부분들이 있었어요. 어려웠던 장면은 제일 처음에 영희에게 '아니지?' 하는 부분이에요. 세 글자인데, 감독님과 며칠을 이야기했어요. 짧은 롤인데 몇 시간 오래오래 촬영을 했었고요. 병실 장면 뒤로는 갈수록 굉장히 편해졌어요. 세게 맞기도 하고 자해도 하는 부분이 어려웠을 거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런 부분들은 어렵지 않았고요. 막가는 거로 보이실 수 있는데, 감독님께서 연기하면서 계속 의심해달라고 많이 요청했어요. 자기 연기에 대해서 너무 확신하지 말라고요. 선생님을 고발하고 스스로 자해하는 행동들이 다솜으로서 확신을 갖고 한다고 생각을 안 했고요. 하는 거 맞나? 아닌가? 굉장히 고민했는데 제가 그렇게 가고 있는 거예요. 의심해달라고 하는 부분들이 도움이 되었어요."

- 마지막 인사를 전하다면.
김의석 "오랜 기간, 확실하게 사람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 영화를 그만두었다가 다시 돌아온 겁니다. 발견되지 않은 인간성, 숨기고 싶은 것을 계속 이야기하고 싶어요. 미스터리 스릴러 아닙니다. 팬시하려고 만든 영화도 아니고요. 진짜 진솔하게 제가 느끼려고 만든 영화입니다. 처절하게 인간이 무엇인가 이야기하고 있구나, 벽에 부딪히고 있구나 솔직한 모습을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죄 많은 소녀> 영문 포스터

<죄 많은 소녀> 영문 포스터 ⓒ KAFA


뒷이야기

* 전여빈은 대본을 핸드폰으로 읽다가 글의 무게가 벅차 제본한 뒤에야 비로소 온전히 읽을 수 있었다.
* 감독은 2년간 작품을 구상했다. 같이 살던 친구의 실종 이후, 그가 느낀 감정의 혼란들이 작품에 투영되었다. 
* 생리 중인 영희가 양호실을 찾았을 때, 의심의 눈빛을 보낸 양호 선생에게 피 묻은 생리대를 꺼내 보여주는 장면은 여성 스태프만 참여해 촬영을 진행했다.
" "한국영화에서 생리대를 적나라하게 가는 장면이 있나요? 없잖아요. 성인 여성이면 매달 하는 거예요. 이것을 왜 말을 못하나요?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시기를 안보내고 있는 사람은 모르는 아주 큰 아픔이에요." (전여빈)
* 감독은 영희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 "죽으러 가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로 끝났으면 했어요. 잡을 수 없는 어둠으로 들어가고, 들어가는 중이라 생각했어요"라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월간 <세상사는 아름다운 이야기> 2018년 1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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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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