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곤조곤'은 책과 영화, 드라마와 노래 속 인상적인 한 마디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무심코 스치는 구절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이야기로 풀거나, 그 말이 전하는 통찰과 질문들을 짚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MBC주말드라마 <왔다! 장보리> 중 한 장면.

MBC주말드라마 <왔다! 장보리> 중 한 장면.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짜 신분'을 사는 악역이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상황 파악조차 못 할 때 오직 이들만이 게임의 규칙을 알고 뛰어든 선수가 된다. ⓒ MBC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 가운데 주인공이 가장 할 일이 없는 장르는 무엇일까? 아마 한국 방송계가 너무도 사랑하는 '출생의 비밀'을 다룬 작품일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다. 부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여러 사연을 통해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이들은 생계를 위해 다양한 일을 한다.

하지만 서사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큰 의미는 없다. 이들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지 일상에서의 부차적인 활동이 아니다. 그래서 주인공에게 드라마는 하나의 '자격시험'과도 같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그들이 얼마나 자신의 원래 자리에 적합한 품성을 지녔는지 보여주는 데 할애된다. 그러니 사람들의 볼멘소리처럼 이들은 너무도 자주 연애에 빠진다. 할 게 없는데 그거라도 해야지.

말하자면 출생의 비밀을 다룬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주체적인 개인이기보다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와 같은 역할을 맡는다. 잠들어 있거나, 모르거나, 기억이 없거나 보통은 셋 중 하나다. 물론 자신의 정체를 깨달은 이후부터 적극적으로 원래의 위치를 쟁취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크게 의미는 없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조력자라, 이미 깔아 놓은 레드카펫을 걷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런 류의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짜 신분'을 사는 악역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들만이 정해진 운명에 맞서 이겨내려 하기 때문이다. 보통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할 일을 이 캐릭터들이 도맡는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상황 파악조차 못 할 때, 오직 이들만이 게임의 규칙을 알고 뛰어든 선수가 된다.

'출생의 비밀' 드라마, 악인에겐 '멜로'가 되는 이유

하지만 역시나 문제는 장르다. 출생의 비밀을 다룬 대부분의 드라마는 철저하게 혈연중심적이며 가부장적인 가치를 고수한다. 만약 주인공의 부모들이 '핏줄은 됐고 기른 정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거나 혹은 두 가치를 등가로 놓는다면 이야기는 시작조차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장르에서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자신이 태어난 집안으로 돌아가 족보의 순수성을 되찾고 (대부분 우연을 가장하지만) '작가가 점지해 준' 이상적인 배우자와 이어져 가계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의 소위 '원래 자리'를 차지한 캐릭터는 필연적으로 악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퇴출의 명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시청자들이 이들이 고분고분하게 자신이 태어난 집안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에 설득이 될 리는 만무하다.

 MBC주말드라마 <왔다! 장보리> 중 한 장면.

악역인 연민정(이유리 분)이 저항하고 반항하지만 예정된 실패와 좌절, 처벌의 결말이 기다린다. 주인공에게는 우화와 같은 드라마가 악역 입장에서는 '처절한 멜로 드라마'인 셈이다. ⓒ MBC


그래서일까, 어린 시절 나는 이런 류의 드라마를 볼 때면 이상하게 주인공을 방해하는 악역들을 은근히 응원하곤 했다. 심지어 예정된 수순에 따라 이들이 자멸하고 대가를 치르거나 심지어 죽음을 맞이할 때면 펑펑 울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내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의심했다. 나중에 깨닫게 된 사실은 그때에도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캐릭터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악인이 되었음을. 그래서 정해진 운명에 맞서 갖은 고투를 벌이지만, 결국은 '다시 밑으로 굴러떨어진 바위를 미는 시시포스'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악역인 인물이 저항하고 반항하지만 예정된 실패와 좌절, 처벌의 결말이 이들을 기다린다. 주인공에게는 우화와 같은 그 드라마가 악역들 입장에서는 '처절한 멜로 드라마'였던 셈이다.

날 무너트린 대사 "나보다 열심히 산 사람 나와 보라고 해!"

한국 드라마에는 인상적인 악역이 많지만 그중 최고를 뽑으라면 나는 <왔다! 장보리>의 연민정을 택하고 싶다. 그야말로 독보적이라 할 그녀의 악행 이력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연민정의 대사 한 마디에 무너졌다.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는 "나보다 더 열심히 산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다.

그렇다. 사람들이 끔찍할 정도의 답답함을 호소할 정도로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지나치게 멍청했고, 이야기 전개에 기여하는 바가 별로 없었다. <왔다! 장보리>에서 가장 머리를 많이 쓰고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열심히 산 유일한 캐릭터는 연민정이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이유로 그녀는 충분한 대가를 얻기는커녕 '장렬하게' 산화하고 만다. 이쯤 되면 '도대체 핏줄이 뭐길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연민정은 이 드라마에서 강한 억울함을 드러낸다. 나쁜 짓을 하는 주제에 끝도 없이 남 탓을 한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이 캐릭터의 뻔뻔함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연민정은 그런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나는 그녀의 감정을 다른 방식으로 읽게 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왔다! 장보리>의 연민정이 보이는 억울함이기도 하지만, 하필이면 주인공이 태어난 집안에서 그녀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이유로 악인이 될 팔자를 부여받을 세계에 던져진 캐릭터의 감정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되면 별다른 노력도 없이 타고난 핏줄만으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장보리가 연민정은 이유도 없이 미웠을지도 모른다.

 MBC주말드라마 <왔다! 장보리>의 한 장면

MBC주말드라마 <왔다! 장보리>의 한 장면. <왔다! 장보리>에서 가장 머리를 쓰고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열심히 사는 유일한 캐릭터는 연민정이었다. ⓒ MBC


'몰락 혹은 죽음'... 악역 위한 다른 엔딩을 바라며

물론 <왔다! 장보리>는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이야기고 연민정이 그 속에서 정당한 결론에 도달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나는 그 점을 부정하고 싶은 게 아니다. 다만 그럼에도 연민정은 미워할 수만은 없는 캐릭터이고 단순한 악당이기를 넘어서기에 복잡한 심경을 안겨준다는 것이다.

사실 그녀가 저지른 무수한 범죄와 악행을 차치한다면, 연민정과 나 사이에는 다른 점보다 비슷한 점이 더 많다. 연민정의 타고난 핏줄처럼 나 역시도 가진 핸디캡이 많다. 그걸 넘어서 보려고 발버둥을 쳐보지만 되는 일이라곤 별로 없다. 그사이에 '날 때부터 가진 게 많은 사람들'은 하는 일에 비해 너무도 잘 사는 것 같다. 솔직히 억울하다. 그래서 때로는 연민정이 안타깝다. 그녀가 몰락하는 편이 방송되던 날, 나는 문자 그대로 '술병을 끌어안고' 뒹굴었다.

아무튼 이렇게 퇴장했던 연민정은 이후 다른 드라마에 '깜짝 등장'을 했다. 김순옥 작가의 또 다른 드라마인 <언니는 살아있다!>에서다. 이 드라마에서 그녀는 등장인물인 금 회장의 요청을 받고 악역인 양달희를 속여 사군자를 빼돌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여전히 '연민정스러운' 비범한 면모를 감상하며 나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차라리 핏줄 드라마 속 연민정과 같은 악역들이 권모술수와 속임수에 능한 자신의 재능을 일찌감치 깨닫고, <언니는 살아있다!>에서 그랬던 것처럼 높으신 분들의 일 처리를 도와주는 '해결사'로 진로를 틀어버리는 건 어떨까(좋은 재능을 대가도 없는 나쁜 일에 쓰느니 말이다).

무수한 연민정들을 위한 결말이 '몰락 혹은 죽음'뿐인 것이 이제는 너무도 시시하지 않은가. 나는 한번쯤 장보리가 아니라 연민정이 주인공인 모험담을 보고 싶다. 사기도 치고 나쁜 짓도 저지르지만, 기어코 원하는 것을 얻어 내는 여성들의 기가 막힌 모험담 말이다.

  MBC 주말드라마 <왔다! 장보리>에서 연민정 역의 배우 이유리가 24일 오후 서울 동대문의 한 호텔에서 오마이스타와의 인터뷰를 마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MBC 주말드라마 <왔다! 장보리>에서 연민정 역의 배우 이유리가 지난 2014년 10월 24일 오후 서울 동대문의 한 호텔에서 <오마이스타>와의 인터뷰를 마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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