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트로이의 목마

 영화 <분노>의 포스터

영화 <분노>의 포스터 ⓒ 토호


이곳은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도쿄,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부부가 무참히 살해된다. 범인은 곧바로 도주, 이후 성형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언론은 범인의 특징으로 거론되던 '뺨에 연이은 점 세 개'가 사라졌음을 주목하라 말한다. 그리곤 주변을 둘러보라 경고한다. 이후 화면이 바뀌어 세 개의 도시에서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들은 각각 낯선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니까, 용의자는 총 세 명이다. 영화는 그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만약 당신이 트로이의 목마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기능했는지 잘 알 것이다. 우리가 몸서리쳐지는 한파에 몸을 웅크리고 옷을 두르듯, 트로이도 완고하게 성벽을 닫았었다. 그런데 그 성벽은 트로이의 목마 안에 숨어있던 적군들과 그것을 들여보낸 아군 탓에 손쉽게 무너지고 만다. 트로이의 목마라는 단어가 유명한 것도, 무서운 것도 그 때문이다. 내부로부터 퍼져나오는 그것, 어쩌면 우리에게도 있을지 모르는 그것이 바로 <분노>(2016)다.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데, 무언가 다른 의미를 숨겨둔 것 같지도 않다. 분노는 말 그대로 분노이며 그것을 설명할 단어는 그것 하나밖에 없다. 영화 속의 그들은 분노하고 있으며 그들을 보는 우리 또한 그렇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우리는 그들의 분노가 왜, 어디서, 어떻게 생기는지 자세히 캐물은 적이 없다. 또한 우리 스스로에게도 그렇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트로이의 목마는 분노와 같은 맥락에서 읽혀야 한다. 우리, 트로이는 적군에게 멸망하지 않기 위해 성안에 들어온 거대한 목마를 의심하고, 두들겨야 한다. 그 속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 있으며 뒤늦게 사태를 수습해봐야 모든 것이 사라지고만 후다. 프로이트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억제된 감정이 밖으로 뛰쳐나오기 위해 아무 탈이나 뒤집어쓴 것이다. 목마 안에는 적국의 병사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분노 안에는 의심이 있다.

물론 이 영화가 의심을 주제로 했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해석이다. 마치 교과서처럼 영화는 줄곧 그들이 다루는 감정의 골을 밟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옛 트로이의 유적만큼 파괴된 마음만이 남아 바닷가에 메아리친다. 하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듯 우리는 이 영화의 진행과 결과보다 그 원인에 물음을 던져야 한다. 왜 그들은 의심하고, 분노하게 되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영화는 세 집단의 이야기를 차례로 교차하며 보여준다. 그것은 동시대에 일어나며 하나의 사건에 영향을 받는다. 세 나라의 평온한 일상에 갑작스레 목마가 하나씩 들어오고, 그들은 그것을 신의 선물쯤으로 여기며 환대한다. 아이코는 타시로와 결혼을 결심하고, 유마는 나오토를 집에 들이며, 이즈미는 외로운 섬에 머무는 타나카에 관심을 둔다. 그런데 아주 흥미롭게도 그들에게 다가온 낯선 이를 사랑하는 것도, 그것이 의심으로 바뀌는 것도 순식간이다. 누군가 그들에게 낯선 이를 어떻게 믿느냐며 구박을 주던 것은 티브이 속에 비친 현상수배 포스터의 실루엣과 겹쳐지며 사실이 된다.

사랑과 의심, 같은 감정?

 영화 <분노>의 한 장면, 왼쪽부터 오오니시 나오토 역의 아야노 고, 후지타 유마 역의 츠마부키 사토시, 둘은 동성 연애를 하고 있으며 게이 클럽에서 만나게 되었다. 영화는 이들을 통해 도쿄의 풍경을 비춘다.

영화 <분노>의 한 장면, 왼쪽부터 오오니시 나오토 역의 아야노 고, 후지타 유마 역의 츠마부키 사토시, 둘은 동성 연애를 하고 있으며 게이 클럽에서 만나게 되었다. 영화는 이들을 통해 도쿄의 풍경을 비춘다. ⓒ 토호


디서 온지 모를 누군가와, 그를 사랑하는 감정은 사실상 같은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말하자면 둘 다 외부에서 주입된 것이다. 그를 사랑하는 이유도 없고, 의심하는 이유도 없다. 단지 주변인들의 한 마디는 바싹 마른 장작처럼 쌓여 활활 타오르는 성화를 만든다. 그 불은 전신에 번져 온전한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한다. 아니면 이렇게 볼 수도 있다. 목마는 인물 자체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이라고 말이다. 그들에게 주입된 것은 인물이 아니라 사랑이었기에 그만큼 활활 타오르는 것이다. 그 불의 에너지가 반대로 행해진 의심이 그토록 타오르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사랑엔 목적이 없다는 것일 텐데 그 점에서 영화의 서사는 힘을 받는다. 우리는 범인이 왜 살해를 했는지, 그들은 왜 낯선 이를 사랑하는지 알 수 없다. 한눈에 보기에 영화가 추리극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지만 범인보다 인물에 집중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리라. 이 영화에서 추리해야 할 것은 그들의 감정이라는 뜻이다. 왜 사랑하고 왜 의심해야 하는지, 결국은 영화의 제목처럼 우리는 분노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 그 두 감정이 어떻게 분노가 되는지 추리해야 한다.

이 영화의 의심과 사랑, 그 감정의 시작과 끝을 떠올려 보자. 영화의 첫 장면에서 카메라는 사건이 벌어진 도시의 전경을 아주 널찍이 잡는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사건이 끝난 시골의 바다를 아주 널찍이 잡는다. 그 널찍한 둘의 관계는 드넓은 감정의 부피를 나타내는 수미상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반대되는 점이 너무 많다. 낮과 밤, 시골과 도시, 다음 쇼트에 나오는 여자아이와 시체들. 이제 그 단어들에 위의 감정을 부여하면 느낌이 달라진다. 사실은 수미상관도 반대도 아닌 연쇄된 것이다.

첫 장면에서 범인이 도주한 것으로 의심의 싹을 틔우고, 마지막 장면은 그들의 의심이 해소된 후다. 그런데 범인은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감정적 결핍의 상태여서 '사랑 받음'에 있어 아주 민감하다. 그것이 범죄로 이어지고 잡히지 않은 채 사람들 사이에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말하자면 그에게 '낯선 사랑'은 의심이라는 부산물을 남긴다. 그러한 감정의 변화를 전체적으로 짚어보면 아주 폭발적인 감정의 고리가 엮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세 그룹에게 '낯선 이'가 다가오고 그를 허물없이 받아들인다. 여기서 잠깐, 우리는 아주 미묘하지만 미친 듯이 궁금하다. 범인은 '낯선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그들(아이코, 유마, 이즈미)은 '낯선 이'를 쉽게 받아들인다. 무엇이든 낯선 것은 두렵기 마련이지만, 그런데 또 막연하게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범인의 태도가 옳은 건지 그들의 태도가 옳은 건지 알 수 없다. 그러니까 범인이 낯선 것에 격렬하게 반응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범인과 그들의 관계는 사실상 평등하면서도 대립에 있다.

평등하면서도 대립하는 것, 사랑

 영화 <분노>의 한 장면, 왼쪽부터 마키 아이코 역의 미야자키 아오이, 타시로 요헤이 역의 마츠야마 켄이치, 타시로는 어느 날 항구에 왔으며 자신의 배경은 나중에 말하겠다며 아이코 아버지에게 의심을 산다. 영화는 이들을 통해 치바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진에는 아이코 아버지가 나와있지 않다.

영화 <분노>의 한 장면, 왼쪽부터 마키 아이코 역의 미야자키 아오이, 타시로 요헤이 역의 마츠야마 켄이치, 타시로는 어느 날 항구에 왔으며 자신의 배경은 나중에 말하겠다며 아이코 아버지에게 의심을 산다. 영화는 이들을 통해 치바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진에는 아이코 아버지가 나와있지 않다. ⓒ 토호


그런데 그들이 낯선 이(타시로, 나오토, 타나카)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을 보면 범인과 그들의 관계는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범인이 사랑을 거부해 의심을 낳은 것처럼, 흘러내린 의심을 주워담은 그들은 점차 사랑을 거부하게 된다. 의심이라는 이름의 목마는 그렇게 암살자를 흩뿌려 그들 사랑을 파멸로 이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의 옴니버스 형식은 마치 하나의 성을 정복하고 다음 성으로 넘어가는 침략자들 무리로 보인다.

평등하면서도 대립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보통은 나에게는 없는 것이 그에게 있기에 사랑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 감정은 보편적이며 이 영화에서도 다르지 않다. 바로 그것, 영화는 사랑을 거부하는 범인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그들의 차이를 의도한다. 사랑을 거부하는 것은 단 하나(살인)밖에 없는데 받아들이는 것은 세 가지나 된다. 거부는 살인의 형식을 빌려 아주 극단적인 감정의 회피로 나타나며 수용은 낯설고, 새롭고, 익숙함의 테마를 나타낸다.

그런데 영화에서도 잘 나와 있듯 그들에게 사랑의 대상인 낯선 이는 범인과 얼굴이 몹시 유사하다. 뉴스는 범인이 성형으로 얼굴을 바꾸었음을 말해주는데, 그것은 마치 얼굴이 유사한 그들을 모두 범인으로 몰아세우는 듯하다. 같은 시간, 다른 공간에서 그들 모두는 뉴스를 보며 의심을 꽃피운다. 마찬가지로 범인도 그들의 의심을 따라 같은 시간, 다른 공간에 존재한다. 그것은 이 영화의 형식을 떠받들지만 우리가 아니라 영화의 등장인물을 저격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마음 편히 그들의 감정만을 따라가면 된다. 의심은 영화 속 그들의 몫이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알 수 없는 희열을 느끼게 된다. 왜, 타인의 불행은 자신의 행복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영화가 다루고 있는 소재는 분명 신파적이지만 우리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건 그 때문이다. 반대로 그들의 비극도 그것에서부터 비롯된다. 눈앞에 놓인 것을 마치 타인의 일인 것처럼 부정하려다 종국에 가서야 인정하고, 곧바로 후회한다. 근데 그것 또한 우리도 마찬가지다. 외딴 바다 위 섬에 새겨진 분노라는 두 글자가 우리 마음, 바다 한편의 분노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다시금 질문의 방향을 우리에게로 돌려보자. 만약 우리는 낯선 것이 우리에게 찾아온다면 어떻게 대해야 할까? 새로운 물건을 샀으니 기쁘고, 어머니와 닮은(자식은 부모를 닮은 이를 선호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여인에게 반하며, 낯선 것에 호기심을 느낀다. 따지고 보면 우리도 영화 속 주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그것, 범인이 낯선 사랑을 거부하며 살인을 저지르듯 우리도 영화 속 사건을 거부하며 느끼는 것, 범인이 그들에게 의심을 심고 우리도 그들에게 의심을 품는다. 이 영화에서 범인은 다름아닌 우리다. 감정을 살해한다는 건 사람을 무시한다는 것과 다름없으니.

랑 찾기 혹은 범인 찾기

 영화 <분노>의 한 장면, 왼쪽부터 코미야마 이즈미 역의 히로세 스즈, 타나카 싱고 역의 모리야마 미라이. 영화는 이들을 통해 오키나와의 모습을 비춘다. 사진에는 이즈미를 짝사랑하는 오키나와 소년, 타츠야 역의 사쿠모토 타카라가 나와있지 않다.

영화 <분노>의 한 장면, 왼쪽부터 코미야마 이즈미 역의 히로세 스즈, 타나카 싱고 역의 모리야마 미라이. 영화는 이들을 통해 오키나와의 모습을 비춘다. 사진에는 이즈미를 짝사랑하는 오키나와 소년, 타츠야 역의 사쿠모토 타카라가 나와있지 않다. ⓒ 토호


그 범인은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닮았으니, 사실상 이 영화의 진행은 범인(사랑)찾기 혹은 범인(의심)이 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다시 한번 반복, '우리'는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닮았으니, 사실상 이 영화의 진행은 '우리'찾기 혹은 '우리'가 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영화 속 그들에게 있어 우리는 그들에게 의심을 싹트게 한 재앙적인 존재이며 사랑의 살해자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일방향적인 영화가 아니며 오히려 상호텍스트적인 영화다. 그것도 다름 아닌 감정을 건드리며 몹시 불쾌하게 한다. 목마는 성안으로도, 밖으로도 오고 갔던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 이 영화의 기반은 범인 그리고 우리와 그들이 대립하는 것이고, 거시적으로는 사랑의 수용과정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대립은 영화 속의 어느 한 쪽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다. 타츠야는 오키나와 미군 문제와 대립하며, 이즈미는 오키나와의 밤거리에서 미군에게 강간을 당한다. 어머니의 죽음을 바라보던 유마는 동성애자로서의 사회적 생존에 내몰린다. 아이코는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모종의 불신을 받고 있다. 이 영화는 일본인 감독(이상일 감독은 재일교포다)에 의해 만들어졌고, 일본에서 개봉했으며, 일본의 현실을 자각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 이 영화가 일본인들로 하여금 등장인물의 분노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며, 그들 스스로가 등장인물의 분노를 유발하는 범인이 되게 한다.

반대로 그것이 이 영화가 일본의 사회적 문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일본 밖에서 공감을 이끌어 내지 못하는 이유다. 일본의 사회적 문제를 분노라는 감정으로 승화하는 과정에서, 그것은 일본인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무엇이 되어 버린다.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그들이 느끼는 분노가 몹시 억눌려져 있는 것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일본 안에서만 공감대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날 선 비판이라도 가면 안에서만 맴돈다면 일본 밖의 관객(우리를 포함해)에게 호응을 받지 못하기 마련이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게 당연하다. 비유하자면 한국에서의 '한'이라고 할 수 있다. 다행히도 한국의 정서는 일본과 유사하니 우리가 이 영화를 이해하기에 딱히 모자라지는 않다. 다만 이러한 점에 아쉬움을 표할 수는 있다. 무언가를 고발하려는 성격의 영화가 되려면 켄 로치나 다르덴 형제처럼 다큐에 가깝게 묘사해야 관객을 이해시키기 쉽다. 다큐에 정치가 들어가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애초에 다큐는 제작자의 시선 자체가 특정 의도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 초반에 오키나와인들이 격하게 시위를 하는 것은 눈여겨 볼 만하다. 그것은 일본에서 흔치 않은 풍경인데다, 오키나와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보여주고, 영화 후반의 사건과 연결되는 복선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영화에서 햇살은 그들을 보듬는 사랑 혹은 행복의 지수 같은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이즈미의 오키나와는 내내 자연광으로 촬영되었고 유마의 도쿄는 어두컴컴한 조명이 사용되었으며 아이코의 치바현은 자연광과 조명을 적절히 사용한다. 마치 행복의 척도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각각의 도시는 도시화의 정도에 따라 밝기가 다르다. 실제로 오키나와를 걷는 이즈미의 모습은 햇살이 내리쬐는 바다의 모습이 뒤로 놓여 당장에라도 여행을 가고 싶을 만큼 아름답게 묘사된다. 반대로 유마는 매번 어둠이 깊은 퇴근길에 암에 걸린 어머니의 병동에 들러 밤을 지새운다.

분노와 행복

 영화 <분노>의 한 장면, 범인이 현장에 남긴 '분노'라는 표식은 영화의 주제이자 제목이다. 영화가 분노라는 것을 따라간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영화 <분노>의 한 장면, 범인이 현장에 남긴 '분노'라는 표식은 영화의 주제이자 제목이다. 영화가 분노라는 것을 따라간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 토호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밤이 내린 오키나와는 술판을 벌이는 미군들에 의해 무방비 도시가 된다. 이즈미는 그곳에 갔다가 미군에게 강간을 당하지만 그녀가 울부짖는 동안 아무도 오지 않는다. 그때 카메라는 잠깐 초점을 뒤로 옮겨 어느 창가의 피아노를 비추며 그 소리를 이즈미의 울음소리 아래에 놓는다. 소녀를 방관하는 시선, 그 선율이 강간의 피해에 묻혀 사라지고 만다. 아니, 애초에 피아노 소리가 너무 약했던 것은 아닐까? 그 시선은 영화의 배경음으로 깔리며 우리 세계로 확장된다. 카메라는 그것을 아주 성급하고, 잔혹스럽게 묘사해낸다.


다시금 반복, 이 영화는 그들의 시선을 통해 우리의 삶을 쫓는다. 오키나와와 치바는 바다가 보이고 몹시 희망에 차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미군이 떠도는 오키나와의 밤은 이즈미를 강간하고 치바의 태풍은 항구를 굳게 닫도록 한다. 개중에서도 오키나와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언급된다. 우리 모두가 동의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영화의 첫 장면의 도쿄 – 치바이고 마지막 장면이 오키나와이기에 의미하는 바가 분명하게 있다. 공교롭게도 그것은 조명으로 비유한 행복의 척도의 순서대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감독의 시선이 끝나는 곳은 행복에 가려진 밤의 분노임에 틀림없다.

즉, 이 영화에서 '거절당하는 사랑'이라는 건 어디에서나 흔히 볼 법한 것을 뜻하며, 설사 그것이 현재 자신의 지지기반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서 사랑과 의심은 외모가 비슷하다. 표현하자면 동전의 양면처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랑은 의심에 빠지게 되며 왜 우리는 의심을 사랑하는가? 낯설고, 새롭고, 익숙한 것은 두 감정을 모두 포용하는 말이기도 하니 앞의 질문에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다. 아직도 이 영화가 단지 의심에 대한 영화라고만 보인다면 당신은 트로이의 목마를 받아들인 트로이인들, 관객이 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분명 목마를 신의 축복이라 여기며 사랑했기에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끝은 속에서 흘러나온 멸망의 신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선호 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동시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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