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억의 밤 메인포스터 기억의 밤 메인포스터

▲ 기억의 밤 메인포스터기억의 밤 메인포스터ⓒ 메가박스㈜플러스엠


01.

"장항준이 하는 스릴러, 만약 나라면 투자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 <기억의 밤> 개봉을 앞두고 장항준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시나리오만 보고 투자해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난 2011년 드라마 <싸인>을 통해 메디컬 수사 드라마의 매력을 오롯이 브라운관에 녹여내며 이 장르에 대한 성공 가능성을 확인받기는 했지만, 그의 원래 주 종목은 코미디였다.

과거 <라이터를 켜라>(2002), <불어라 봄바람>(2003)을 직접 연출했던 것은 물론, <귀신이 산다>의 각색을 맡았을 정도로. 그가 원래 작가 출신의 감독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장르적 변화를 가져가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영화관이 아닌 케이블 TV용으로 연출했던 영화 <전투의 매너>와 <음란한 사회>를 포함하더라도 이번 작품은 그가 9년 만에 메가폰을 잡은 복귀작인 셈이니 더욱 불안함이 컸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이 방면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 김은희 작가가 장항준 감독이 내민 시나리오를 보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것 정도였을까? 이번 작품은 그에게 있어 여러 가지로 큰 도전이었을 것이다.

기억의 밤 스틸컷 강하늘이라는 배우의 연기는 이 작품을 스크린 안팎에서 긴밀하게 이어질 수 있도록 만든다.

▲ 기억의 밤 스틸컷강하늘이라는 배우의 연기는 이 작품을 스크린 안팎에서 긴밀하게 이어질 수 있도록 만든다.ⓒ 메가박스㈜플러스엠


02.

확실히 스릴러 장르를 위한 여러 가지 효과들이 영화 곳곳에 심어져 있다. 마치 영화 스스로가 자신의 장르를 증명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이라도 하는 듯이 시작부터 서스펜스를 위한 다양한 장치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특히 영화의 초반부에서는 진석(강하늘 분)의 가족이 이사 온 집에 의문의 방을 설치함으로써 정신적 불안을 안고 있는 진석 스스로가 그 불안을 키워나가는 과정에 관객들을 위치시킨다. 신경쇠약이라는 장치와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 공간의 만남이 장르의 논거를 제공하는 셈이다. 그렇게 러닝 타임을 소비하면서 관객들의 시야를 좁힌 결과물은 이 영화에서 가장 놀랄 법한 장면에 이르러 극대화되어 나타난다. 이는 단순히 관객을 놀라게 함으로써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방식이 아닌, 주인공인 진석의 불안을 스크린 너머에 위치한 관객들에게 동일하게 전달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스크린 안의 극과 바깥의 현실이 긴밀하게 이어질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는 강하늘이라는 배우가 존재한다.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진석의 시야를 좁혀내는 유석(김무열 분) 역시 큰 역할을 한다.

03.

상대적으로 좁은 공간을 활용하여 장르적 이점을 최대한 끌어내고자 하는 감독의 연출 또한 인상적이다. 그는 극의 서스펜스를 확보하기 위해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 숏으로 극단적으로 잡아낸다거나 일반적으로 잘 활용되지 않는 움직임으로 낯설다는 느낌을 전하고자 한다.

특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유석이 진석의 의식을 확인하기 위해 샤프심을 수차례 뽑아내어 눈을 위협하는 장면은 그런 시도가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순간이다. 이 같은 시도들이 물리적 장치라면 드라마적으로는 진석이라는 인물이 이끌어나간다.

자신의 핸디캡인 신경쇠약을 빌미로 기억이 명확하지 않은 척하며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상한 일들을 의뭉스럽게 넘어가는 장면들이 그러한데, 장항준 감독의 이런 장면들의 암시들을 극 중의 진석보다 관객들에게 먼저 보여주는 방식으로 일종의 복선을 마련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많은 시도들을 통해 장르적 이득을 챙겨가려고 하면서도 감독은 이야기라는 작품의 본질 역시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노력한다는 점이다.

04.

경찰서 장면에서 진석과 관련한 진실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면서 영화는 다소 분위기가 바뀐다. 이전까지 활용되었던 장치들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식의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 그렇다고 해서 장르를 급격히 전환시키지는 않는다. 포인트의 전환이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관객들이 이 작품의 전반부와 후반부가 가지는 온도 차가 심하다고 느끼는 것은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만큼 장항준 감독이 전반부에서 진석의 불안을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후반부에서는 극 자체적으로 진석의 불안이 해소되고 있기 때문에 전반부와 같은 불안감 혹은 긴장감을 관객들이 느끼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작품의 불안은 진석의 불안이 전이되어 관객들에게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진석이 사실을 알아가고 스스로 불안을 해소하기 시작하면 관객들 역시 동일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된다. 또한, 전반부에서는 '진석'이라는 인물의 '현재'에만 몰두하던 시선이 후반부에서는 '진석'과 '유석' 두 사람의 이야기로, 또한 '과거'와 '현재', 두 시점의 이야기로 분산되기 때문에 구조적으로도 밀도 있는 긴장감을 전달하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후반부의 드라마가 존재하기 때문에 초반부의 밀도 높은 서스펜스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주로 후반부에서 반전이 일어나고 긴장감이 고조되는 식의 익숙함에 반하는 순서가 가져온 문제일 뿐이다.

기억의 밤 스틸컷 경찰서에서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영화는 분위기가 다소 바뀐다.

▲ 기억의 밤 스틸컷경찰서에서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영화는 분위기가 다소 바뀐다.ⓒ 메가박스㈜플러스엠


05.

평소 눈썰미가 좋거나 내용을 추론하는 데 능한 관객들에게 후반부의 드라마가 다소 진부해질 수 있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작품이 스크린으로 표현한 장항준 감독의 첫 번째 미스터리 장르라는 것을 고려하면 수긍할 법하다.

치밀하게 얽혀있는 사건과 관계를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상황 하에서 개인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전달하고 동기화하기 위한 장치로 스릴러 형식이 차용되었다는 것 역시. 어쩌면 그의 이런 변화는 최근 코미디 장르가 한국 영화 산업에서 환영 받지 못하는 분위기와도 조금은 연결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 투자를 이끌어내지 않고서는 스크린에 작품을 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응원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만약 장항준 감독이 이번 작품에서 보여준 전반부의 밀도감에 조금 더 신선한 이야기를 접목시킬 수 있다면 어떤 작품이 나오게 될까? 벌써 그의 다음 스릴러 작품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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