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경없는영화제2017


지난 12일 1일은 세계보건기구(WHO)가 제정한 제30회 '세계 에이즈의 날'이었다. 범세계적인 에이즈 예방 홍보가 이뤄지는 이 날 한국의 각 지자체도 같은 캠페인을 벌였다. 그런데 말이다. 한국에서 이 에이즈와 HIV 바이러스 치료제와 검사 자체의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니까 '특허'를 낸 서구 거대 제약회사들이 에이즈 치료제의 가격을 틀어잡고 폭리를 취한다면, 치료제를 빤히 눈앞에 두고도 목숨을 잃어야 하는 양성 보균자나 환자들, 또 그 가족들의 심정은 어떠할 것인가.

'세계 에이즈의 날'이었던 지난 1일부터 3일까지 열린 '국경 없는 영화제 2017' 상영작 <피 속의 혈투>는 이렇게 서방 제약회사가 에이즈 의약품의 아프리카 및 남반구 반입을 조직적으로 막았던, 일명 '세기의 범죄'를 다각도로 조명한 다큐멘터리다.

영화제 기간 내한한 <피 속의 혈투>(2013)의 딜런 모한 그레이 감독은 인터뷰 내내 "실천"을 강조하고 있었다. '국경 없는 영화제 2017'이 국경없는의사회가 직접 제작한 작품과 함께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전쟁, 재난, 분쟁 등의 다양한 이슈와 긴급 구호 활동, 에볼라 치료, 의약품 독점 등을 소재로 한 작품을 상영했다는 점에서 <피 속의 혈투>는 영화제와 더없이 어울리는 작품이기도 했다.

그레이 감독은 장편 데뷔작인 이 작품을 통해 서구 제약회사들에 대항하는 남반구 개발도상국과 그들 의료계가 '세기의 범죄'에 대처했던 1990년 중후반부터 2000년대 사이의 과거를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동시에 그들의 대응과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역설하고 있었다.

인도계 캐나다인인 딜런 모한 그레이 감독은 특히 이러한 자본의 탐욕과 횡포에 의한 죽음은 2017년인 지금에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닌 '나'와 '우리'의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다음은 지난 11월 30일, 서울 신촌의 한 카페에서 딜런 모한 그레이 감독과 나눈 일문일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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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편을 제작할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라는 마지막 자막이 인상적이다(웃음). 그래서, 바라는 대로 세상이 바뀌었나.
"마지막 장면과 자막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웃음). 국경없는의사회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이 영화도 여러 국가에서 선보였지만, 이러한 이슈들에 더욱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공익이나 인권은 물론이요 과학계와 의료계의 지식 공유 문제, 항생제 내성 문제까지 이 <피 속의 혈투>와 같은 결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제약업계의 경우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하지만, 결국엔 자신들의 수익 창출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속편을 제작할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라는 자막은 이런 전 세계적으로 이러한 여러 이슈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였다. 이를 위해 국경없는의사회를 비롯해 여러 단체의 협력이 정말 중요한 것 같다."

- 제약회사들이 의약품의 반입을 막은 여러 국가의 피해자들이 등장한다. 이들 피해자와 국가들은 어떻게 결정했나.
"기본적으로, 인도와 남아공, 미국에서 많이 촬영했다. 문제 해결에 있어 큰 역할을 담당하는 인도와 인도인들의 분량은 꼭 필요했다. 남아공과 미국은 관련 인물과 활동가들이 많은 국가였고, 반면 홍콩은 빌 클린턴 인터뷰 때문에 한 번 방문했다. 모잠비크도 가톨릭 NGO 분량이 꼭 필요했다. 사실 우간다가 중요했는데, 피터 무제니 박사가 영화 후반에 주요하게 부각되면서 분량이 늘어난 경우다. 페루와 콜롬비아도 촬영은 했는데, 전체 상영시간을 조절하면서 제외됐다. 다른 국가들도 각자 배분했다고 보면 된다.

이러한 국제적인 이슈를 다루는 이런 다큐멘터리 중 남반구 국가의 시각을 다루는 건 사실 드문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주로 영미권의 시각으로 다뤄지는 경우가 많고, 그러한 시각 자체가 국제적이라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약 인도에서 제작됐다고 하면 인도의 관점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그런 영미권 외의 국제적인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감독은 왜 "속편을 제작할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했을까

ⓒ 국경없는영화제2017


- 감독으로서 그런 다른 관점은 어디서부터 출발했다고 볼 수 있을까.
"말하자면, 인도인의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인도는 식량이나 의약품에 한해서는 독점이 없어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다. 실제로 1970년도에 인도에서 큰 기근이 있었는데, 그러한 경험을 계기로 인도는 식료품과 의약품은 독점을 없애야 한다는 인식들이 생겼다. 인도 외의 국가들은 엄청난 비용 차이를 감수하지 않나.

구체적으로, 브라질이나 태국 등지에서는 HIV/에이즈 치료제로 쓰이는 항레트로바이러스의 가격이 대단히 싸지만, 수출이 안 된다. 반면 인도는 회사들의 경쟁을 통해 복제 의약품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생산된다. 이렇게 적정한 가격의 품질 좋은 약들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꼭 이런 인도의 사례나 관점을 통해 서구적인 시각을 바꾸겠다는 건 아니지만,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어떤 실천과 변화의 영역에서 다른 관점도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 다큐멘터리 속 주요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대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다. 영화가 각국에서 선보인 2013년과는 시차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맞다. 시간 간격이 있긴 했지만, 그 사건이 일어났던 시기의 역사적인 맥락을 다 보여주고 있기에 배경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아쉬운 건, HIV 양성 진단을 받은 이들이 본인들의 아팠을 때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것 자체를 어려워한다는 점이었다. 왜 환자들이 아팠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기 싫은 마음들이 있을 수 있지 않나.

또 담지 못했던 화면은 우간다 장면이었다. 무제니 박사가 치료 약을 들여오는 장면을 보여줬으면 더 좋았겠지만, 촬영 분량을 구할 수 없어서 아쉬웠다. 워낙 정보 제약이나 보도 통제가 심했다. 그런 부분이 아쉽지만, 지엽적인 부분인 것 같다. 역사적 맥락은 광대한 각국의 아카이브를 활용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고 본다."

- 영화의 큰 줄기는 다국적 거대 제약회사가 우간다로 대표되는 개발도상국들에 의약품이 값싼 가격에 제공되는 것을 막는 일종의 '범죄의 역사'로 요약 된다. 궁금한 것은, 제약회사의 범죄가 먼저였는지, 아니면 HIV/에이즈 이슈를 따라잡다가 제약회사의 문제와 마주하게 됐는지다.
"딱히 하나를 먼저 잡고 가는 방식은 아니었다. 그러한 이슈들에 관해 제작 전부터 굉장히 연구를 많이 했고, 다큐멘터리의 전개 방식을 뚜렷하게 정하고 갔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제약회사를 지지하는 쪽에서는 이러한 문제 제기 자체를 이론이나 학구적으로 몰고 가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실제로는 이 이슈에 대해 생사가 갈리는데 말이다. 그래서 더 이론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의약품 접근성과 같은 이슈는 윤리적인 맥락으로 봐야 한다. 약품이 고가라, 아예 구하지 못해서 죽는 사람이 전 세계에서 정말 많지 않은가. 예컨대, 수영장에 자진 사람을 구할 방법이 있는데도 구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 생사의 갈림길 앞에 선 이들을 카메라에 담는 일이 쉬운 경험은 아니었을 것 같다.
"소외된 지역에서 죽어가는 분들의 이야기를 그저 듣고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인터뷰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더불어 본인들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했다. 이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죽을 순 없으니까. 치료 약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비싸다는 이유로 죽어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그들 모두 들려주고 싶어 했다.

사실 벌어진 상황은 굉장히 슬프지 않나. 어린아이가 뭔지도 모르는 병에 걸리고, 식구들은 저주받았다고 생각해서 손길도 주지 않는 그런 상황을 관객들에게 제대로 알려주고 싶었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관객들은 사실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운 좋게도 의약품을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들은 우리와 왜, 어떻게 다른가를 꼭 널리 알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사실 슬픈 현실을 보면서 나타나는 감정적인 반응, 슬프다는 그 감정들은 아무런 힘이 없다. 분노를 느끼고, 그 분노를 바탕으로 어떤 실질적인 액션을 취하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 공감하고 감정적으로 느끼는 것 보다, 겉으로는 냉정할지라도 어떠한 행동이라도 직접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피 속의 혈투>를 보면서, 그저 '나는 운이 좋다'라고 끝나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언젠가 당신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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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시 행정부도 그렇거니와 제약회사와 연계된 미국의 활약(?)도 도드라진다.
"2003년 부시 대통령의 연설 당시는 이라크 전쟁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부시 행정부가 서둘러서 발표한 감이 없지 않고, 후폭풍을 미쳐 다 예상 못 한 계획이기도 했다. 또 5년간 150억 달러의 에이즈 퇴치 기금은 전쟁 비용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아프리카를 비롯해 남반구 국가들이 받는 혜택은 어마어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강대국의) 결정이 파장이 얼마나 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다.

제약업계와 관련해서 미국은 시장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만큼 큰 시장이다. 캐나다는 독점이 없기 때문에 이후 제약회사들은 나프타(NAFTA)를 통해 제동을 걸려고 했지만, 25년이 지난 지금도 제약회사가 없는 상황은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도 여타 국가들에 값싼 복제 약들이 제공되는 것은 반대할 때가 많다. 제약업계의 힘이 여전히 세다는 걸 입증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 현직에 있는 제약업계 인사들을 만나지는 않았나.
"다큐멘터리에서 인터뷰한 제약업계에 일했던 전직 인사 말고도 많은 분들을 만났는데, 현직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회사나 업계 상황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계약 조건에 명시돼 있다. 그들도 대부분 실수는 누구나 하나거나 하는 변명으로 일관하기 바쁘다. 사기업인 제약회사들의 일차적 목표는 주주들의 이익을 높이는 것이니까.

제약회사들은 수익을 높이기 위한 책임만 지는가, 사람을 많이 죽어 나가게 놔두는 게 제약회사의 의도인지 묻기도 했지만, 우리를 만난 대부분의 홍보 담당자들은 빤한 변명으로 일관하기 바빴다. 우리와 인터뷰한 전직 인사가 전반적으로 많은 얘기를 해줬다고 보면 된다. 사실, 그도 업계에서 퇴출당한 인사다. (웃음)"

- <피 속의 혈투>가 다루는 이슈를 한국인들은 피부로 쉽게 와닿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관객들이 이 작품을 어떻게 봐줬으면 싶은지도 궁금하다.
"내 생각에, <피 속의 혈투>는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 가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한국 관객들이 이런 이슈에 대해 큰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있지만, 오늘 내가 직접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영원히 나의 문제가 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는 것이다. 예컨대, 암 치료제 신약 18개 중 17개는 1년 구매비가 10만 달러가 넘는다. 이런 이슈들에 전 세계인들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특허 관련 이슈 역시 인도만 해도 미디어의 완벽한 통제로 인해 일반인들은 잘 모른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문제에 대해 대중들이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폴란드 한 영화제에서 어떤 관객에게 굳이 이런 얘기를 해서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래서 이렇게 답변한 기억이 난다. 당장은 본인들에게 문제가 없을 수 있지만, 의약품 가격 문제는 끊임없이 발생하고 언젠가 당신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 차기작도 역시나 이런 거시적인 문제를 다룰 예정인지.
"크게 두 가지인데, 이런 국제 보건과 인권을 주제로 한 작품을 준비 중이다. 5개국의 서로 다른 5명을 다룬 작품을 구상 중이다. '오픈 소샤이얼' 재단에서 지원을 받아서 거의 완성 단계고, 내년에 선보일 수 있을 것 같다. 또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인도 소설에 기반한 픽션도 준비 중이다. 캐나다가 제작하지만, 인도가 배경인 이야기로 초기 단계다. 아, 그리고 아직 확정된 건 아닌데, 평창 동계 올림픽에 출전하는 인도 선수에 관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때 또 한국에 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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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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