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세계적 추리 소설가 애거사 크리스티 80여 편의 작품 중 자신이 뽑은 10개의 작품에 들어가는 수작이다. 장편 14번 째, 포와로 탐정 시리즈 8번 째인 이 작품은 1932년에 실제로 있었던 찰스 린드버그 아들의 유괴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크리스티 스스로 '새로운 플롯의 아이디어'를 선택의 이유로 삼았을 만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함께 충격적인 반전의 결말로 회자되는 작품이다.

신선한 플롯 덕분에 크리스티 자신은 물론 작품이 출간된 이후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아왔고, 일찌기 1974년 시드니 루멧 감독에 의해 영화화됐다. 또 1989년부터 2013년까지 방영한 영국 드라마 <애거서 크리스티의 포와로> 시리즈 중 한 편으로 2010년 방영되었으며, 2015년 후지TV 개국기념으로 2부작이 만들어진 바 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작품을 함께 하진 못했지만 1978년 <나일 살인 사건> 등 5편의 장편 영화, 그리고 다수의 TV시리즈에서 포와로로 활약한 피터 유스티노프도 있다. 그리고 이제 2017년 케네스 브래너 감독 및 주연의 신작이 찾아왔다.

2017년판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소설을 읽은 독자를 비롯해 전작의 영화와 TV시리즈를 본 사람, 그리고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아니지만 포와로를 연기했던 배우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비교' 대상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앨버트 피니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

앨버트 피니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 ⓒ 시드니 루멧


 데이빗 서쳇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

데이빗 서쳇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 ⓒ itv


포와로

개인적으로 TV시리즈를 통해 피터 유스티노프의 익살스런 포와로에 익숙해 있었기에 <덩케르크>에서 신념의 해군 제독으로 나왔던 케네스 브래너가 연기하는 에르큘 포와로는 좀 낯설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 <스타일스 저택의 살인 사건>에 처음 등장하는 포와로는 벨기에의 전직 경찰로 은퇴 뒤 영국으로 건너와 탐정 일을 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프랑스인'이냐고 할 때마다 벨기에인이라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 노신사는 그의 친구 헤이스팅스 대위에 따르면 5피트 4인치가 되지 않는 왜소한 체구에 콧수염을 뻣뻣하게 잘 관리하며 달걀 모양의 머리를 한 외양을 지녔다고 묘사된다.

그래서 영화마다 포와로 역의 배우들은 하나같이 그 뻣뻣한 수염을 내세우며 등장하는데 아마 풍성함과 예술성에 있어서는 2017년판 포와로가 압도적인 듯하다.(물론 풍성하고 예술적인 것이 가장 포와로답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하지만 포와로를 뻣뻣한 수염만으로 '특정'하는 건 일면적이다. 오히려 '약간의(?) 결벽증과 노골적인 자기애로 포장된 그의 예리한 '회색 뇌세포'야 말로 셜록 홈즈못지 않은 마니아 층을 형성한 매력의 정점이다. 2017년판 포와로 역시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달걀을 등장시켜 예의 포와로의 결벽증을 알렸다.

익살스러웠던 피터 유스티노프와 날카로운 눈매의 예리하면서도 통찰력깊은 데이빗 서쳇에 비하면 케네스 브래너의 포와로는 영화 중 등장하는 '에르큘'과 '헤라클레스'의 언어적 착각처럼 꽃중년의 풍모는 한결 우월했지만 '넥타이'에 대한 집착 이상의 개성이 아쉽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 ⓒ 이십세기 폭스 코리아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 

어쩌면 포와로 탐정 자체가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무엇보다 과연 2017년판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애거사 크리스티다웠는가라는 점에서 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해봐야 한다.

2017년판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무엇보다 이스라엘 통곡의 벽에서 시작하여 이스탄불, 유럽을 횡단하는 오리엔트 특급 열차의 행로에 대한 볼거리로 시선을 빼앗는다. 그리고 그보다 더 이 영화에 대해 관심을 끄는 건, 주인공 케네스 브래너를 비롯하여 조니 뎁, 주디 덴치, 페넬로페 크루즈, 윌렘 데포, 미셸 파이퍼 등 쟁쟁한 출연진이다. 이런 쟁쟁한 출연진은 1974년작 <오리엔트 특급 살인>과 비교된다. 1974년작 <오리엔트 특급 살인>역시 잉그리드 버그만을 비롯하여 숀 코너리, 바네사 레드그리에브 등 출연진의 면면만으로도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그렇게 내로라하는 배우들을 포진시킨 영화는 원작처럼 기차가 출발하자 마자 얼마 되지도 않아 주요 인물이라 여겨지던 한 배우(아니 등장인물)의 죽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눈사태로 인해 기차 역시 아슬아슬한 철교 위에 멈춰 선다.

셜록 홈즈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추리물 마니아라고 하면 셜록 홈즈보다 더 한 수 위로 치는 애거사 크리스티 작품의 매력은 무엇일까? 말 그대로, 탐정과 함께 등장인물의 대화나 행적 등을 살펴보며 '뇌세포'를 풀가동하여 '추리'를 해나가는 묘미에 있다. 대부분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에는 특정한 공간에서 벌어진 사건을 배경으로 유력한 용의자들이 여러 명 등장한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비밀들이 하나씩 벗겨지며 '추리'의 과정이 깊어진다. 그리고 대부분 전혀 뜻밖의 인물이 범인이듯,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이면이나 도덕에 대해 생각할거리를 던지는 것이 애거사 크리티 작품의 매력이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에서도 포와로를 제외한 열차 내 11명의 승객이 용의자로 등장한다. 평범한 승객인 줄 알았지만 모두들 한 겹을 벗겨내고 나면 수상한 면이 하나둘씩 드러나는 상황. 거기에 피해자의 상흔조차 의심스럽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은 피해자의 서로 다른 상처와 용의자들 사이의 미묘한 관계가 막판 극적 반전을 통해 관객들의 머리를 어지럽히는 작품이다.

데이빗 서쳇 판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열차를 타기 전 포와로가 해결한 사건 과정에서- 사건은 해결하지만 그 사건의 범인이 자살을 함으로써- '어떤 경우에도 진실은 왜곡될 수 없다'는 포와로의 신념에 물음표를 던진다. 반면 케네스 브래너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은 분명 조니뎁의 등장도 흥미 진진하고, 미셸 파이퍼의 카리스마는 여전했으며, 페넬로페 크루즈의 반전이나 월렘 데포의 건재는 반가웠지만, 11명의 승객과 1인의 승무원이 서로 엇물리며 벌이는 심리전의 긴장감은 떨어진다.

아마도 원작을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말 그대로 신선한 결말 자체만으로도 쟁쟁한 배우진들, 화려한 풍광과 함께 볼만한 영화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에 반해 원작을 본 사람이라면, 혹은 원작과 함께 다른 배우가 연기한 포와로를 맛본 사람이라면, 그 맛본 정도에 따라 아쉬움의 농도는 짙어질 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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