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아기와 나 메인포스터

ⓒ CGV아트하우스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01.

살면서 말하는 것만으로 지켜낼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사랑한다는 말이 그렇고,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말이 그렇고, 효도하겠다는 말이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허망한 말들은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오고 만다. 두려워서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불안을 보고 있는 것이 두렵고, 자신의 현재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두렵기에 이 짧은 말 한 마디로 미래의 자신을 담보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보장되는 것은 없다. 실천할 수 없는 말들로 잠시 가려둔 현실이 얼마나 빨리 모습을 드러낼지는 가늠하지도 못한 채 그렇게 회피한다.

영화 <아기와 나>의 주인공 도일(이이경 분)은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 사고를 쳐서 어린 아들 예준(손예준 분)과 여자친구 순영(정연주 분)을 엄마(박순천 분)에게 맡겨두고 입대한다. 군대에서의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가고 전역을 앞두고 마지막 휴가를 나오니 정식으로 결혼도 해야 하고, 아이도 키워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돈을 벌기 위해 일자리도 구해야 하는데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않았던 그에게 사회는 만만치 않다. 가장 큰 문제는 어린 나이에 한 가정의 아빠가 되었을 뿐, 여전히 철없는 20대일 뿐이라는 것이다. 동물을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동물원에 가자는 순영에게 자신이 가고 싶은 놀이공원에 가자고 조르는 도일이다.

02.

 영화 <아기와 나>에서 평화와 안정을 지키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영화 <아기와 나>에서 평화와 안정을 지키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CGV아트하우스


어느 날 아픈 예준을 데리고 병원에 갔다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했던 아이가 자신과 순영 사이에서 나올 수 없는 혈액형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눈치챈 순영이 별안간 집을 나가면서 영화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이를 키워보기는커녕 기저귀 한번 갈아보지 않던 그가 홀로 모든 육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 벌써 청첩장까지 나온 결혼식이 엎어지게 생긴 것은 물론, 마지막으로 도움을 청하러 간 형에게서는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엄마는 지병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되고... 그동안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만 골라 하며 방만한 삶을 살던 그에게 잠시 가려져 있던 현실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다. 단순히 홀로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좋은 말로 자신의 삶을 낙관하며 내일은 변화된 모습으로 부모에게 잘하고, 좋은 아빠가 되고, 정신을 차리겠다고 말해온 시간들이 어느새 저 멀리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어떤 것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03.

여기에서부터 영화는 크게 두 개의 트랙을 따라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현실을 마주한 상황에서 도일이 스스로 변해나가는 모습을 조명하는 부분과 집을 뛰쳐나간 순영을 찾는 과정에서 그동안 몰랐던 그녀의 진짜 모습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게 되는 부분. 이야기가 두 갈래로 나뉘기는 하지만, 중요한 건 어느 쪽이든 결국 그 가운데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의 표현대로라면 어쨌든 예준은 도일의 친자가 아니라는 셈인데, 그걸 알면서도 그는 그 작은 생명을 어떻게든 키워보고자 자신을 변화시키고 순영을 찾으려 한다.

어쨌든 그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막막하지만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서 몸부림친다. 처음에는 자존심에 못 이겨 거절했던 체육관 관리-말이 관리지 그의 말대로 길거리에서 전단지나 돌리는 일이다- 일도 하기 시작하고, 순영을 찾는 동안 예준을 맡아줄 사람을 찾아 동분서주하기도 한다. 물론,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루아침에 그렇게 모두 바뀌기는 어렵듯 옛 버릇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한다.

 영화 <아기와 나>에서 홀로 유모차를 끄는 도일(이이경 분)의 모습은 곧 아내 순영(정연주 분)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영화 <아기와 나>에서 홀로 유모차를 끄는 도일(이이경 분)의 모습은 곧 아내 순영(정연주 분)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CGV아트하우스


04.

이 영화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시선은 오롯이 주인공인 도일의 것이지만, 순영을 찾아다니는 그의 모습에서는 오히려 그녀의 삶이 엿보이는 듯하다. 그녀에게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남편 격이었던 도일을 아이를 낳자 마자 군대에 보내고 난 뒤에, 돈을 벌기 위해 마트에서 일하면서도 예준을 홀로 돌보아야 했다. 도일이 예준을 태운 유모차를 끌며 낑낑거리던 언덕도 그녀 혼자 올랐을 것이고, 남편도 없이 그의 어머니, 그러니까 시어머니와 단둘이 한집에서 사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영화 전체에 걸쳐 그녀가 예준을 낳기 전까지 살아온 삶이 결코 순탄치는 않았음이 드러나기는 한다.

하지만 도일의 마지막 휴가에 가장 가고 싶다는 곳이 아들을 위한 동물원이었다는 걸 돌이켜보면, 그녀가 집을 떠난 건 다른 이유가 아니라 홀로 감당할 자신이 없는 현실의 무게 때문이었다는 걸 알 수 있게 된다. 어쩌면 두 사람은 같은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너무 어린 나이에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그 아이가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든 아니든, 갑자기 책임을 져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지면서 느끼게 된 두려움. 방법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그 두려움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풀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05.

영화는 전작인 <야간비행>(2011)으로 칸국제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부문에 초청되어 3등을 차지했던 손태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야간비행>에서도 돈을 벌기 위해 한 남자와 관계를 맺는 소년에 대해 이야기했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이제 막 세상에 던져진 이들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며 과거와 크게 벗어나지 않은 주제를 택했다.

<아기와 나>에서 과거에 비해 더 나아간 지점이 있다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치유와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는 것과 주인공을 성장시켜낸다는 점일까. 엄마의 말에 눈물을 보이는 도일의 모습이 예전과 달리 믿음직해 보이는 건, 그곳이 병실이어서가 아니라 잠시나마 아버지의 역할을 제대로 해냈던 시간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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