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빙 빈센트 포스터

▲ 러빙 빈센트 포스터 ⓒ 판씨네마(주)


예술에 삶 전체를 쏟아붓고 그림으로써 그림 이상의 것에 도달하기를 갈구한 화가, <러빙 빈센트>는 고흐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파헤치고 나선 젊은이 아르망 룰랭(더글러스 부스 분)의 이야기다.

구도에 가까웠던 예술의 길에서 인간으로의 삶과 예술가로서의 성취를 조화시키지 못하고 급기야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만 전설적인 화가의 이야기를 영화는 빈센트 반 고흐(로버트 굴라직 분), 그 자신의 화풍으로 스크린 위에 펼쳐놓는다.

영화사상 최초로 유화로 제작한 이 애니메이션은 형식뿐 아니라 내용에서도 파격을 거듭한다. 고흐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가운데 처음으로 고흐의 죽음과 관련해 세간에 알려진 사실에 의문을 표하고, 보다 진실에 가까이 다가설 가능성을 탐색하고 나선 것이다.

영화는 여러 정황증거를 들어 고흐의 타살설을 주장한 몇몇 분석가의 결론을 토대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이는 고흐가 우울증과 정신착란 증세를 겪다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기존의 인식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것으로, 아마도 영화를 보는 관객 대다수에게 놀라운 감상을 일으킬 게 분명하다.

반 고흐, 그가 부치지 못한 편지 한 통

러빙 빈센트 아를의 카페 테라스에서 대화하는 롤랭부자. 영화는 실제 고흐의 작품 구십여점을 그대로 영화에 녹여내 색다른 감상을 불러 일으킨다. 이 장면은 고흐의 가장 유명한 작품 가운데 하나인 <밤의 카페테라스>를 변형한 컷이다.

▲ 러빙 빈센트 아를의 카페 테라스에서 대화하는 롤랭부자. 영화는 실제 고흐의 작품 구십여점을 그대로 영화에 녹여내 색다른 감상을 불러 일으킨다. 이 장면은 고흐의 가장 유명한 작품 가운데 하나인 <밤의 카페테라스>를 변형한 컷이다. ⓒ 판씨네마(주)


아르망은 고흐가 한동안 지낸 프랑스 남부 작은 마을 아를의 우체국장 조셉 룰랭(크리스 오다우드 분)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고흐가 생전 동생 테오(체자리 루카스윅스 분)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전해주기 위해 마을을 떠난다.

테오와 만나기 위해 그와 친분이 있는 미술상 탕기 영감(존 세션스 분)을 찾은 아르망은 고흐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테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왕 떠난 걸음이니 고흐와 가깝게 지낸 다른 이에게라도 편지를 전하기로 한 아르망은 고흐가 생의 마지막 몇 개월을 지내고 죽음을 맞은 북프랑스의 오베르로 향한다. 고흐를 치료한 정신과 의사 가셰 박사를 만나기 위해서다.

오베르에 도착한 아르망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고흐에 관한 엇갈리는 증언을 듣는다. 누군가는 그를 무례한 미치광이로 기억하고 다른 누군가는 조용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고 떠올린다. 가셰 박사의 가정부는 고흐에게 적대감을 감추지 않고, 고흐가 묵었던 여관집 딸은 가셰 집안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서는 안 된다며 경고한다.

길 위에 선 모든 흔들리는 영혼에게

러빙 빈센트 고흐의 유화로 고흐의 삶과 작품을 복원한다는 원대한 계획에 전 세계에서 4000여 명의 화가가 몰려들었다. 제작진은 오디션을 통해 이 가운데 125명의 화가와 애니메이터를 추려 작업을 진행했다.

▲ 러빙 빈센트 고흐의 유화로 고흐의 삶과 작품을 복원한다는 원대한 계획에 전 세계에서 4000여 명의 화가가 몰려들었다. 제작진은 오디션을 통해 이 가운데 125명의 화가와 애니메이터를 추려 작업을 진행했다. ⓒ 판씨네마(주)


아르망은 고흐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찾고자 탐문을 거듭하지만 일 년은 죽음을 덮고 흔적을 씻어내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영화는 고흐의 죽음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는다. 고흐의 자살에 대한 합리적 의문을 던지면서도, 그가 살해됐다거나 특정인이 범인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죽음으로 꺾인 고흐의 비극적 삶에서 눈을 돌려 그가 삶 가운데 품은 꿈과 지켜낸 가치에 주목한다. 그리고 어쩌면 고흐와 같이 현실의 어려움과 싸우고 있을 수많은 청년에게 고흐가 먼저 걸어간 길과 그 길에 담긴 의미를 보여주고자 한다. 처음엔 고흐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 청년 아르망이 고흐의 참모습을 알게 되며 차츰 마음을 여는 것처럼, 영화를 보고 난 모든 이들이 기억돼 마땅한 진짜 고흐의 모습과 마주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유화로 한 편의 영화를 가득 채우겠다는 꿈을 품은 애니메이터 부부 도로타 코비엘라와 휴 웰치맨은 비극 가운데 투쟁하기를 멈추지 않은 예술가 고흐의 삶을 줄기 삼아 이토록 경이로운 작품을 빚어냈다. 이들의 뜻을 좇아 전 세계에서 모여든 125명의 화가와 애니메이터들이 5년여의 기간 동안 6만 장이 넘는 유화 프레임을 제작했다고 하니 작업의 규모와 노고를 짐작할 만하다. 이름난 배우 시얼샤 로넌, 더글러스 부스에게도 적지 않은 영광이었으리라.

예술가의 삶은 삶 너머에서도 계속된다

러빙 빈센트 영화는 실제 배우가 연기한 장면을 촬영한 뒤 컴퓨터그래픽을 통해 유화풍으로 바꾸고 이를 다시 유화로 본떠 그리는 과정을 거쳐 제작됐다. 이 장면은 부자로 출연한 크리스 오다우드(아버지 롤랭 역)와 더글러스 부스(아들 룰랭 역)가 연기하는 모습.

▲ 러빙 빈센트 영화는 실제 배우가 연기한 장면을 촬영한 뒤 컴퓨터그래픽을 통해 유화풍으로 바꾸고 이를 다시 유화로 본떠 그리는 과정을 거쳐 제작됐다. 이 장면은 부자로 출연한 크리스 오다우드(아버지 롤랭 역)와 더글러스 부스(아들 룰랭 역)가 연기하는 모습. ⓒ 판씨네마(주)


고흐의 그림은 살아생전 단 한 점만이 팔렸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그가 생전 20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는 것이다. 유화만 따져도 900여 점으로, 스물여덟에 작품활동을 시작한 그가 그림을 그린 기간이 불과 10여 년에 불과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입이 떡하니 벌어질 만하다. 영화는 고흐가 누구보다 성실히, 온 힘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아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람은 결코 쉽게 목숨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야속한 시간은 흘러만 가고 진실은 세월 가운데 흩뿌려진 지 오래다. 그러나 사람은 떠나도 기억은 남는 법이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의 내가 그랬듯, 누군가 고흐를 타고난 천재 화가라고만 기억하고 있다면 나는 그에게 이 영화를 볼 것을 진지하게 권하려 한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세상과 자신을 표현했고 가장 온화하면서도 깊이 있는 시선으로 자신을 둘러싼 우주를 대면하고자 했던 고흐의 삶을 이보다 더 멋지게 표현한 영화를 나는 알지 못하므로.

영화가 말하는 것처럼 예술가의 삶은 삶 너머에서도 계속된다. 작은 육체에 국한된 생명을 넘어 작품으로 영원한 삶을 구한다. 이제 고흐의 작품은 평범한 사람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가격에 팔리고 있다. 어쩌면 그의 그림엔 그 천문학적 가격을 넘어선 가치가 깃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더없이 고통스러웠을 그의 삶도 그저 그렇게 끝난 것만은 아니다.

고흐와 같이 흔들림을 겪고 있을 길 위에 선 모든 영혼에 <러빙 빈센트>는 훌륭한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 이 영화를 통해 만난 빈센트는 마음이 깊은 사람,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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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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