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감빵 생활

ⓒ tvN


신원호 PD의 가장 큰 히트 상품은 tvN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였다. 그는 2012년 <응답하라 1997>부터 <응답하라 1994>(2013), <응답하라1988>(2015)에 이르기까지 연이어 흥행 궤도에 올리며 <응답하라>를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었다. 그러나 신원호 PD 이름 앞에 붙었던 '응답하라'라는 수식어는 이제 바뀔 때가 된 듯하다. 지난 22일 첫 방송한 tvN 새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말하는 게 아니다. 바로 '신원호 표 휴머니즘'이다.

휴머니즘은 사실 <응답하라> 시리즈부터 이어져 온 정서였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특정 연도를 브라운관에 그대로 재현해 복고 열풍을 몰고 왔다. 사람들은 과거 정겹고 화목했던 시절을 추억하며 드라마에 빠져 들었다. 이는 하나의 트렌드가 돼 지상파 드라마로까지 영향력을 확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응답하라>의 다음 연도는 언제일까 궁금해 하는 것도 당연지사. 뜻밖에 신원호 PD가 내놓은 공간은 '휴머니즘'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감빵' 즉, 교도소다.

따뜻한 추억 대신 차갑고 냉혹한 감옥 사회

 슬기로운 감빵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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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의 주인공은 실형을 선고 받은 야구선수 김제혁(박해수 분)이다. 그는 여동생을 성폭행하려던 괴한을 트로피로 가격한 죄로 징역 1년을 살게 됐다.

한국시리즈 2년 연속 MVP, 골든글러브 3연패, 세이브왕, 방어율왕을 차지한 넥센 히어로즈 특급 마무리 투수이며 대한민국 세이브 기록을 죄다 보유한 괴물 클로저. 미국 메이저리그행을 앞둔 국민 스타였지만, 그는 하루 아침에 '감빵'에 가야 하는 처지가 됐다. 조금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슬기로운 감빵생활>은 1, 2회를 통해 김제혁에게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야말로 "볼 꼴, 못 볼 꼴"을 다 보여준다.

교도소 입소의 필수 코스, '항문 검사'는 스타 야구선수에게 수치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유명인의 비밀스러운 부위에 관심을 갖고 모여든 교도관들을 여유롭게 쫓아준 인물은 다름 아닌 성동일(조주임 역)이었다. 김제혁의 호감을 얻은 조주임은 같은 방 갈매기(이호철 분)와의 육탄전을 눈감아 주는 조건으로 제혁에게 현금 3천만 원을 요구한다.

그간 <응답하라> 시리즈에 아버지 역할로 등장해 무뚝뚝하지만 정 많은 그 시절 아버지를 그대로 재현했던 성동일이었다.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도 성동일은 아버지 캐릭터와 흡사한, 너그럽고 인심 좋은 모습으로 등장하는 듯했다. 그러나 곧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징벌방에 가지 않으려면 3천만 원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조주임의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배신감을 안겨줬다. 이는 <슬기로운 감빵생활>은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선언하는 장면 같았다. 더이상 추억을 반찬 삼아 한가한 '남편 찾기'나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슬기로운 감빵생활>에는 '추억'은 없을지라도, 여전히 <응답하라> 시리즈부터 이어져 온 '사람 냄새'가 났다.

극한의 장소에서 펼친 진검승부

 슬기로운 감빵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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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되돌아 보자. 과연 <응답하라> 시리즈의 인기 요인은 '복고'와 그에 기반한 1990년대 음악 등의 문화적 장치뿐이었을까? 신원호 PD는 그간 자신이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대중과 교감했던 장치들을 완전히 제거한 채 다시 돌아왔다. 대신 그동안 해왔던 이야기를 '감옥'이라는 극한의 무대에서 다시 펼치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슬기로운 감빵생활>은 제대로 된 '진검승부'로 보인다.

그 '진검승부'는 시청자들에겐 다소 낯선 배우 박해수로부터 비롯된다. 박해수는 국민 투수지만 '감빵' 동료들에게 어설프고 행동이 굼뜨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 김제혁 역을 맡았다. tvN 드라마 <비밀의 숲>에서 반전의 주인공이었던 윤과장은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 상습 마약범으로 정신 못 차리는 재벌 2세로 등장했다. 배우 정경호는 제혁을 안타깝게 찾아다닌 오랜 친구 준호 역을 맡았다. 또 허허실실 속을 알 수 없는 조주임도 눈길을 끌었다.

김제혁은 과거 교통사고로 심한 부상을 입었을 때도, 좌절하는 대신 묵묵히 치료 받고 재기에 성공한 역전의 인물이다. 이처럼 그는 묵묵히 자신의 '인간미'를 증명해 나간다. 감빵에서 부당하게 힘을 행사하는 '갈매기'를 제압하고 조주임에게 3천만 원을 주는 척 하며 '법자'(김성철 분) 모친의 수술을 도왔다. 교도관 준호의 말처럼 '오지랖'을 부리기 시작한 것.

말 그대로 "쓸데없는 오지랖"일 수도 있다. 그러나 김제혁의 '인간미'는 익숙하다. <응답하라 1988>에서 수학여행비가 없어 쩔쩔매는 덕선이네 처지를 모른 척 하다 슬쩍 여비를 남겨놓은 미란(라미란 분)이 떠오른다.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시청자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던 '인간적인 정서'가 느껴지는 것이다. 21세기 '혹한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녹여주었던 지난 20세기의 '인간미'였다. 그 인간미는 '감빵'이라는 공간에서 김제혁을 통해 다시 슬그머니 등장한다. 이로 인해 <슬기로운 감빵생활>은 마치 눈을 맞은 상록수처럼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어렵고 힘든 시절 콩 한 쪽도 나눠 먹던 인간적인 정서가 있었기에 <응답하라> 시리즈가 빛났다. 마찬가지로 <슬기로운 감빵생활>은 가장 '인간적'일 수 없는, 교도소라는 공간에서 이름 나이 직위 자유도 없는 죄수가 의지적인 '휴머니즘'을 펼쳐나가는 이야기다. 이는 신원호 PD의 세계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물론 청소년 시절부터 시작된 준호와 제혁 그리고 지호(정수정 분)의 '인연'은 <응답하라> 시리즈의 외전 같은 기시감을 준다. 하지만 <슬기로운 감빵생활>은 <응답하라>의 기시감을 느낄 새도 없이 진짜 교도소 생활의 극한 현실을 보여준다. 가장 자신 있는, 흥행보증수표였던 <응답하라> 브랜드를 두고 정반대의 교도소 이야기로 '출사표'를 던진 것만으로도 이미 신원호 PD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신원호가 그리고자 하는 '인간적 세계'의 지향점은 그래서 더욱 기대감을 모은다. 새로워서 빛나고, 여전해서 더욱 가치있는 <슬기로운 감빵생활>의 선전를 응원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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