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웰링턴 TSB뱅크 아레나에서 열린 2019 농구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 1차전 한국 대 뉴질랜드 경기에서 허재 감독이 작전 지시를 하고 있다.

뉴질랜드 웰링턴 TSB뱅크 아레나에서 열린 2019 농구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 1차전 한국 대 뉴질랜드 경기에서 허재 감독이 작전 지시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국제 대회에서 한국농구를 보며 팬들이 자부심을 느끼게 했던 순간이 얼마 만일까. 한국 남자농구 대표팀(FIBA 랭킹 34위)이 강호 뉴질랜드(27위)를 원정에서 또다시 격침하는 쾌거를 이뤄내며 2회 연속 농구월드컵 본선을 향한 기분 좋은 첫발을 내디뎠다.

허재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은 23일 뉴질랜드 웰링턴의 TSB 뱅크 아레나에서 열린 2019 FIBA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 A조 1차전 뉴질랜드와의 원정경기에서 접전 끝에 86-80으로 짜릿한 승리를 따냈다. 한국농구는 지난 8월 FIBA 아시아컵에 이어 다시 만난 뉴질랜드를 상대로 기분 좋은 3연승 행진을 이어갔다.

'허재호'는 아시아컵에서 저평가를 딛고 3위라는 호성적을 거두며 가능성을 인정받은 바 있다. 하지만 농구월드컵 예선에서도 과연 아시아컵의 상승세를 이어갈 수 있을지는 의문부호가 붙었다. 한국은 주전 가드 김선형이 발목 부상으로 결장한 데 이어 김종규-양희종 등도 부상에 시달리며 최상의 전력을 구축하지 못했다.

뉴질랜드는 객관적인 전력에서 한국보다 한수 위로 평가됐다. 오클라호마시티에서 활약 중인 NBA리거 스티븐 애덤스는 불참했지만 코리 웹스터-타이 웹스터 형제와 아이작 포투 등 유럽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이 대거 합류하며 지난 아시아컵과 비교하여 엔트리의 절반 이상이 교체됐다. 사실상 이번 대표팀이 뉴질랜드의 진정한 최정예멤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한국에 대한 설욕 의지에 불타는 데다 경기 장소도 뉴질랜드의 홈이었다. 모든 면에서 한국의 고전을 예상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패싱게임과 기동력으로 무장한 한국농구의 저력은 만만치 않았다. 아시아컵의 선전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한국농구는 뉴질랜드의 정예멤버를 상대로도 전혀 밀리지 않으며 팽팽한 접전을 펼쳤다.

아시아컵에 이어 다시 한번 '한국형 농구'의 스타일을 제대로 보여줬다는 데 의미가 있다. 한국은 이날도 장신군단이 즐비한 뉴질랜드를 상대로 리바운드 싸움에서는 33-40으로 밀렸다. 하지만 한국은 이날 무려 10개의 3점슛을 성공시키며 47.6%의 고감도 적중률을 보였다. 어시스트는 무려 27개로 뉴질랜드(3점슛 7개, 14어시스트)에 크게 앞섰다. 신장은 낮아도 공격전개가 얼마나 조직적으로 자연스럽게 이뤄졌는지를 보여준다.

코리 웹스터 등의 개인능력을 활용한 플레이가 많았던 뉴질랜드와 달리, 한국은 특정 선수에게 의존하지 않고 코트 위 다섯 명의 선수가 고르게 공격에 참여하며 공간을 만들어내는 모션 오펜스를 펼쳤다. 기존에 3점슛에 의존하던 '양궁농구'와 차이점이 있다면 골밑에서 밀려나 어쩔 수 없이 외곽슛을 난사하던 패턴에서 벗어나, 볼흐름과 약속된 협력플레이를 통하여 완벽한 찬스를 만들어내서 성공시킨 슛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이다. '높이보다 공간'을 더 중시하는 현대농구의 흐름에 걸맞는 플레이기도 했다.

KBL이 자랑하는 토종 슈터들의 경쟁력도 빛을 발했다. 허재 감독은 "예전부터 슛만큼은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다"며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이날도 4쿼터 뉴질랜드의 추격으로 아찔한 고비를 맞을 때마다 슈터들의 클러치 능력이 빛을 발했다.

지난 아시아컵을 통하여 '명품 식스맨'으로 부상한 전준범(울산 현대모비스)은 이날도 3점슛 8개를 던져 6개를 꽃아넣는 고감도 슈팅능력을 과시하며 경기 최다인 22점을 쓸어담았다. 종료 1분을 남겨놓고 한골 차로 쫓기던 상황에서 오심으로 인하여 오세근(KGC)의 골밑 자유투가 인정되지 않은 것을, 이어진 공격에서 전준범의 극적인 3점슛으로 오히려 전화위복을 만든 장면은 이날의 최고 백미였다. 과거 대표팀의 주포로 활약하던 문태종과 조성민의 공백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의 맹활약이었다

한국 농구, '리바운드 싸움'-'협력 플레이' 빛났다

 남자 농구대표팀 전준범이 23일 뉴질랜드 웰링턴 TSB 뱅크 아레나에서 열린 2019년 국제농구연맹(FIBA) 월드컵 아시아 오세아니아 지역 예선 A조 1차전 뉴질랜드와 원정 경기에서 골밑슛을 하고 있다.

남자 농구대표팀 전준범이 23일 뉴질랜드 웰링턴 TSB 뱅크 아레나에서 열린 2019년 국제농구연맹(FIBA) 월드컵 아시아 오세아니아 지역 예선 A조 1차전 뉴질랜드와 원정 경기에서 골밑슛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KBL 현역 최고의 슈터로 꼽히지만 아시아컵에서는 부진으로 체면을 구겼던 이정현(전주 KCC)에게도 설욕의 무대였다. 마지막 종료 2분여를 남기고서는 그야말로 '이정현 타임'이었다. 74-73으로 1점 차까지 추격당하며 위기를 맞이했던 종료 2분 26초 전 수비를 달고 과감한 장거리 터프샷을 터뜨린 것을 시작으로, 오세근과 최준용(SK)의 골밑득점을 잇달아 어시스트하며 뉴질랜드의 끈질긴 추격을 따돌리는 데 일등공신이 됐다. 종료직전 마지막 승리에 쐐기를 박는 레이업 득점도 이정현의 몫이었다.

이날 이정현의 기록은 28분 13초를 뛰며 12득점 5어시스트 3리바운드였다. 3쿼터까지는 다소 잠잠했지만 활발한 움직임으로 공격의 연결고리 역할에 충실했고, 중요한 순간에는 특유의 과감한 드라이브인과 2대 2게임을 통하여 KBL에서 보여준 클러치능력을 재현했다.

국내 빅맨들의 투혼도 이날 승리의 숨은 수훈갑이었다. 오세근은 뉴질랜드의 장신벽을 맡아 14점 10리바운드로 더블-더블을 달성했고, 이승현(상무)도 14점을 넣으며 힘을 보탰다. 2미터의 장신포워드지만 대표팀에서는 가드로 기용되고 있는 최준용은 3-2 드롭존 수비의 핵심으로서 투입될때마다 뉴질랜드의 장신을 상대로 높이 열세를 최소화하고 수비력을 강화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냈다.

원정에서 노골적인 홈텃세를 극복하고 승리를 따냈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이날 경기 후반으로 갈수록 심판의 휘슬은 '홈콜' 의혹을 강하게 자아낼 정도로 한국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완벽한 속공기회나 득점상황에서 뉴질랜드의 노골적인 파울이나, 명백히 뉴질랜드 선수의 몸을 맞고 터치아웃된 공도 인정되지않는 장면이 속출했다.

선수들이 자칫 심리적으로 흔들릴수 있었던 대목이었지만 다혈질로 유명한 허재 감독이 오히려 냉철하게 대처하며 선수들을 다독였고 한국은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다행히 한국이 억울하게 승리를 놓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농구월드컵 예선전의 흥행성과 경기력 향상을 위하여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허재 남자농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20일 오후 인천시 중구 네스트호텔에서 열린 '2019 중국 농구월드컵 국가대표 출정식'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허재 남자농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20일 오후 인천시 중구 네스트호텔에서 열린 '2019 중국 농구월드컵 국가대표 출정식'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농구는 그동안 국제무대에만 나가면 작아진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2002년 부산과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우승을 차지했지만 안방에서만 강했다는 이미지를 불식시키지 못했다. 시대에 뒤처진 낡은 농구, '우물 안 개구리'라는 이미지는 한국농구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흥행에도 악영향으로 작용했다.

전임감독인 허재 감독의 등장과 함께 세대교체-국제경쟁력 회복이라는 변화의 바람이 불고있는 한국농구는 모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되찾았다. 첫 판부터 강호 뉴질랜드를 원정에서 꺾었다는 자신감은 앞으로의 일정에도 대표팀에 큰 힘이 될 전망이다. 오랜만에 '응원할 맛 나는' 한국농구의 모습에 농구팬들도 환호하고 있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농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