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시대가 정말로 변하고 있는 것일까. 적어도 내 주변 또래들 중에선 적극적인 성 차별 발언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그들이 내가 없는 곳에선 무슨 말을 할지 모르지만). 가령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거나 '남자의 일과 여자의 일이 따로 있다'는 식의 말을 하는 사람은 없다. 여성 CEO나 여성 장관, 여성 지도자가 등장해도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오히려 그런 일은 사회적 진보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드디어 '유리천장'에 균열이 가고 있다는 의미다. 이런 분위기는 뉴스를 봐도 마찬가지다. 물론 아직까지 상식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러나 인식의 변화를 아직 사회가 쫓아오지 못한 모양새다. 성 평등은 현대인이라면 갖추어야 할 교양이 됐지만 구조적인 차별은 여전하다. 일례로 사람들은 '알파걸'(가사노동과 직장업무를 다 잘하는 여성-편집자 주)의 등장에 환호하지만 실제로 이중 노동을 뜻한다는 건 알지 못한다. 전통적인 성 역할에 기반한 문화, 제도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똑같이 직장 일을 해도 가사 노동은 여전히 여성의 몫이다. 육아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여성은 중요한 시기에 경력 단절을 겪곤한다. 특정 직종은 여성의 고위직 진출이 어렵거나 심지어 진입이 힘든 경우도 많다. 여성 할당제와 같은 적극적 조치가 취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남성들은 '역차별'이라며 반발한다. 앞서 언급했듯 그들의 생각에 여성은 이제 남성과 평등하기 때문이다.

쇼를 한 남자, 경기를 치른 여자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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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수의 남성들은 특정 분야와 고위직에 여성들이 보이지 않는 현상을 개인의 능력 탓으로 돌리곤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구조적 차별이 모두 사라진 공간에서 공평한 게임의 규칙을 가지고 경쟁할 수 있다면 과연 결과는 지금과 같을까? 아마 이 같은 상상을 영화로 옮긴 작품이 바로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일 것이다. 심지어 가상의 이야기도 아닌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영화는 전설적인 여성 테니스 선수 빌리 진 킹과 남성 선수인 바비 릭스의 경기를 다루고 있다. 1973년에 성사된 이 매치는 영화의 원제 그대로 '성 대결(Battle of the Sexes)'로 유명했다.

실제로 벌어졌던 이벤트이기에 인터넷에서 검색을 한다면 경기 결과를 찾아볼 수 있다. 결과를 모르고 영화를 본다 해도 두 사람의 대결이 어떻게 끝날지는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경기의 개최가 확정된 이후 두 캐릭터의 행보가 극명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가령 바비 릭스는 언론과 인터뷰를 하며 '허세'를 부리고 사람들을 모아 떠들썩한 파티를 벌이고 비타민 제를 열심히 삼킬 뿐 연습이라곤 하지 않는다. 반면 빌리는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마음을 다잡고 독한 훈련에 돌입한다. 영화의 미국 개봉 당시 홍보 문구처럼 바비는 배팅을 했다. 경기를 한 사람은 오직 빌리 뿐이다. 사실 이는 영화의 초반 빌리가 바비의 경기 제안을 거절한 이유기도 하다. 빌리는 바비가 경기가 아니라 쇼를 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는 그렇게 했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수평이 되어야 한다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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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영화적으로만 본다면 바비는 정말 허술한 악당이다. 저런 행보를 보인 캐릭터가 원하는 것을 성취할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도대체 그는 왜 그랬을까? 답은 간단하다. 경기가 벌어진 70년대는 성차별과 남성 우월주의가 만연하던 시대다. 그래서 영화에 등장한 것처럼, 미국 테니스 협회는 똑같이 표가 팔렸음에도 '남성이 여성보다 경기를 잘 한다'는 얼토당토 않은 이유로 여성 경기에는 남성 경기보다 8배나 적은 상금을 책정하기도 했다. 바비 릭스도 여기서 자유롭지 않기는 마찬가지 였다. 아니 그는 스스로를 '남성 우월주의자 돼지'라고 지칭할 정도로 성차별에 찌든 인간이었다. 그런 그에게 남성을 압도하고 승리하는 여성의 존재란 애초에 불가능 일이었다. 그러니 바비 릭스는 아무런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원래 여성은 남성보다 더 잘 할수가 없으므로.

하지만 공평한 규칙이 지배하는 코트에서 바비의 환상이 충족될리는 만무하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이 단순한 스포츠 영화를 넘어서 중요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진다고 생각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수평으로 만들어라. 여성과 남성에게 서로 다른 출발선과 장애물을 부여하는 구조적 차별을 없애라. 바비와 빌리가 섰던 경기장 처럼 공평한 룰을 적용하라. 그러면 그 경기의 결과처럼 우리 사회는 지금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편견이 사실로 굳어지는 것은 그것이 가능한 사회적 환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공간에서 남자들은 영화 속 바비처럼 허풍만 떨어도 여성보다 더 유능한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대사처럼 빌리는 단순히 남자 선수를 이긴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냈다.

구조적인 성차별이 사라져야 할 이유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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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이 영화에서 바비 릭스는 도박 중독자로 묘사된다. 심지어 그는 재활 모임에 가서도 도박을 찬양할 정도다. 하지만 그의 말과 달리 도박은 수완이 아니라 운의 문제다. 개인의 노력과 능력은 발생할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 말을 거꾸로 뒤집으면 적어도 아무리 무능한 인간도 이길 수 있는 게 도박이란 것이다. 단지 필요한 것은 근거 없는 확신과 과도한 자신감 뿐이다. 한 마디로 야심만 가득하지 그만한 능력은 갖추지 못한 사람들. 지금껏 한국 사회에서 이런 종류의 남성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걸맞지 않게 높은 지위까지 누려왔다. 경제, 학문, 정치 분야에 무수한 이 바비 릭스들을 꼽자면 두 손이 모자랄 정도다. 갈등 조정 능력이 없는데 리더가 되고, 근시안적 전망을 가진 사람이 사업을 하며,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특히 여성에 대해)에 훈수를 두는 지식인 등. 굳이 이름을 언급하지 않아도 떠오를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남성'이기 때문에 문제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애초에 분야에 따른 성 차별이나 유리 천장이 없었다면 인재풀은 넓어지고 더 나은 사람이 그 자리에 오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지난 9월 '아시아의 지속성장 전망과 과제' 국제 콘퍼런스에 참석한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는 "한국은 노동시장의 성 격차를 줄이면 국내총생산(GDP) 10%를 높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사실 그의 말은 새롭지 않다. 한국의 젠더 불평등이 성장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지적은 무수히 되풀이 됐다.

물론 나는 국가 발전을 위해 성 평등을 이룩해야 한다는 식의 시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때로 비효율은 강한 부정의와 연결돼 있기도 하다. 적임자가 자기 자리에 앉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비범한 재능을 보이던 여성들이 방황하거나 혹은 일터에서 공평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모습을 나는 지금도 목격하고 있다. 빌리와 바비 릭스가 맞붙었던 경기장은 우리 사회 전반에도 확장될 필요가 있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의 존재는 소중하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사족. 빌리는 최초로 커밍아웃한 여성 테니스 선수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마지막에는, 특히나 나 같은 성 소수자라면 눈물을 쏟을 대사가 등장한다. 손수건을 지참하시는 것을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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