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까칠하게 공연을 보고, 이야기 합니다. 때로 신랄하게 '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잘 만든 작품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하지 않을까요?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작품들이 더 많이 올라오길 바라봅니다. [편집자말]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뮤지컬 <배니싱> 공연 사진. 창작 초연 뮤지컬 <배니싱>은 1921년 강화도에서 정체 불명의 시체를 해부하다가 벌어지는 미스테리한 사건들을 그린 작품이다.

ⓒ (주)NEO


오늘날, 자아정체성이나 자존감은 사회적으로 중요시 여겨지는 것 중 하나이다. 이는 모두 '자아'와 '존재'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나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그리하여 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과 불안이 공존하는 시대이다. 여기에는 소위 철학사적인 맥락이 따를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신이 죽은 시대, 총체성이 사라져서 실존의 공포 등을 인간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시기 아니겠는가.

존재에 대한 질문은 개개인에 멈추지 않고 인간성 자체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하기도 한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고, 자신과 비슷한 존재들과 가상의 유대감을 형성하며 일종의 소속감을 느끼고자 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는 단지 21세기만의 질문은 아니다. 인류는 끊임없이 인간을 정의하고자 했다.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를 비롯한 호모 루덴스, 호모 엠파티쿠스, 호모 헌드레드, 그 외의 수많은 '호모 XXX'들이 존재하게 됐다. 이는 인간성의 범주를 확장했다는데 의의가 있으나, 동시에 폭력적이고 오만한 발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수많은 인간을 하나의 언어로 파편화하여 요약하는 셈이니 말이다.

지난 11월 4일, 서울 대학로 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에서 개막하여 오는 10일 폐막하는 뮤지컬 <배니싱>의 수많은 미덕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의사, 뱀파이어를 만나다

 뮤지컬 <배니싱> 공연 사진. 창작 초연 뮤지컬 <배니싱>은 1921년 강화도에서 정체 불명의 시체를 해부하다가 벌어지는 미스테리한 사건들을 그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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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배니싱>은, 그 어떤 뮤지컬보다 '인간'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작품일 것이다. 세 명의 상징적인 인물을 통해 인간성에 대해 질문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성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지만, <배니싱>은 인간성이 무엇인지 결코 정의하지 않는다. 2016년 트라이 아웃에 이어, 2017년 1달 남짓의 초연으로 돌아온 <배니싱>은 여성 인물이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유발한다. 하지만 수많은 고찰과 그 고찰을 대변하는 인물들은 상징적으로 동시에 서사적으로 납득되는 인물들이다. <배니싱>의 작품성은 여기에서 나온다.

Vanishing, 형용사형으로 '사라지는', '사라지는 일', 혹은 현재 분사로 '사라지는 중'으로 대략 번역할 수 있다. 이 단어를 극의 제목으로 내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이야기는 세 인물 의신, 케이, 명렬을 통해 진행된다. 그 중 인간 의사가 두 명이고, 뱀파이어가 한 명이다. 연극이나 뮤지컬 서사에서 의사와 뱀파이어는 식상한 설정이다. <지킬 앤 하이드>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프랑켄슈타인>의 빅터 프랑켄슈타인 등이 너무 강렬하다. 뱀파이어는 장르를 막론하고 인기 있는 소재이다. 그러나 자칫 뻔할 수도 있는 이 설정을 <배니싱>은 새롭게 풀어냈다.

의신을 온전히 '선한 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일종의 영웅적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이 극에서 온전한 '선'은 없다) 의신은 인간성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고 한다. 그는 '신의 세계'라 불리는 영원한 삶, 인간의 한계성을 극복한 삶을 추구한다. 또한 그는 '식민지 2등 시민'이라는 한계를 가지지만, 의사라는 점에서 사회의 '주체'라고 볼 수 있다. 그와 대조했을 때 케이는 중심부에 위치하지 못한, 바깥의 인물, 타자이다. 그는 소외 받고, 고독해하는 한 인간 군상이다. 그는 여느 뱀파이어처럼 인간과 지극히 닮은 외모를 지닌, 한때 인간이었으나 뱀파이어로 감염된 존재이다. 의신은 시신의 해부 연습을 하려다가 케이의 거주 공간에서 만난다. 뱀파이어로 햇빛에 타들어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케이에게 의신은 자신이 의사라며 당신을 고쳐주겠단 식으로 이야기 한다. 이는 케이에게 매력적인 이야기로 들린다. 자신의 문제가 '존재'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어떤 '상태' 즉, 고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니까.

 뮤지컬 <배니싱> 공연 사진. 창작 초연 뮤지컬 <배니싱>은 1921년 강화도에서 정체 불명의 시체를 해부하다가 벌어지는 미스테리한 사건들을 그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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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신의 모습은 영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학, 서구, 문명을 의미한다. 자신이 의원이 아닌 의사임을 강조하는 의신은, 출생은 동양이나 그 지향점은 서구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과학'과 '의학'은 서구의 것이다. 의신이 추구하는 빛은 과학을 통한 인류의 발전과 번성일지 모른다. 그는 지극히 인간적인 인물이며 인간을 위한 삶을 추구한다. 그의 목표는 '인간들의 발전'이라는 근대적 낙관이다. 그 목표를 위한 과정에서, 시체를 방금 전까지 살아있던 사람의 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실험 대상으로 볼지라도, 그는 휴머니스트다. 그 휴머니즘은 '문명 안'의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가 자신의 몸과 지극히 닮은 케이, 그러니까 '인간처럼' 보이는 케이를 문명 안으로, 세계의 중심부로 포괄하려 한 것은 일종의 인류애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야생의 존재, 문명 밖의 존재에게 케이라는 이름을 주는 것, 그리하여 문명으로 들여오려 하는 것, 이때까지 의신은 역사 속 여느 계몽의 주체들과 다르지 않다. 예컨대 서구의 식민지는 지극히 폭력적인 발상이며 결코 옹호할 수 없지만, 최초의 식민지 개척 이유 중에는 제국주의적 이득만이 아니라 나름의 휴머니즘적인 동기들도 있었다. 저 문명 밖의 존재들, 신의 구원 밖에 있으며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이들을 문명 안으로 포함 시켜주자는.

중심의 삶을 그리워하던 외로운 존재 케이. 그는 그런 의신의 모습을 마음에 들어 한다. 사실 의신의 행동은 케이의 관점에서 '존재적' 행위였다. 김춘수의 시 '꽃'이 떠오른다. 이름을 부르자 꽃이 '되었듯', 케이는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존재에서 의신의 명명 행위를 통해 비로소 '케이'라는 존재가 된 것이다. 케이는 그를 통해 자신이 추구하던 빛(온기)을 느낀다.

하지만 의신과 케이의 관계는 타자인 케이가 의신을 물고 자신의 동족으로 만들면서 전복된다. 문명, 과학이라는 '주체' 그 자체였던 의신은 타자가 된다. 이 과정에서 케이가 의신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며 화를 내는 것은 꽤나 인상 깊다. 이야기는 그 자체로 목소리, 즉 '타자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주변부와 바깥으로 물러나는 것이다. 이는 의신이라는 영웅의 몰락이기도 하다. 영웅의 몰락은 영웅이 가진 문학적 상징성을 통해 살펴볼 만하다. 인간들은 신의 세계로 나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영웅은 신과 인간의 중간자로 설정된 존재들이다. 그들은 굉장히 이상적이다. 한계 많은 인간들이 스스로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설정한 이상적 인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영웅적 면모를 지닌 의신이 무너지는 것, 이는 기존 인간의 몰락, 인간 개념의 해체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완벽해보이던 과학 문명의 추락이 될 수도 있다.

1912년은 신이 죽은 지 오래된 시대이다. 신의 자리를 대체한 건 과학이었다. 과학을 맹신하던 완벽한 주체이자 영웅 의신이 몰락한 순간,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이 시작된다. 사실 1921년과 2017년은 다른 시대이기도 하지만, 과학 기술이 가장 우선시되고,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낙관이 지배하던 시대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일지라도, 관객 역시 '인간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다. 의신이 무너지는 걸 바라보는 관객들 중 몇몇의 머리에는 어떤 질문이 스칠 법도 하다. '인간은 뭐지?' '인간은 왜 존재하고 살아야 하지?' 등.

인간이라는 존재

 뮤지컬 <배니싱> 공연 사진. 창작 초연 뮤지컬 <배니싱>은 1921년 강화도에서 정체 불명의 시체를 해부하다가 벌어지는 미스테리한 사건들을 그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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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있던 존재가 하나 있다. 명렬. 그는 극 중에서 비판받을 만한 인물이다. 민족적 혹은 국가적 관점에서 그는 친일파이다. 또한 제국주의자며, 일제의 전쟁을 돕는다. 그의 이기심은 의신을 '인간 사회'에서 내쫓았지만, 이후 자신의 실험을 위하여 다시 그를 불러오기도 한다. 그의 행동은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 하지만 명렬은 극 중 반동 인물은 될지 몰라도 '악인'으로 단순히 치부하기도 어렵다. 그의 수많은 행동이 잘못됐지만, 막연한 악인으로 그려지기 보다는 인간 군상 중 하나에 가깝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사회의 중심으로 편입되는 것, 다시 말해 '성공하는 것'이다. 성공을 위한 행위에서 문제가 생겼을 뿐, 그의 동기 자체는 우리 모두가 가지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가질 수 있는 욕망이 결국 명렬의 악행들을 자아냈다. 이것은 인간의 악함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악함 이전의 나약함을 주목하게 한다. 동시에, 명렬이 '악인'으로 온전히 분류되지 않을지라도, 극 중 가장 '사회적 존재'인 그가 하는 행위들이 전부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비판받을 만한 것들이다. '사회적 존재'라 불리는 인간의 성질을 다시 한 번 모호하게 만든다.

또한 명렬이라는 인물 덕분에 '삼인극'이라는 구조는 더욱 빛을 발한다. 의신이 뱀파이어가 됐을 때, 무대 위에는 인간과 닮은 형상으로 '인간의 피를 빨아먹을 수 있는' 비인간 뱀파이어 2명과 그냥 '평범'하고 '정상적'인 인물 1명으로 갈린다. 인간과 유사해보이지만, 인간의 공포이기도 한 '비인간'이 인간보다 무대 위에 더 많은 상황. 그러나 지극히 '인간적'이라 불리는 행위는 오히려 이 '비인간'에게서 더 많이 보인다. 의신에게 피를 제공해주고, 그를 챙기고, '온기'를 이야기하는 등.

 뮤지컬 <배니싱> 공연 사진. 창작 초연 뮤지컬 <배니싱>은 1921년 강화도에서 정체 불명의 시체를 해부하다가 벌어지는 미스테리한 사건들을 그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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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와 명렬은 타자와 주체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인간성의 전제가 되는 수많은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의신은 명렬을 믿었다. 케이가 가져다주는 피는 그 정체를 의심하지만, 명렬이 사람을 죽여서 낸 피는 당연히 동물의 피인 줄 알고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 피의 출처를 알았을 때 의신은 질문을 던지고, 명렬은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 중 하나인 '(더 훌륭한 목적을 위한) 살인이 왜 나쁘냐'는 식으로 맞받아친다. 인간은 결국 사람을 죽이며 살아간다는 이야기는 흥미롭다. 우리가 누리는 것들은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착취하며 얻어낸 것들이니까.

사라져가는 것의 아름다움

실험을 하다가 의신은 자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한다(자신의 한계이자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모습이라 볼 수 있다. 이미 몰락한 그가 다시금 또 추락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명렬은 자신의 실험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의신을 몰아세우고, 그 과정에서 의신에게 물린다. 그리고 케이와 의신은 그들이 처음 만났던 곳이자, 그들이 은신했던 폐가로 향한다. 그 때 케이는 햇빛을 마주하고도 아무렇지 않는다. 그는 의신의 실험이 성공하면서 뱀파이어에서 인간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칼을 맞고 죽어가는 케이에게 의신은 자신의 피를 마시라고 권한다. 다시 뱀파이어가 되면 살 수 있으니까. 그러나 케이는 거부한다. 대신 오롯이 죽어가기를 택한다. 그런 케이의 곁에서 의신 역시 빛 속으로 사라지는 길을 택한다.

이 때 극의 제목 '배니싱'의 뜻이 발휘된다. 인간성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인간은 여느 존재들처럼 결국 '사라지는' 그리고 지금도 '사라져가는' 존재들이다. 다소 허무주의적이고 비관적인 결말에서 오히려 비극성을 제거하는 건 그 죽음이 무대에서 묘사되는 방법이다. 인간의 한계를 수용하고 이를 향해 나아가는 의신의 모습은 숭고하다. 그는 실패했지만, 실패함으로써 영웅이 된 자다.

보통 빛은 생명을, 어둠은 죽음을 상징한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 그 흔한 상징은 전복된다. 그들이 죽는 순간, 무대에는 가장 따뜻하고 밝은 빛이 가득 찬다. 삶과 죽음, 유지되는 것과 사라지는 것의 경계를 허문다. 사라져가는 순간에 오히려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은, 그 자체로 '휴머니즘'적이다. 인간의 필연적 한계이던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빛을 맞이하고 따스함을 누린다.

극 중 자주 등장한 단어는 '인간'만이 아니다. 케이의 입에서 발화되던 '온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배니싱>은 인간이 어떤 존재라고 응답하진 않지만 조심스레 제시한다. 다른 몸을 가진 우리들은 서로 타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온기가 되어줄 수 있진 않느냐고. 사라져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필연적 한계 속에서, 서로의 곁에 있어줌으로써 그 공포의 순간을 빛나는 순간으로 전환할 수 있진 않느냐고. 공연장의 빛이 무대에만 머물지 않고 관객석까지 비춰질 때 그 의미는 더욱 커진다. 어쩌면 무대와 객석이라는, 서로 분리된 공간 속에 있던 존재들이지만 그 '빛의 순간'에 함께 있는 것, 이는 관객들이 <배니싱>을 보며 느낄 수 있는 윤리적 체험일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는 서로를 흡혈할 수도, 뱀파이어가 될 수도 없다. 주체가 직접 권력을 해체하고 온전한 타자가 되어보는 것 또한 어렵다. 과학과 의학, 역사 그 자체가 인간들에겐 착취의 시간이었고 지금의 삶도 그러하다. 도덕도, 과학도, 역사도 온전히 믿을 수 없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우린 결국 죽을 존재들이고, 이 모든 시간은 사라짐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결국 사라질지라도 감히 선택하는 것, 타인의 곁에 온기로 남아주는 것, 함께 해주는 것, 이것들이 우리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닐까. 동이 틀 때 사라지던 의신과 케이는 어쩌면 태양보다 더 강렬한 빛이 아니었을까.

공연 예술의 특성상 <배니싱>은 지금도 사라져가고 있다. 수많은 질문을 남긴 채 명확하게 답하지 않은 <배니싱>. 대신 '사라짐의 과정'을 겪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관객들에게 질문은 넘어간다. 어쩌면 그 답은 애초부터 없었을지 모른다. 그 질문은 그저 사라져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한때 의신과 케이가 그 자리에 존재했던 것처럼 그 질문들 역시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성에 대해 다시금 물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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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까칠하게 공연을 보고, 이야기 합니다. 때로 신랄하게 '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잘 만든 작품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하지 않을까요? / 해외 관극도 함께하며, 잘 만든 서사를 기다리는 중.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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