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우무대


배시시 웃는 얼굴에서 순호의 유약함과 강인함이 느껴진다. 오디션을 볼 때는 '순호'가 아닌 다른 역할을 도전했지만 약 5분의 시간 동안 연습한 대사로 5번째 오르는 <여신님의 보고계셔> 창작진 마음을 움직였다.

신예 임진섭이 순호가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무대에서 펼쳐지고 있다. 지난 10월 23일, 임진섭을 서울 대학로 한 카페에서 만났다.

북한군 류순호, 무인도에서 여신을 만나다

ⓒ 연우무대


<여신님이 보고계셔>는 북한군을 포로수용소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포로들의 폭동으로 무인도에 남한군과 북한군이 고립된다. 덕분에 북한군을 국군 대위 한영범은 포로로 옴짝달싹 못 하게 되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까지 처하게 된다.

"여신님은 조용한 것을 좋아합니다! 앞으로 욕설 금지! 구타 금지 싸움 금지! 큰 소리 나거나 다치는 일은 삼갑니다!"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계셔> '그대가 보시기에' 중에서

그러던 중 이들 앞에 나타난 '여신'의 존재. 그 존재는 서로를 향하던 총구를 내려놓게 하고, 무인도에는 평화로운 분위기까지 형성된다. <여신님이 보고계셔>는 귀에 꽂히는 넘버 뿐 아니라, 마음의 벽을 허물고 한마음이 되는 남북한군의 모습으로 마음을 훈훈하게 만드는 기분 좋은 극. 하지만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가슴을 저미기도 한다.

"요즘도 눈물이 계속 난다. 무대 올라가기 전에 소대에서 형들이랑 장난을 치다가도, 장면만 시작되면 집중이 '딱' 된다. 내 장면에 집중하면서도, 형들이 펼쳐놓는 에피소드를 보면 계속 마음을 건드리게 된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임진섭은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하자,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고 말했다. 단순히 보면 웃고 즐길 수 있지만, 인물들이 가진 사연을 들여다보면,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기 때문.

"연습할 때도 '꽃봉오리' 장면에서 계속 눈물이 났다. 함께 하는 배우들 눈빛을 피해도 안 되고, 정한 동선이 있는데도, 계속 눈물이 난다. 에피소드 장면에서는 코러스를 하는데, 석구의 감정이 느껴져, 눈물을 안 흘린 척하는데도 '뚝뚝' 떨어진다. 다른 배우들도 울거나 참는 표정이다."

임진섭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전쟁으로 인해, 마음속에 있는 말을 내뱉지 못하고, 향한 마음을 접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석구의 마음은 어쩌면 역사 속에서 벌어진 많은 일화의 상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임진섭은 그만큼 작품에 흠뻑 빠져있었다.

"'꽃봉오리'에서 누나 만나는 장면이 제일 슬프다. 순호 역에서 봤을 때 악몽을 꾸는 장면이나, 형이 죽는 장면이 가장 슬플 수 있는데, '꽃봉오리' 장면이 아름답게 슬프고, 가슴이 너무너무 아프다. 석구가 누나한테 할 말이 못하고, 너무나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순간이 있는데, 마음이 아프다. 누나가 '석구야, 그거 아니야'라고 하는데, 마음이 너무 아파온다."

극 중 임진섭이 맡은 역할은 류순호다. 유일하게 배를 고칠 수 있기에, 무인도에서 탈출할 수 있는 열쇠를 쥔 인물. 전쟁 후유증으로 순호는 악몽을 시달리게 되고, 그런 순호를 위해 영범은 여신 이야기를 만들어 준다. 덕분에 싸우거나 욕설 금지, 함께 나눠 먹기, 예의범절 지키기 등, 생활 속 지켜야 할 수칙들이 '여신님'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하나씩 생기고, 무인도에도 웃음꽃이 피우기 시작한다.

"연습할 때 연출과도 얘기했는데 '여신'은 순호다. 모두가 다 행복하게 살고 싶은 존재. 순호가 총소리에 트라우마가 있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착한 마음과 행동에 대한 모습에서 갈등하기도 하지 않나. '네가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야'라는 마음과 '난 노력했어 난 몰라"라고 하는 것처럼."

극 중 인물들에게 '여신'이라는 존재가 다르게 그려진다. 삶의 활력소가 되고, 이유가 되는. 사랑하는 대상이거나, 그리운 사람 등으로 비칠 수 있다. 그렇다면 임진섭 삶에서 '여신'의 존재는 누구일까.

"어머니 아버지. 부모님과 친근하게 지내서, 전화도 많이 하는 편이다. 나를 일으켜 세워주고, 울고 웃게 해주는 분들이다. 어머니는 자극제다. 영상통화로 하면 장난도 많이 치고, 얘기도 하고, 아닌 것에는 따끔한 충고도 해주신다. '자만하지 말고 겸손해라' '사람으로서 살아가라'라고 말씀해 주신다. 배우로서, 사람으로서 부모님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처음에는 배우를 하는 것에 엄청 말리셨다. 집을 나가보기도 하고(웃음). 근데 시작하고 배우로서 체계가 잡히고 <꽃보다 남자>로 무대에 오르고, <여신님이 보고계셔>까지 하게 되니까, 아버지께서도 좋아하신다."

내면의 자신을 만나다

ⓒ 연우무대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를 지닌 순호. 그렇기 때문에 감정의 변화가 가장 큰 인물이다. 과거 회상 장면뿐 아니라, 후유증으로 바들바들 떨기도 하고 여신님의 존재가 생기고 나서는 배시시 웃기도 한다. 내면의 자신과 맞닥뜨리기도 하고.

"순호가 아픔을 완전히 극복한 거 같지 않다. 형과의 회상장면에서 형의 행동을 보면, 형은 이미 다 알고 있고, 순호는 아닌 거 같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면, 형(장동건 분)이 동생(원빈 분)을 위해 위험까지 감수하려고 하고, 동생은 안전하게 지키려고 한 것처럼. 순호도 전쟁이라는 상황을 형처럼 인지하지 못한 상황일 것이고, 형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지 않았을까.

거기에 포로수용소에서 상처 아물어가는 과정에서 배가 난파되고 무인도까지 가게 됐으니, 거기에서 만난 이들이 무서웠을 수도 있다. 자신을 방어해야겠다는 마음이, 영범이 먼저 언급하긴 했지만, 여신으로 투영됐고, 그로 인해 무인도가 평화롭게 변하지 않나. 어떻게 보면 순호가 속이는 것일 수도 있다. 음. 속인다는 것보다, 평화를 원하는 하얀 거짓말 같은?"

선한 눈빛에서 흘러나오는 순수한 미소는 영락없는 순호 같지만, 그만큼 순호에 대한 깊은 고심의 흔적이 묻어난다. 순호를 분하면서 임진섭 개인에게도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을 만큼.

"워낙 밝은 성격인데, 낯도 가리고 부끄럼을 탄다. (웃음) 자괴감이 들면 감정을 숨기고 작아지기도 한다. 내가 순호였다면? 시대는 다르지만, 왠지 비슷한 점이 많았을 것 같다.

순호가 되면서, 부딪히고, 어떤 순간을 맞닥뜨렸을 때, 내가 잘못한 점은 인정하고 다른 방법을 강구하거나 그럴 용기가 생겼다. 자존감이 조금이나마 올라간 느낌? (웃음). 안 된다는 생각보다 '우선 해보자!'라는 생각. 순간에만 보는 게 아니라, 계속 생각하고 넓혀보면, '자신감 갖고 밝게 하자!'라고 말이다. 또, 극 속에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여유를 배웠다. 마음으로 응원하고 챙겨주는 부모님처럼, 형들처럼."

연기를 전공으로 배운 것처럼 안정된 모습을 보이는 임진섭이지만, 알고 보면 은행직원이 될 수 있는 안정된 길을 뿌리치고 배우가 됐다고.

"얼마 전에 자퇴했다. 후련하다. (웃음) 은행직원이 되어도 물론 힘은 들겠지만, 안정된 생활일 것은 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거 해야지, 재미없지 않나. (웃음) 무대에 섰을 때가 행복하고 좋다. 무대에 더 전념하고 싶고, 이 길로 가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연기를 배우기 위해 연극영화과에 다시 들어가는 것은 모를까, 지금 결정이 좋다. 물론 후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행복할 거 같다.

워낙 노래를 좋아한다. 그러다 연기 레슨을 받았는데, 엄청 재밌더라! 뮤지컬을 몰랐는데 <노트르담 드 파리>를 보고 콰지모도에게 흠뻑 빠지게 됐고, 춤 못 추는데 <꽃보다 남자> 통해서 하게 됐다. 많이 부족한 거 같은데 순호가 됐다. 동현과 주화 역으로 오디션을 봤는데, (오디션 현장에서) 5분 동안 순호 역을 연습할 기회를 주셨다."

<여신님이 보고계셔>를 통해 순호를 만나, 배우로서 성장하고 한발자국 나아갈 기회가 됐다. 하지만 무엇보다 임진섭에게 큰 의미는 함께 하는 배우들이었다.

"항상 멋있다고, 대단하다고 생각한 선배들과 작품을 하는 거 아닌가. 그것만으로도 정말 좋고, 재밌다. 게다가 작품이 정서적으로 와 닿는다. 하지만 간간히 갈피를 못 잡을 때도 있었는데 형, 누나들이 맞춰주고, 알려줘 큰 힘이 됐다. 뭔가에 대해 정확한 답과 풀이과정을 가르쳐준다는 느낌보다, 내가 여러 방향으로 풀어갈 수 있게, 시도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줬다. 덕분에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느낄 수 있다."

덕분에 임진섭은 앞으로 하고 싶은 작품보다, <여신님이 보고 계셔>를 통해 만난 형들처럼, 후배들에게 '손잡아 주는' 형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여신님이 보고 계셔> 순호가 여신을 통해, 자신을 이끌 수 있게 된 것처럼, 임진섭 역시 작품과 함께 한 배우들을 통해 성장하고, 나아갈 수 있는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어떤 역할을 막연히 하고 싶은 생각보다, 나이가 들고, 연륜이 생기면 홍우진 형이나, 성두섭 형처럼, 동생들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안 좋은 작품은 없지 않나. 어떻게 연출이 되고, 배우들이 풀어가고, 관객들이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한 건데, 앞으로도 <여신님이 보고계셔>처럼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웃음)"



과연 순호는 집으로 돌아갔을까요?
"어쩌다 보니, 관객들이 집에 못 갔을 거 같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도 무대 위에서 슬퍼하는 감정이 크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그렇게 된다. 늘 감정이 앞서게 된다."


여신님이 보고계셔 임진섭 여보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공연 전문 프리랜서 기자입니다. 연극, 뮤지컬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 전해드릴게요~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