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의 대화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 커런츠' 부문으로 공식 초청된 영화 <물속에서 숨 쉬는 법>은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했다. 왼쪽부터 고현석 감독, 준석 역의 배우 오동민, 현태 역의 배우 장준희 그리고 술집 주인으로 출연한 최창환 촬영감독.

▲ 관객과의 대화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 커런츠' 부문으로 공식 초청된 영화 <물속에서 숨 쉬는 법>은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했다. 왼쪽부터 고현석 감독, 준석 역의 배우 오동민, 현태 역의 배우 장준희 그리고 술집 주인으로 출연한 최창환 촬영감독.ⓒ 배주연


정리해고문과 차량 견인 안내문. 이 두 장의 종이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혹시 살인은 가능할까?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N. 로렌츠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작은 변화가 폭풍우와 같은 커다란 기후 변화를 유발할 수 있다는 '나비효과 이론'을 발표했다. 이는 소소한 사건 하나가 나중에 거대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고현석 감독의 영화 <물속에서 숨 쉬는 법>은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에 '뉴 커런츠' 부문으로 공식 초청됐다. 작품 상영 후 이루어진 출연진과 관객의 만남에서는 이 영화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가 공개됐다.

고현석 감독은 자동차를 타고 가던 중 라디오에서 소개된 단편소설을 듣고 영감을 받아 2500만 원의 저예산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대구 감독, 제주도 촬영감독, 서울 배우 등 전혀 다른 지역 거주자들이 어우러져 완성한 이 작품은 태생부터 '우연'이었으나 훗날 '필연'적 결과물을 낳았다. 영화 내용 역시 '우연'의 나비가 하루 동안에 두 가정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그 진행 과정을 담아냈다.

서로 무관심한 두 가정의 가족

영화는 대구 도심 주택가에서 이른 아침 쓰레기를 수거하는 환경미화원이 무언가를 보고 놀라는 장면으로 출발한다. 그리고 엔딩에서야 첫 장면과 함께 그 정체가 밝혀진다. 이 과정에서 카메라는 냉정한 관찰자가 돼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당사자들이 대응하는 모습을 떨어져서 지켜본다.

 영화 <물속에서 숨 쉬는 법>에서 현태의 아들 영준은 안과에서 검진을 받고 난독증 판정을 받는다. 글씨가 보이긴 하지만 춤추는 것처럼 보여 인식할 수 없는 이 질환처럼, 등장인물들은 상대 측 가족 구성원을 마주쳐도 전혀 누구인지 인식하지 못한다.

영화 <물속에서 숨 쉬는 법>에서 현태의 아들 영준은 안과에서 검진을 받고 난독증 판정을 받는다. 글씨가 보이긴 하지만 춤추는 것처럼 보여 인식할 수 없는 이 질환처럼, 등장인물들은 상대 측 가족 구성원을 마주쳐도 전혀 누구인지 인식하지 못한다.ⓒ 부산국제영화제


또한 동일 회사의 구성원이지만 관리자와 노동자 사이에 간격이 있듯, 그들의 아내와 아이는 병원과 길이라는 같은 장소에 있음에도, 상대가 회사 동료의 가족이라는 점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등장인물 그(녀)는 또 다른 그(녀) 앞에서 철저하게 타인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관심은 불행을 가속화시킨다.

인사과장 준석(오동민)은 상사에게 정리해고 인원 서류를 전달받는다. 그는 자동차 부품 공장의 반장 현태를 불러 점심을 같이하자고 제안한다. 마주 앉아 밥을 먹는 반장에게 준석은 해당 작업라인에서 한 명이 그만둬야 한다고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그리고 슬며시 서류 한 장을 넘긴 후 바쁘다며 먼저 일어난다.

은행 마감 시간이 다 돼 가는데 아침에 은행 일을 부탁했던 아내에게서는 도통 연락이 없다. 오늘 꼭 보내야 일이 성사되니 다급해진다. 일찍 퇴근하겠다고 상사에게 부탁해봤지만 일을 마무리하고 가란다. 결국 아내와 통화가 되었는데, 아내는 대뜸 "차가 없어"라고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린다.

현태(장준희)는 네가 아니면 내가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고뇌한다. 오늘 아들의 생일이니 일찍 오라는 아내의 당부가 있었건만, 도저히 맨정신으로 견딜 수 없다. 동료 한 명과 퇴근 후 술을 마시면서 말을 꺼낸다. 결국 내가 그만둔다며 동료에게 말했으나, 차마 집에 가서 아내에게 말하기 힘들다. 하나뿐인 아들은 난독증 환자라 판정받았고, 아내도 팔을 다쳐서 몇 달간 일을 쉬고 있다.

작은 우연에서 시작된 불행

 영준의 생일날. 아빠가 오기를 기다리지만 밤이 늦도록 오질 않고, 엄마 지숙은 홀로 어둠 속에서 쓸쓸하게 남편을 기다린다.

영준의 생일날. 아빠가 오기를 기다리지만 밤이 늦도록 오질 않고, 엄마 지숙은 홀로 어둠 속에서 쓸쓸하게 남편을 기다린다.ⓒ 부산국제영화제


휘청거리며 집으로 가던 현태는 골목길 안쪽에서 빛나는 술집 간판을 보고 또 술을 마신다. 만취하여 걷다보니 미처 오던 차를 발견하지 못해 재수 없게 부딪혔다. 주섬주섬 일어나 운전자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집으로 걸어간다. 취기 탓인지 쉬고 싶다. 힘든 하루다. 마침 의자가 보인다.

은혜(이상희)는 우울증으로 약을 먹는다. 전업주부인 그는 이른바 '독박육아'를 하는 중이다. 아기는 툭하면 울어대서 도통 밤에 편히 잠을 잘 수 없고 식욕마저 없어진지 오래다. 아기가 간밤에 너무 울어서 '어디 아픈가' 싶어 오늘은 아기를 병원에 데려가려 한다. 그런데 남편 준석은 출근길에 "오늘 꼭 은행에 가서 부동산 거래금을 입금하라"고 하더니 회사에서도 전화해서 재촉한다. 자는 아이 옆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얼른 준비해서 은행에 가려는데 경비 아저씨가 말을 건다. 요새 통 얼굴이 안보이길래 친정에 간 줄 알았다느니 주절주절 늘어놓는다. 다행히 병원에 가니 아기는 괜찮다고 한다. 엄마 관심 받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은행 업무 마감까지 얼마 남질 않았건만 누가 주차한 자가용 앞에 차를 세워두었다. 연락처로 전화해서 간신히 차를 빼서 은행으로 간다. 허둥지둥 은행 앞 도로에 주차했다. 아기는 잠도 자니 그냥 차에 두고 얼른 일 봐야지. 소변도 마렵다.

지숙(조시내)은 아들의 안과 진찰이 끝난 후 점심으로 패스트푸드를 먹고 학교에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다친 팔의 깁스를 풀기 위해 의료원으로 향했다. 진찰을 기다리는데 아기를 안은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는데 어째 쌀쌀맞다.

깁스를 풀자마자 그녀는 아들의 생일상 차릴 돈을 벌기 위해 그간 다쳐서 몇 달 쉬었던 식당에 간다. 아직 조심해야 하지만 다시 일거리를 잡아야 하니 잽싸게 테이블을 치우고 설거지도 했다. 일당으로 마트에서 장을 봐서 저녁을 차리고 기다리건만 남편이 도통 오질 않는다. 결국 아들과 단둘이 그냥 저녁을 먹는다.  

영준(김현빈)은 병원에 다녀오느라 뒤늦게 등교를 했다. 친구들이 안경을 뺏으며 장난을 친다. 난독증으로 글씨가 잘 보이지 않으니 자꾸 책을 더 가까이 두고 보게 된다. 내일 낭독 연습도 해야 하는데.

어차피 소화해야 할 삶, 궁지에 몰린 마음도 씹어야 한다

 영화 <물 속에서 숨쉬는법> 후반부에 나오는 장면. 은혜는 갑작스런 사고에 망연자실 한다. 예상치 못하게 그녀의 가족을 죽음의 길로 인도한 견인업체 직원은 뒤에서 그저 바라볼 뿐이다.

영화 <물 속에서 숨쉬는법> 후반부에 나오는 장면. 은혜는 갑작스런 사고에 망연자실 한다. 예상치 못하게 그녀의 가족을 죽음의 길로 인도한 견인업체 직원은 뒤에서 그저 바라볼 뿐이다.ⓒ 부산국제영화제


하굣길에 은행 앞을 지나가는데 어떤 아저씨가 전봇대에 서류 한 장을 부착하는 것이 보인다. 서류를 떼어서 뭐라 적혀 있나 읽어 보며 가는데 어떤 여자와 부딪혔다. 여자는 정신없어 보인다. 

견인업체 직원은 은행 앞에 무단으로 주차된 차가 있기에 안내문을 전봇대에 부착해 두고 견인할 준비를 했다. 길을 가던 안경 낀 남학생 하나가 멈춰서 전봇대에 다가가 안내문을 본다. 그 모습에 슬쩍 관심을 두었으나 어서 일을 해야 한다. 해도 짧으니. 차를 견인해서 회사에 보니 벌써 하늘은 깜깜하다. 

극중에서 영준이 학교에서 더듬더듬 시를 낭송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등장하는 시는 천양희 시인의 <밥>이다.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 천양희 <밥> 중에서

영화 속 인물들은 이 시적 자아처럼 다들 궁지에 몰리게 되고,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아등바등 투쟁한다. 하지만 삶은 그들 각자에게 모두 깊은 절망감만을 안겨 주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그 갈등의 씨앗은 기껏 종이 두 장에 불과할 뿐이다.

정리해고와 차량 견인 안내문의 끝은 두 가족 구성원 중 각각 한 명의 죽음을 낳는다. 그리고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병원에서 또다시 상대 가족과 마주치지만 여전히 누구인지 서로 알지 못한다. 마치 난독증에 걸려 글자를 보고도 읽지 못하는 영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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