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모로 내우외환(內憂外患)이 가득했다. 그간 부산국제영화제를 총괄 지휘했던 고(故) 김지석 부집행위원장 겸 수석 프로그래머가 별세했고 지난 2014년 <다이빙벨> 사태를 촉발시킨 서병수 부산 시장은 영화제 측과 영화인들에 대한 사과 없이 개·폐막식 참석을 강행해 빈축을 샀다. 그래도 부산국제영화제(BIFF)는 부산국제영화제다.
 
'영화제는 영화로 보여줘야 한다'는 말처럼 지난 21일 막을 내린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에는 오랫동안 영화제를 기다린 영화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영화들로 가득했다. 올해는 유독 박배일 감독의 <소성리>, 허철녕 감독의 <말해의 사계절> 등 한국 다큐멘터리 섹션 상영작들이 영화 관계자들의 주목과 호평을 한 몸에 받았다. 300여 편 가까이 되는 상영작들을 모두 소개할 수 없지만 이 중 기자가 눈여겨 본 화제작 10편을 선정, 소개해보고자 한다.

[하나]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냉전 배경, 어른을 위한 동화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포스터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포스터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라라랜드>(2016)가 있었다면 올해는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 있다. 올해 개최한 제74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이자 일찌감치 부산국제영화제 야외극장 상영작으로 초청돼 국내 영화팬들의 주목을 받았다.

영화는 미국과 소련 양국간 냉전 체제가 극심했던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언어 장애가 있는 여성 엘리사(샐리 호킨스 분)가 신식 무기를 개발하는 비밀 연구소에 갇힌 물고기 인간을 사랑하게 되며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보여준다. 냉전 체제의 갈등을 통해 여성, 장애인, 유색인종 등 '사회적 약자 차별' 문제를 길예르모 델 토로만의 기발하면서 섬세한 터치로 잘 풀어냈다는 평이다. 올해 여름 국내 개봉한 영화 <내 사랑>(2016)으로 많은 국내 팬들을 확보한 배우 샐리 호킨스의 애틋한 사랑 연기가 돋보인다. 어른들을 위한 가슴 시린 동화를 그려낸다. 2018년 2월 국내 개봉 예정.

[둘] <세 번째 살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색다른 변신
 
 영화 <세 번째 살인> 스틸 컷.

영화 <세 번째 살인> 스틸 컷. ⓒ 티캐스트

 
그간 가족 이야기를 따뜻하면서도 예리하게 만들어 왔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이번에는 범죄 스릴러의 외면을 띤 색다른 영화를 들고 부산을 찾았다. 살인을 순수히 인정하는 미스미(아쿠다 쇼지 분)의 변호를 맡게된 시게모리(후쿠야마 마사하루 분). 시게모리는 미스미의 감형을 위해 사건 정황을 알아보던 중 도무지 믿기 어려운 놀라운 이야기들을 접하며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범죄 스릴러의 외형을 갖추고 있지만 법정 다툼 신에서 느껴지는 서스펜스을 기대했다면 실망하기 십상인 영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사람이 사람을 심판하는 것, 진실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 말처럼 이번 영화는 고레에다 감독 특유의 가족 이야기를 사랑했던 팬들, 스릴러 장르를 기대했던 관객 모두에게 색다른 이야기로 다가갈 전망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이후 4년 만에 고레에다 감독과 호흡을 맞춘 배우 후쿠야마 마사하루,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에 이어 두번째로 고레에다 감독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 히로세 스즈, 일본의 대표 국민배우 아쿠다 쇼지의 명연기가 돋보인다. 고(故) 김지석 프로그래머와 남다른 인연을 맺기도 했던 고레에다 감독은 올해 아시아 영화 아카데미(AFA) 교장을 맡으며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과 관심을 드러낸 바 있다. 올해 12월 국내 개봉 예정.

[셋] <상애상친> 세 여성의 삶을 통해 바라본 오늘의 중국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 '상애상친'

영화 <상애상친> 스틸 컷. ⓒ 부산국제영화제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이다. 중화권 대표 배우이자 감독인 실비아 창이 연출 겸 주연을 맡았다. 2015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이었던 영화 <산이 울다>의 주인공 랑예팅이 극 중 실비아 창의 딸로 등장해 다시 한번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고향에 모셔둔 아버지의 묘와 합장하고 싶었던 후이잉(실비아 창 분)은 아버지의 본처 난나(오언주 분)의 극심한 이장 반대로 곤경에 처하게 된다. 설상가상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딸 웨이웨이(랑예팅 분) 때문에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영화는 각 세대를 대표하는 세 여성의 갈등과 화해를 통해 중국의 근현대사를 은유적으로 고찰한 수작이다. 세대 갈등과 여성 문제를 섬세한 연출력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비슷한 상황에 놓인 한국 관객들의 많은 호응을 얻기도 했다.

실비아 창 감독은 "세대 차이로 인해 소통이 힘들었던 사람들도 차츰 서로를 이해하면서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이처럼 <상애상친>은 여성의 눈을 통해 세대 간 쉽게 화합하지 못하는 중국, 더 나아가 동아시아의 현실을 다루고자 한다. 국내 개봉은 미정.

[넷] <미세스 팡> 죽음을 앞둔 여인을 통해 바라본 삶과 죽음
 
 영화 <미세스 팡> 스틸 컷

영화 <미세스 팡> 스틸 컷 ⓒ 부산국제영화제


중국을 넘어 아시아 독립 다큐멘터리를 대표하는 거장 왕빙의 신작. 알츠하이머를 앓다가 죽음에 다다른 '팡 부인'의 마지막 며칠을 담아낸다. 영화는 왕빙 특유의 덤덤하면서도 사실적인 영상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묻고 있다.

자식들은 경제 사정상 의사를 부르거나 어머니를 병원에 데려갈 형편은 못 된다. 다니던 일터까지 그만둘 정도로 효성스러운 자식들이 팡 부인의 곁을 지키고 있지만 사실 죽음을 앞둔 팡 부인을 살리기 위해 자식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고통스럽게 간신히 삶을 이어가는 팡 부인을 하염없이 지켜만 볼 뿐. 언제나 그랬듯이 적극적 개입이 아닌 멀리서 보여주기 방식을 통해 중국 가난한 민중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하는 왕빙의 카메라는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국내 개봉 미정.

[다섯] <얼굴들> 각자의 시간을 살아가는 헤어진 연인들의 이야기  
 
 영화 <얼굴들> 스틸 컷.

영화 <얼굴들> 스틸 컷. ⓒ 부산국제영화제

 
영화 <파산의 기술>(2006), <보라>(2010) 등 다큐멘터리로 주목받은 이강현 감독의 첫 장편 영화 <얼굴들>(2017)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이 영화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헤어진 이후 각자 일상을 살아가는 연인들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얼굴들>은 인물들 간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으면서도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명확하지 않은 군상들을 보여준다. 영화는 기존 극 영화처럼 기승전결 내러티브에 의존한 해석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영화다. 이강현 감독은 "누군가의 얼굴을 바라봤던 순간들을 기억한다. 기쁨으로 환하게 웃음 짓는 얼굴, 화가 나 일그러진 얼굴, 맥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얼굴, 또는 그 표정에 아무 것도 없다고 확신하게 되는 얼굴 그 자체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 말처럼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 헤어진 후에도 각자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 번 봤을 때는 쉽게 이해할 수 없지만 장면 하나하나를 곱씹어 볼수록 진한 여운을 남기는 영화다. 올해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가상 수상작 이자, 다가오는 43회 서울독립영화제 경쟁 상영작으로 초청되었다.

[여섯] <밤치기> 섹슈얼리티 전복과 멜랑콜리아 사이. 정가영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영화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감독상 및 올해의 배우상(박종환)을 수상한 정가영 감독의 <밤치기> 한 장면

ⓒ (주)우성엔터테인먼트



영화 <밤치기>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상영작 중 가장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킨 화제작이다. 이미 <비치 온더 비치>(2016)로 수많은 팬을 보유한 정가영 감독은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와 연출력으로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비치 온더 비치>에서도 그랬듯 정가영 감독은 이번에도 극중 캐릭터 정가영을 직접 연기했다. 극중 정가영은 남자들에게 심하게 들이대고 짓궂게 느껴질 정도로 수위 높은 성적 경험을 묻는다.

이렇게 대놓고 남자들에게 야한 농담을 건네는 정가영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비치 온더 비치>처럼 정가영 감독의 영화는 끝까지 봐야 비로소 진가를 알게 된다. 다소 변태적인(?) 여성 캐릭터 외연을 두르고 있지만 남자들에게 들이대는 가영의 기저에는 짙은 외로움과 불안함이 공존해 있다. 이러한 다양한 감정을 풀어내는 방식은 가장 독립적인 영화 제작 방식으로 영화와 삶, 여성을 그려내는 정가영만의 독특한 시선이다. 앞으로도 정가영만의 특별한 영화를 만들어낼 그녀의 도전을 격하게 응원한다.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비전 감독상 및 올해의 배우상(박종환) 수상작. 국내 개봉 예정.

[일곱] <이산자> 재일 조선인들을 향한 국가 이데올로기 폭력을 묻다  
 
 영화 <이산자> 스틸 컷.

영화 <이산자> 스틸 컷. ⓒ 부산국제영화제

 
영화 <이산자>는 지난 9월 DMZ국제다큐영화제에 이어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와이드 앵글 초청작으로 상영되었다. 카메라는 재일 조선인 1.5세로 살아가는 세 인물을 따라가며 한국과 일본 사이 경계인으로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추적한다. <이산자>(2017)는 단순히 재일 조선인의 정체성 찾기로만 끝나지 않는다. 이 영화가 이들을 통해 묻고자 하는 것은 한국과 일본, 더 나아가 북한 그 어느 곳에서도 쉽게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들에게 은밀히 가하는 국가와 이데올로기 폭력이다.

국가 이데올로기는 그 무엇도 책임지지 않고 오히려 갈등과 반목을 야기할 뿐이다. 영화는 국가, 민족이라는 틈입할 수 없는 성역에 대해 질문하고자 한다. 재일 조선인들은 일제강점기와 침략전쟁의 역사, 해방과 한국전쟁 그리고 분단, 차별이라는 상황의 피해자로서 오늘을 계속 살아가고 있다. 민족, 국민국가의 이름으로 또 다른 폭력을 자행하거나 혹은 묵인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는 영화다. 국내 개봉 미정.

[여덟] <하동채복: 두 사람의 노래> 노동운동 뛰어든 부부가 바라본 촛불  
 
 영화 <하동채복: 두 사람의 노래> 스틸 컷.

영화 <하동채복: 두 사람의 노래> 스틸 컷. ⓒ 부산국제영화제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섹션 초청작인 남승석 감독의 <하동채복: 두 사람의 노래>(아래 <하동채복>)는 1980년대 중반 노동운동을 했던 부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부분 하동과 채복의 인터뷰와 편지 낭독으로 이뤄진 영화는 자연스레 두 사람의 구술사 위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하동과 채복은 좋은 학교를 나와 중산층 이상의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는 노동자들이 자본에 착취 당하지 않고 기본적인 노동권을 보장받으며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하동과 채복은 사회 운동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들의 바람과 달리 세상은 한 번도 노동 친화적 성장을 이루지 못했다. 시간이 갈수록 절망만 늘어가는 현실에 참다못한 시민들은 결국 촛불을 들었다. <하동채복>은 하동과 채복 두 사람의 이야기와 더불어 지난해 연말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촛불 집회 현장을 교차 편집 형식으로 보여준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노부부가 된 하동과 채복은 그들의 젊은 날에 그랬던 것처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거리로 나선 수많은 사람과 마주하게 된다. 그들보다 앞서 거리에서 목놓아 노동자 해방을 외쳤던 하동과 채복은 설령 우리가 원하던 세상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한들, 그래도 앞으로는 더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으로 현재를 산다. 귀농하여 평온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부부의 일상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부부를 둘러싼 굴곡진 노동사, 현대사가 (광화문) 광장이 다시 쓴 오늘날의 역사와 고스란히 이어지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개봉 미정.

[아홉] <말해의 사계절> 밀양 송전탑으로 바라본 개인의 역사
 
 영화 <말해의 사계절> 스틸 컷.

영화 <말해의 사계절> 스틸 컷. ⓒ 부산국제영화제

  
허철녕 감독의 <말해의 사계절>(2017) 주인공 김말해 할머니는 765kV의 송전탑이 세워진 경남 밀양시 상동면 도곡마을의 유일한 합의 거부자다. 동시에 그녀는 일제 강점기, 6.25 전쟁, 보도연맹 학살, 베트남 참전 등 대한민국의 굵직한 근현대사를 직접 체험한 인물이다.

영화는 한국 역사의 비극과 고스란히 이어지는 많은 아픔을 가진 김말해 할머니의 굴곡진 인생을 바탕으로 현대사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말해의 사계절>은 김말해 할머니를 통한 여성, 약자의 시선으로 국가 폭력의 실체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영화는 구술사에 충실한 다큐이자 동시에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형인 밀양 송전탑의 정당성에 관한 물음까지 이끌어낸다. 제43회 서울독립영화제 경쟁 부문 상영작으로 선정되었다.

[열] <소성리> 사드 배치로 무너진 평화로운 시골의 일상
 

ⓒ 오지필름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비프 메세나' 상 수상작. <밀양전>(2013), <밀양아리랑>(2014) 등 제작을 통해 밀양 송전탑 건설 부당성을 알리고자 했던 박배일 감독이 이번에는 사드 배치 반대 투쟁이 한창인 경상북도 성주 소성리를 찾았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경찰이 찾아오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하던 소성리는 사드 배치지가 된 이후 한 순간도 조용할 날이 없는 균열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소성리>는 여느 시골 마을과 다를 바 없이 농사를 지으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주민들의 일상과 사드 배치 반대 투쟁 현장을 연이어 보여주며 주민들의 일상을 파괴하는 사드 배치의 부당성을 알린다. 동시에 영화는 소성리 주민들이 겪었던 6.25 당시 학살 관련 육성 증언들을 비중있게 들려주며 연이어 반복되는 국가 폭력의 비극,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제43회 서울독립영화제 경쟁 부문 상영작 및 공동체 상영을 통해 만날 수 있다.

한편 <소성리>로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경쟁 대상 '비프 메세나' 상을 수상한 박배일 감독은 폐막식 당일 수상소감을 통해 서병수 시장에 대한 강도높은 사과를 요구하며 영화인들의 큰 호응을 얻어낸 바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소성리 세 번째 살인 밤치기 상애상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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