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 밭 고추는 왜_광자 문경희

옥상 밭 고추는 왜_광자 문경희 ⓒ 서울시극단


"그깟 고추 때문에 이럴 수 있습니까. 그깟 고추 때문에."

한낱 고추가 불씨가 돼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불바다로 만든다. 마트나 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고추가 없다고 밥 한 끼니 못 챙기는 것도 아니다. 그만큼 흔한 채소다. 모(某)빌라 옥상 위 고추 역시, 누구나 쉽게 딸 수 있는, 어찌 보면 흔해빠진 채소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고추는 광자가 이웃 주민들을 위해 농약을 치지 않고, 맨 손으로 진딧물을 잡아가며 정성을 들여 키운 결과물이다. 광자(문경희 분)에게 고추는 무엇과도 치환할 수 없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였다. 가치를 환산할 수 없는 것이다.

연극 <옥상 밭 고추는 왜>는 고개만 돌리면 마주할 수 있는 우리네 삶을 고스란히 담았다. 표현은 상징적이면서도 적나라하고, 미묘한 감정은 공감으로 우러난다.

 옥상 밭 고추는 왜_빌라 모습

옥상 밭 고추는 왜_빌라 모습 ⓒ 서울시극단


막이 오르자마자 먹먹한 감정이 몰려온다. 사방이 벽인 사각형 틀, 각자의 공간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의식적으로 먹는 식사, 과정 같은 출근. 서로의 삶 안에서 감정 없이 짓는 억지 미소, 그럼에도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는 하루. 

광자가 정성들여 키운 고추를, 현자(고수희 분)는 몇 십 개도 아무렇지 않게 따다가 동네 할머니에게 인심 쓰듯 건넨다. 김포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으스대면서. 그런 고추를 받지 못한 할머니는 입을 삐죽거리고, 현자는 할머니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또 고추를 딴다. 그러다 광자에게 들킨 현자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하는 심한 욕설을 퍼붓고, 인신공격까지 한다. 결국, 광자는 쓰러지고 만다.

이를 알게 된 현태(이창훈 분). 무명 배우인 현태는 믿고 따르던 선배의 포르노 출연 제안에 아쉬움을 나타내고, 출연하기로 한 작품 쪽에서 약속을 어기자 분통이 터진다. 잔뜩 뿔이 난 상태다. 그의 분노는 현자를 향한다. 그는 "사과를 하라"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잘못도 실수도 할 수 있지 사과는 할 줄 알아야하는 것 아닌가"라며 병원에 누워있는 광자를 찾아가 사과를 하라고 핏줄을 세운다. 

급기야, 시간강사 아내와 이혼을 앞둔, 무기력한 중년 동교가 나서고, 빌라 앞에서는 고추 탈을 쓴 이들의 '사과 요구'가 펼쳐진다.

이른 본 현자의 반응은 "그깟 고추가 왜?" "내가 뭘 잘못했다고"라는 항변이다. 그는 남편과의 식사자리에서 "이 나라를 만든 게 누군데" "누구 덕에 IMF를 견뎠는데"라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잘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 산 인생인데, 빌라 신축논의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 그에게 광자는 그저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옥상 밭 고추는 왜

옥상 밭 고추는 왜 ⓒ 서울시극단


 옥상 밭 고추는 왜_현자 고수희

옥상 밭 고추는 왜_현자 고수희 ⓒ 서울시극단


고추 탈을 쓴 현태의 모습을 본 어머니의 반응 역시 싸늘하다. 등짝을 후려치며 "네가 한가하구나"라고 혀를 친다. 바삐 사는 것도 모자란 하루에 일자리 없이 무명배우로 하는 아들의 모습에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아라", "부끄럽다"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현태는 분노를 삭이지 못한다. 결국 현자의 사과를 받기 위해 도를 넘는 행위를 범하게 된다. 현자와 모습만 다를 뿐 또 다른 '괴물'이 된 것처럼. 현태는 그럼에도 소리친다 "그건 욕이 아니라 일종의 살인이다. 사람의 뿌리를 흔들면 사는 재미가 더러워지는 것 아닌가. 마음이 찢어진 거다", "개나 고양이나 다른 게 뭔지 모르겠다"라고.

이런 분노는 광자의 죽음으로 더욱 뜨거워진다. 현자의 진심어린 사과는 못 받더라도, 광자의 마음이 어땠을지, 그 감정에 대한 복수로 이어진다. 결국 누굴 향한, 누구를 위한 분노였는지 답을 찾지 못한채, '고추'로 일파만파 커진 사태는 막을 내린다. 

<옥상 밭 고추는 왜>에는 분노가 담겼다. 하지만 극을 들여다보면 악인(惡人)은 단 한 명도 없다. 그 마다 사연이 있고, 열심히 견딘 삶의 흔적이 역력하다. 때문에 단순하게 보면 자신의 일이 풀리는 않는 현태가 세상에 불만을 토해내는 것 같다. 하지만 그 감정은 세상이 아니라 누군가의 소중한 무언가를 무너뜨리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을 묵살시킨 이들에 대한 분노다.

아무렇지 않게, 한 사람의 사연이나 감정 따위는 배제한 채, 너무 쉽게 말하는 사람들. 누군가에게는 전부일 수 있는 소중한 존재를 너무나 가볍게 폄훼하는 사람들. 서로의 이야기는 듣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만 높이는 사람들. 단지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는 사상까지. 달리 살인인가. 한 사람의 '그 무언가'는 그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또 죽음에 몰아넣을 수 있을 정도의 가치, 의미를 지닌 존재다. 아무리 고추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옥상 밭 고추는 왜> 포스터

<옥상 밭 고추는 왜> 포스터 ⓒ 서울시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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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전문 프리랜서 기자입니다. 연극, 뮤지컬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 전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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