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대장 김창수>.

영화 <대장 김창수>.ⓒ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백범 김구를 소재로 한 영화 <대장 김창수>는 청년 김구(조진웅 분)가 일본인을 죽인 일로 인천감옥에 수감됐다가 탈옥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일본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 5개월 뒤인 1896년 3월, 김구는 국모의 복수를 한다며 낯선 일본인을 죽였다. <대장 김창수>는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 발생했다. 음력으로는 8월 20일이다.

김구는 일생을 살면서 세 번 개명했다. 원래 이름은 창암(昌巖)이다. 과거시험에 낙방하고 동학에 입교한 직후인 열여덟 살 때 창수(昌洙)로 개명했다. 바위 암(巖)이 물가 수(洙)로 바뀐 것이다.

김창수로 개명한 뒤 동학전쟁에 가담했다가 실패했다. 그런 다음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듬해인 스물한 살 때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를 죽였다. 이 때문에 투옥됐다가 탈옥한 지 2년 뒤인 스물다섯 살 때 거북이 구(龜)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그리고 대한제국 멸망 뒤에 민족주의 활동으로 수감돼 있을 때 아홉 구(九)로 개명했다. 이때는 1912년, 37세 때였다. 거북이 '구'에서 아홉 '구'로 개명한 것은, 일본 호적에 등록된 기존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씀으로써 일본 식민통치를 부정하겠다는 뜻이었다. "龜를 九로 고친 것은 왜의 호적에서 벗어난다는 뜻이었다"고 회고록 <백범일지>에서 말했다.

이 외에도 일시적으로 사용한 이름은 더 있다. 이름을 자주 바꿔야 할 정도로 젊은 시절이 순탄치 않았던 것이다. <대장 김창수>는 두 번째 이름을 쓰기 시작한 직후를 소재로 하고 있다.

이름을 여러번 바꾼 '젊은 김구'
   
<대장 김창수>의 첫 장면은 일본인과의 격투다. 일본인이 싸움 끝에 목숨을 잃고 김구가 사건 현장에 대자보를 걸어놓고 자리를 뜨는 장면이다. 대자보에는 일본인을 죽인 동기와 더불어 성명과 주소가 적혀 있다.

영화 첫 장면의 사건이 벌어진 시점은 스물한 살 때였다. 사건 발생 장소는 지금의 황해남도 북부인 안악군의 치하포라는 포구 근처였다. 황해남도는 황해북도의 남쪽이 아니라 서쪽에 있다. 그리고 김구의 고향인 해주군은 황해남도의 남부에 있다.

황해도 해주군의 빈곤한 농가에서 출생한 김구는 가난을 탈피할 목적으로 과거시험을 준비했지만 낙방했다. 한동안 실의에 빠졌던 그는 관상학 공부를 계기로 마음을 추스른 뒤 동학에 입교해서 동학전쟁에까지 참가했다. 하지만, 일본군과 조선 정부군과 지주 민병대의 연합 공격으로 동학군은 무너지고 말았다.

황해도에서 동학군 진압에 가담했던 인물이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인 안태훈이다. 동학군 부대와 민병대를 각각 통솔했던 김구와 안태훈은 한때 충돌할 뻔도 했지만, 전쟁을 계기로 도리어 친해졌다. 전쟁 후에 김구는 안태훈의 소개로 고능선이란 스승을 알게 됐다.

영화에서는 김구가 감옥에서 고 진사(정진영 분)를 만났다고 함으로써 김구와 고능선의 만남이 거기서 이뤄진 것 같은 인상을 풍겼다. 하지만, 이들의 만남은 실제로는 안태훈의 소개로 이루어졌다. 그 뒤 김구는 고능선의 가르침을 받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던 중에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발생했고, 거기에 격분해 있던 차에 우연히 스치다 조스케를 만나게 된 것이다.

스치다 조스케 살해사건의 전말

 김구. 서울시 종로구 평동의 경교장에서 찍은 사진.

김구. 서울시 종로구 평동의 경교장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김구와 스치다의 '스침'은 안악군의 여관방에서 이루어졌다. 여관에는 방이 세 개 있었다. 투숙객은 40명 이상이었다. 스치다 조스케도 그중 하나였다.

아침 식사시간이 되자, 방마다 밥상 여러 개가 들어왔다. 이때 식사를 하던 중에, 손님 하나가 김구의 눈에 들어왔다. 머리를 깎은 사람이었다. 상투 머리가 아니라 단발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흰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김구는 '그'가 다른 손님과 대화하는 것을 유심히 들었다. 그는 다른 손님에게 자신을 정씨라고 소개했다. 고향은 장련군이라고 했다. 장련군은 안악군의 서쪽 해안가에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정씨로 소개했지만, 김구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장련군 말투가 아닌 한양 말투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김구가 그를 의심하게 된 시초는 바로 이것이다. 그가 단발머리로 한양 말씨를 쓰면서 출신지를 숨겼기 때문이다. 김구는 그가 일본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이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촌노인들은 (스치다를) 진짜 조선 사람으로 알고 이야기를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분명히 왜놈이었다."

여기까지는 김구의 판단이 확실했다. 그는 틀림없는 일본인이었다. 이 판단을 근거로 김구는 연쇄적인 생각의 나래를 펼쳤다. 그 결과로 도출된 게 '저 자는 국모를 시해한 범인일지 모른다'였다. 위 인용문의 바로 다음 대목은 이렇다.

"자세히 살펴보니, 흰 두루마기 밑으로 칼집이 보였다."

일본인일 거라고 생각한 다음에 행색을 살펴보니, 옷 속에 칼을 숨긴 게 보였다. 당시 조선에 온 일본인의 상당수는 상인이거나 기술자였다. 하지만, 몸에 칼을 숨기고 다니니, 상인이나 기술자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상인도 신변보호를 위해 칼을 휴대하는 일이 많았지만, 김구는 그 점을 배제했다.

동학군 진압을 주도한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 이런 성급한 판단을 유도했을 수도 있다. 동학군 참전자였으므로 그런 증오심에 사로잡히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김구는 이렇게 중간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 저놈은 보통의 상인이나 기술자 왜놈은 아니다."

민간인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자 '일본 군인일 거다'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것도, 보통 군인도 아니고 국모를 시해한 일본군 장교일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민 황후를 살해한 미우라가 서울에서 난리가 일어나자 당분간 몰래 숨어 도망하는 것은 아닐까? 설사 이놈이 미우라는 아니더라도 미우라의 공범일 수도 있다."

김구는 상대방이 미우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미우라 고로는 을미사변을 총지휘한 군인 출신의 주한일본공사다. 을미사변을 총지휘한 군인 출신이 자신과 같은 여관방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김구는 미우라가 세상의 이목을 피해 도망 다니는 중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 직후, '혹시 아닐 수도 있지 않나?'라는 느낌이 잠깐 들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어찌 됐건 칼을 숨기고 은밀하게 다니는 왜놈이라면, 우리나라와 민족에 독버섯일 것은 명백하다. 저놈 한 명을 죽여서라도 나라의 치욕을 앙갚음하리라."

명성황후를 시해한 범인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무기를 휴대한 일본인은 조선인들한테 해를 끼칠 게 명백하다. 이런 판단이 들자, 상대방을 죽이자는 결심에 도달하게 되었다.

김구는 곧바로 행동에 착수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그'를 발로 차서 넘어뜨리고 격투를 벌이다가 칼을 빼앗아 상대방의 숨을 끊었다. 그런 다음, 영화에서처럼 행동 동기 및 성명과 주소를 적어놓고 현장을 유유히 떠났다.

3개월 뒤에 체포된 김구는 상대방이 국모를 시해한 일본 군인이라서 살해했다는 주장을 폈다. 반면에 일본측에서는 피살자가 스치다 조스케란 사람이며 직업은 상인이라고 항변했다. 김구의 주장대로 일본인인 것은 맞지만, 명성황후 시해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항변했다.

 영화 <대장 김창수>에서 김구 역을 맡은 배우 조진웅

영화 <대장 김창수>에서 김구 역을 맡은 배우 조진웅ⓒ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오늘날 많은 책에서 스치다 조스케를 일본군 장교로 소개한다. 명성황후 시해범으로 명시한 책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백범일지>에 나온 김구의 주장 중 일부에 근거했을 뿐이다. 김구는 분명히 상대방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군인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범인이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을 조사한 조선 관청인 인천 감리서의 보고서에도 스치다 조스케는 상인으로 나온다. 감리서는 인천 같은 개항장의 사무를 처리하는 관청이었다. 1896년 9월 22일자 <독립신문>에 따르면, 같은 해 9월 16일 인천감리서 이재정 감리가 법부에 보낸 보고서에 "해주 김창수가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 장사 토전양량(土田壤亮, 스치다 조스케)을 때려 죽여"라는 표현이 나온다. 스치다 조스케를 장사 즉 상인으로 봤던 것이다. 법부는 종래의 형조를 계승한 법무아문을 개칭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조선 백성들은 김구를 응원했다. 상대방이 일본군이건 아니건, 명성황후를 시해했건 아니건 간에, 젊은 청년이 국모의 복수를 위해 용감한 일을 했다는 점을 중시했다. 그래서 김구 구명운동이 벌어지고, 이것이 고종 임금의 판단에 영향을 주었다. 승지로부터 전후 사정을 전해들은 고종이 김구의 사형집행을 연기해준 것은, 김구가 탈옥할 시간을 버는 데 도움을 주었다.

<백범일지>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김구 본인도 자기가 죽인 상대방이 명성황후 시해와 무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도 사람을 죽인 것은 분명히 과오다. 하지만, 동학전쟁 진압과 명성황후 시해 때문에 일본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김구의 행동에는 그 같은 대중의 분노가 분명히 반영되어 있었다.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저서: 역사 추리 조선사, 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 못하나,발해고(4권본,역서),패권 쟁탈의 한국사,신라 왕실의 비밀,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상고사(역서),조선 노비들,왕의 여자,철의 제국 가야,최숙빈,한국사 인물통찰,동아시아 패권전쟁 등. www.kimjongsung.c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