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카니 <원스>의 두 배우와 존 카니(가운데) 감독.

▲ 존 카니 <원스>의 두 배우와 존 카니(가운데) 감독. ⓒ 판시네마


존 카니

2007년, 혜성처럼 등장한 아일랜드 출신의 감독이 있다. 감독이 일억을 조금 넘는 비용을 들여 만든 그 영화는, 곧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존 카니 감독에게 음악은 영화 소재이상의 의미가 있다. 한 아이의 모습을 담은 <싱스트리트>(2016)가 그의 자전적인 성격을 담고 있는 걸 생각해보면 그렇다.

그래서 <원스>(2007)의 삽입곡 'Falling Slowly'가 유명해진 건, 단지 노래가 좋기 때문만은아니다. 관객들은 존 카니 감독이 극장에 처음으로 내건 <원스>(2007)를 볼 때부터 그가 음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후로 존 카니 감독이 추가로 만든 두 편의 영화들, <비긴어게인>(2013)과 <싱 스트리트>(2016)에서도 감독은 어김없이 그의 애정을 드러낸다.

원스의 흥행으로 할리우드에 입성한 그가 대중성을 얻어야만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신기하게도, 그 변화가 작품적으로 퇴행했다는 아쉬움을 남길지언정 음악에 대한 애정이 변하지는 않는다.

존 카니 감독의 영화를 보면, 감독 자신처럼 음악이 등장인물 삶의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최근 개봉한 에드가 라이트 감독의 <베이비 드라이버>(2017)와는사뭇 다른 방식이다. 에드가 라이트 감독이 <베이비 드라이버>에서 음악을 즐기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존카니 감독의 영화에서 음악이란 삶 그 자체다.

그건 영화 <원스>에서도, <비긴 어게인>에서도, <싱 스트리트>에서도 그랬다. 그들은 모두 거리로 나와 삶을 노래하고 고난을 춤춘다. 그리고 그 리듬은 요동치는 역경을 이겨내는 힘이 된다. 거리의 힘든 청춘, 중년의 퇴물 프로듀서, 빈곤한 가정의 아이들, 그들이 노래를 부르는 순간 과거로부터 멀어진다.

음악이 흐르고, 노래를 기록하는 매체도 흘러간다. 레코드 판이든, 카세트테이프든 간에 노래가 기록될수록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그 시간에 고통과 기쁨을 모두 흘려보낸다. 그 순간, 그들이치는 기타는 통 안에서 울려 밖으로 슬픔을 쏟아낸다. 그 울림은 관객에게 온전히 전달된다.

울림은 관객을 울린다. 그때마다 달리는 말을 재촉하는 것처럼 기타의 엉덩이를 치는 모습은, 어딘가로달려 가고픈 욕망처럼 보이기도 한다. 혹은 고통을 잊기 위한 진통제의 모습도, 흥에 겨워 초크를 겨누는 것도 될 수 있다. 영화속의 그들의 삶은 분명 고통스럽지만, 음악만큼은 그 무엇도 될 수 있다.

Once라는 이름에는 '한 때'이라는 뜻이 있고, Begin Again은 '다시 한 번'이라는 뜻이 있다. 그리고 세 영화는 모두 Sing street, '거리'에서 '노래'한다. 조금 억지스러울지도 모르지만, 영화는 이렇게 이어진다. 한 때는 그랬었지만, 다시 한 번 일어나 거리에서 노래한다.

물론 Singstreet는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 실제로 있는 거리다. 아마 존 카니 감독의 소소한 농담 같은 것일 테니 이 부분은 농담으로 넘겨도 된다. 그러나 세 영화에서 거리에서 노래하는 장면이 공통적으로 나오는 걸 보면, 진지한 농담 축에 속하는 것 같다.

원스

원스 <원스> 포스터

▲ 원스 <원스> 포스터 ⓒ 판시네마


영화는 누군가의 시선으로 시작한다. 영화 내내 멀리서 주인공을 훔쳐보는 듯한 이 시선은, 거리에 있는 어떤 관찰자의 것만은 아니다. 영화의 제목으로 미루어 볼 때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적인시선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단언컨대 그것이 성찰의 의미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를 되돌아본다는 건 한 가지 목적만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원스, 한 때라는 건 기억 속의 어떠한 시점을 뜻한다. 우리는 좋았던 '한 때'를 떠올리기도 하고, 뼈아픈 과거를 떠올리기도 한다. 단지 후회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관찰하기도 한다. 요즘으로치자면 VR 같은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360도로 주변을 촬영된 그 영상이 가지는 의의는, 말 그대로 '한 때'를 우리의 눈앞에 데려다 놓는 것에서 온다.

그래서 핸드헬드 방식으로 촬영된 원스의카메라는 우리의 시선이자 그의 시선이 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시선이 되어 그들의뒤를 따라간다.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은 VR 영상을보는 것처럼 개인화된다. 동시에 그들의 삶을 관음하면서도 몰입하지는 않게 한다. 우리는 그 스크린이 그들의 기억을 염탐하게 하는 장치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작품 속 인물의 '한 때'는 그들이 눈을 감고 생각하는 것이다. 영화의 전체적인 톤이 뿌연 것은 그만큼 기억이 희미하기 때문이다. 작품 속의 두 남녀가 '그'와 '그녀'로 지칭되는 것도 그렇다. 우리는 그들의 발자취를 좇아가지만, 그들의 이름조차 알 수 없다. 위에서 말했듯, 기억이란 잘게 썰어낼 수록 점점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이 VR이나 영화관처럼 현실 위에 덧씌워진 꿈(기억)이다. 그래서 우리는 위에서 언급했듯, 그들의 삶을 관음하면서도 몰입하지는 않는다. 영화를보며 개인적인 기억을 떠올릴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말이다. 아마, 이러한 부분이 모순적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몰입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꿈을 꾸는 것이 몰입될지언정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 될 수는 없다.

그렇게 해서 영화의 촬영기법부터 네러티브까지모두 꿈을 겨냥한다. 여타 영화에서 매번 보이는 갈등구조가 이 영화에는 없다. 돈 없는 비루한 거리의 악사가 앨범을 내는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그들의 사랑은 앞날이 밝아 보인다. 그러나 이영화가 우리의 꿈과 달라지는 건 아마, 사랑의 실패이기 때문일 듯하다.

그들의 사랑은 정말 아름답게 남는다. 다른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키스 장면이나 달콤한 말 한마디 없다. 그들은음악으로 마음을 주고받는다. 마치 텔레파시라도 통하는 것처럼 잘 맞는다. 그러나 결국 둘은 제 갈 길을 가게 된다. 그럼에도영화는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결국 꿈을 이루었으니 사랑은 어떻게 되든 중요치 않기도 한데, 그 아쉬움이 '그의 삶 전반을 차지하는 음악'으로담겨 나오는 것이 존 카니의 영화다.

비긴 어게인

비긴어게인 포스터

▲ 비긴어게인 포스터 ⓒ 판씨네마(주)


비긴 어게인으로 존 카니 감독은 할리우드에 입성했다. 할리우드로 갔다고 해서 감독이 변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작품이 변할 수는 있다.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다는 건 그만큼 감독 개인의 취향을 포기해야 하기때문이다. 물론 세간의 주목을 받던 존 카니 감독이 돈에 굴복했다고 말하는 이들의 비판이 무색하게, 비긴 어게인은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보기 좋게 흥행했다.

음악은 지친 영혼의 안식처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도피처가 되기도 한다. 현실의 소음을 리듬에묻으면, 베개에 얼굴을 처박은 것처럼 나만의 세상에 빠지곤 한다. 존 카니 감독의 세계에서 그 역할은 전자다. 그러나비긴 어게인의 흥행 요인을 꼽으라면 아마 그 내러티브가 후자로 변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영화에도 거리는 여전히 중요한요소로 나온다. 거리를 떠도는 무명 가수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 분)'와 거리를 떠도는 퇴물 프로듀서 '댄 멀리건(마크 러팔로)'는그들이 떠돌던 거리에서 우연히 서로 만나게 된다. 그 만남은 뉴욕의 어느 바에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버려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버려졌다는 말이 과하게 들릴 수는 있지만, 그건누군가로부터 버려졌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남들에게 버려지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걸 내려놓지 않았다. 그로인해 그들의 꿈은 지켜지지만, 역설적으로 감정은 버려지고 만다.

꿈을 지키며 온몸으로 풍파를 맞으면 그 누구라도 몸이 상할 수밖에 없다. 그과정에서 그들의 좇던 꿈은 안식처에서 도피처가 되고 만다. 언젠가 꾸었던 꿈을 쉽사리 내려놓지못하고 계속 살아가다 보면 자연스레 그럴 수밖에 없다. 세상은 소음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무명 가수 그레타는 시작해야 한다. 그녀가 성공하기 위해선 어떤 노래든 시장에 발을 내딛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퇴물 프로듀서 댄 멀리건은 다시 일어나야 한다. 그가재기하기 위해선 자신의 이상향에 맞는 가수를 찾아 시장에 내보내야 한다. 둘의 만남은 그렇게시작한다.

그리고 작품이 진행되면 그들은 서로가가진 꿈을 교환하게 된다. 그레타는 바람으로 헤어졌던 남자친구와 다시 만날지 고민하고, 댄은 딸과의 관계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고민한다. 그들에게가장 소중했던, 소홀했던 관계를 잇기 위한 노력이 계속된다.

댄은 딸과의 관계를 시작하고, 이혼한 아내와 다시 만나게 된다. 그레타는 고향집으로 다시 돌아가고, 가수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 중, 어느 한 사람의 행동만으로 결말에이르지는 않는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곳은 그들 마음의 안식처다. 각각 고향의 집과, 이혼한 가정의 집이다. 그들이 돌아가야 할 곳은 결국 따스한 집이다. 그들은그들이 가지고 있던 꿈을 내려놓지 않아 집과 결별했지만, 이제 성공하여 집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영화의 결말이 어떻든 간에 그들의 삶은 행복하게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고집하던 꿈을 멋지게 성공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피처에서 안식처로 돌아간다. 영화에서 그들의 안식처는 꿈이 시작하던 과거 그리고 꿈이 도착했던 미래인데, 이 그 과정에서 그들은 여태까지 자신을 안식하게 했던 이들을 떠나 보낸다. 댄은 과거 성공을 함께했던 친구 '사울(모스 데프 분)'와 헤어지고, 그레타는이미 성공해서 떠나버린 전 남자친구 '데이브(애덤리바인 분)'을 완벽하게 떠나 보낸다.

아마 작품이 대중에게 어필한 부분이이것이라 생각한다. 안식처에서 도피처로, 도피처에서안식처로 가는 일련의 과정이 음악과 함께 관객의 마음에 깊게 개입했을 것이다. 그 과정이 관객에게희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싱 스트리트

싱스트리트 포스터

▲ 싱스트리트 포스터 ⓒ (주)이수C&E


싱 스트리트는 존 카니 감독의 자전영화다. 그의 고향인 아일랜드와 그가 살았던 더블린을 배경으로 한다. 위에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존 카니의 모든 영화가 자전적이다. 원스는그가 거리에서 떠돌던 더블린을, 비긴 어게인은 그의 형 '짐카니'를 모델로 한 댄을 보여준다. 그리고 싱 스트리트는 그의 청년기에서 유년기로 회귀하며같은 공간, 더블린을 보여준다.

존 카니의 모든 영화가 그렇듯, 이번 영화도 거리에서 노래한다. 존 카니 감독이살았던 곳에 대한 헌사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떠도는 모든 거리의 음악가에게 바치는 것이기도하다. 우리나라에서도 홍익대 앞 거리에서 꿈을 노래하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원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도 그 음악가중의 하나였다.

그렇게 본다면 비긴 어게인으로 상업계에들어선 존 카니가 다시금 작가로서의 영화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더블린에서 노래하던 원스의두 인물을 보면,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자연스레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삶은 이제 가난하고 병든 1980년대의아일랜드로 향한다. 존 카니가 작가로 인정받는 건 그러한 진정성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진정성은 음악을 주제로 한 영화중 그 어떠한 것에서도 찾아볼 수 없던 무언가다. 최근 개봉한 <베이비 드라이버>를 예로 들면, 영화의 주인공 '마일스'가 듣는 노래는 일종의편집점일 뿐이다. 에드가 라이트 감독이 말했듯이 베이비 드라이버는 각본 단계에서부터 음악을염두에 두고 편집과 동선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싱 스트리트에서 노래는 인물을대변하는 무언가다. 말하자면, 영화의 후시처리 부분인 편집과 동선보다 더욱 우선한다. 캐릭터에 기반을 둔 음악은 그 캐릭터를 온전히대변하는 무언가가 된다. 베이비 드라이버가 아무리 음악을 흥겹게 잘 사용해도, 결국 싱 스트리트의 깊이에 미치지는 못한다.

일단 싱 스트리트에서 주인공의 주변인물들은 모두 그 시기 유행하던 가수들을 대변한다. 'DuranDuran'으로 대표되는 여러 가수의 모습은 그들의 우상이자, 되어야 할 무언가다. 아이들은 그들이 되기 위해 가수들의 뮤직비디오를 모방해 비슷한 구도, 비슷한 느낌의 음악을 만들어 헌사한다.

그 당시 아일랜드는 경제 상황이 영좋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민감한 사춘기 아이들이 엇나가는 게 무리는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코너(페리다윌시 필로 분)'의 형 '브랜든(잭 레이너 분)'은 성인임에도 코너보다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 부모의 갈등으로 이혼하게 되자 방안에 있는 모든 걸 때려 부수며 상황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브랜든은 자신이 음악을 그렇게 좋아했음에도집안의 현실에 부닥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한다. 그의 '노도'는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아일랜드 경제의 수렁과도 같다. 이러한브랜든의 모습은 코너의 억눌린 내면 자아를 보여준다. 만약 작품 속에서처럼 음악 밴드를 하지않았다면 코너도 형처럼 변해갔을 것이다. 그러나 코너는 사춘기의 민감한 감정을 밴드의 거친음악으로 이겨낸다.

그 밴드의 목적은 코너의 사랑을 위한것이다. '질풍'과 같은 반항심이 사랑이라는 배를 향해 부는 바닷바람이 된다. 코너가 첫눈에 반하는 '라피나(루시 보인튼 분)'의 존재는, 존카니가 첫 눈에 반한 음악의 존재와 같다. 그가 힘들었던 어린 시절, 음악을 처음으로 접하고 이끌리게 된 계기가 그것처럼 보인다. 음악을 사랑하기 위해 그 시절 음악들의 형상을 한 친구들을 모아 밴드를 구성하는 존 카니다.

그래서인지, 싱 스트리트를 보며 "이렇게 개인적이어도 될까"하는생각이 들었다. 존 카니 감독의 다른 영화와는 달리, 영화전체가 그의 음악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작용하는 코너의 모습과 반작용으로 밀려나는코너의 형, 코너가 좋아하는 라피나와 그녀를 위한 밴드. 이것들을 한군데 모아놓고 보면 존 카니의 음악 세계를 알 수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김선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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