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리 수리야 감독.

몰리 수리야 감독. ⓒ 부산국제영화제


'강간당한 한 여성의 처절한 복수'.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받은 몰리 수리야 감독의 <살인자 말리나의 4막극>을 이렇게만 설명하면 좀 부족하다. 비장하면서 비극적인 내용이 예상되지만 막상 영화가 갖고 있는 분위기는 그렇게 침울하진 않기 때문이다. 일부 평론가는 '동남아시아 웨스턴극'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도 했다. 오락적 요소 또한 일부 있다는 걸로 해석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출신의 몰리 수리야 감독을 17일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만났다. 호주 유학파인 그는 부산영화제 아시안 필름 아카데미를 수료했을 정도로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고국에서 여성 인권을 꾸준히 강조하며 작품활동을 한 그의 첫 장편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했다.

폭력적이지 않은 살인마

아들과 남편을 잃고 이웃 남성들에게 성폭행 위협을 받는 말리나는 결국 자신을 건드린 남성들을 모두 살해한다. 음식에 독을 타거나 직접 목을 베어버리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말리나를 두고 수리야 감독은 "그의 폭력성을 오히려 완화시키고 싶었다. 말리나는 절대 폭력적인 여성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원작도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있고, 중간에 두 개의 단막으로 나뉘어있다. 영화 자체를 4막으로 나눈 것도 그 구조를 그대로 차용하면서 말리나의 폭력성을 완화하고 싶어서였다. 보시면 알겠지만 영화 속 카메라의 움직임이 거의 없다. 영상 보단 연극적인 느낌을 주려고 그런 거다.

각 막마다 주제가 있다. 1막이 어떻게 여성이 위협을 당해 살인자가 됐는가를 설명한다면 2막과 3막은 그 여성이 살고 있는 사회의 이면을 보이고 싶었다. 이게 영화의 큰 주제다. 영화에 등장하는 남성들, 경찰들의 반응을 통해 그 사회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를 보이고 싶었다. 마지막 4막은 한 여성이 또 다른 여성들에게 어떻게 영감을 주는지 말하고 싶었다.

이 작품엔 서스펜스도 있지만 코미디도 있다. 그래서 어떤 관객은 혼란스러워할 수도 있지만 그게 장점이라 생각한다. 다양한 장르성 덕에 판타지영화제, 여성영화제 등 여러 종류의 영화제에 초청받기도 했다. 영화에 대한 느낌은 관객 분들이 직접 보시고 정했으면 좋겠다. 어쨌든 가장 중요한 주제는 여성의 선택을 축복해주자는 거다."

영화를 촬영한 인도네시아의 숨바섬은 천혜의 풍광이 있지만 동시에 남성우월주의가 매우 심한 곳이다. 여성을 하나의 물건처럼 여기는 풍습이 있어 이곳 여성들은 심한 차별과 천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수리야 감독은 4명의 인물을 통해 이 사회를 사는 여성들의 모습과 그에 비춰 본 부조리를 짚으려 했다.

"4명의 여성은 각 세대를 대표하고 있다. 말리나는 그 사회에서 많은 걸 상실한 젊은 여성이다. 소녀의 경우는 꿈과 희망이 있고 아무런 죄가 없는 이미지다. 남성적 이름을 갖고 있는데 그 사회에서 강하게 자라라는 의미다. 임신한 여성은 주인공인 말리나의 신혼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여성의 임신은 그 사회가 가장 바라는 역할이잖나. 그걸 대변하기도 한다. 또 여행 중 등장하는 노파는 결국 여성이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어떻게 자신을 지킬 힘을 얻었나를 설명한다."

 영화 <살인자 말리나의 4막극>의 한 장면.

영화 <살인자 말리나의 4막극>의 한 장면. ⓒ 부산국제영화제


올바른 페미니즘

수리야 감독의 말대로 영화에 등장하는 남성들의 대사와 행동은 그 사회에 뿌리 깊게 박힌 왜곡된 여성관을 상징한다. 영화 속 남성들은 말리나나 임신한 여성 등에게 '여자들이 항상 문제를 일으킨다', '여자들은 궁지에 몰리면 피해자인 척한다' 류의 발언을 하며 상대를 비난한다. 이런 현상이 비단 인도네시아뿐일까. 이 작품이 여러 영화제에 소개되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여성 문제가 비단 특정 문화권만의 것이 아님을 뜻할 것이다.

"모든 국가에서 여성의 인권이 낮지는 않겠지만 분명 문제인 건 맞다. 한국은 어떤가? 물론 여자들도 남자에 대해 불평한다. '자기 말을 안 들어준다', '내 마음을 이해 못 한다' 등. 성차별은 항상 한쪽만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화에서도 양쪽을 다 보이려 노력했다. 관객 분들이 보시고 생각해보시길 바란다. 

관객 입장에선 오히려 말리나에게 더 거리를 둘 것이다. 그녀가 무슨 일을 벌일지 수수께끼처럼 진행시켰으니 말이다. 아마도 각 사회, 문화마다 이 영화를 다른 관점에서 볼 것 같다. 인도네시아에서도 그렇다. 우리나란 매우 많은 섬으로 이뤄져 있는데 섬마다 문화가 다르다. 어떤 곳은 여성이 우위를 점하며 자손들이 여성의 성을 따르게 하는 곳도 있다."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걸 인정하고 본인 역시 스스로 그렇게 말하지만 수리야 감독은 "반드시 페미니즘 영화를 만들기 위해 작업하는 게 아니"라고 설명했다. 아르바이트로 학생들에게 영화 연출과 작법을 가르쳐온 그는 "학생들에게도 특정한 사고나 정신을 추구하라고 하진 않는다"며 "난 그저 영화를 만들 뿐이고 그걸 어떤 박스에 넣을지는 관객 분들이 정하는 것"이라 말했다.

"제가 여자라서 이런 이야기를 그리는 걸 수도 있다. 여성을 잘 아니까. 하지만 다음 영화는 또 어떤 내용일지 저도 모른다. 여성을 바라보는 남자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래서 반드시 제가 페미니즘 영화를 만든다고 할 순 없다. 특정 상황에서 여성 캐릭터가 행동하는 방식이나 그걸 묘사하는 방식에서 관객들이 그런 요소를 찾으시는 것 같다.

물론 전 당연히 페미니스트다. 하지만 온라인이나 어떤 곳에서 내 의견을 주장하진 않고 영화로 제 생각을 담는 거다. 말리나를 보면 사실 평소엔 조용하면서 위협적이지 않다. 뭔가 주도하지 않는 성격인데 선을 넘으면 저항한다. 페미니즘은 강함보다는 균형감이 중요하다. 여성성을 무시하고 짓밟는 것에 대해 저항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영화 <살인자 말리나의 4막극>의 한 장면.

영화 <살인자 말리나의 4막극>에서 트럭과 오토바이 등의 탈 것은 중요한 상징이다. 도망자가 된 말리나가 집으로 돌아와 또 다른 여성에게 영감을 주고 함께 떠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떠남과 돌아옴의 모티브가 영화 초반과 후반에 깔려 있다. ⓒ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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